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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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이든, 미리 커다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은 어떤 내용을 나한테 보여 줄 수 있는데? 하는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시작한다. '우리만 아는 농담'이라니 나도 아는 농담으로 해주면 안될까, 속으로 생각했었다. 남태평양의 보라보라 섬에서 보낸 9년이라니. 실제로는 넷플릭스 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더라도 이 반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았다는 사실이 우선 행복해보였다. 사금파리같이 빛나는 타인의 행복한 순간, 현실에 발 딛지 않은 삶의 이야기에서 내가 감화될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삐딱한 시선에 날이 섰다. 그런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뭉그러졌다.

 

 "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음할 수 없는 단어가 계속 나타났다. 이리저리 발음을 바꿔가며 말해도 상대는 알아듣지 못했고, 하려고 했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해버리기도 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웠다. 말을 하면 숨겨둔 뉘앙스까지 귀에 탁탁 꽂히는 나의 모국어가. (19) "

 

 개인적인 이유로 저 문장이 마음속에 깊이 날아와 꽂혔고, 뒤이은 프로포즈 장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행복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바라보는 건 좋은 일이었지.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마지막 장면에 환히 웃으며 서로를 껴안는 두 주인공이 나오는 로맨스 영화를 보는 이유처럼 말이다.

 

 책을 읽고 한동안 말랑말랑해졌던 마음이 낡은 노트북 앞에서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것을 적어서 잠시 저장해둔 것을 야속하게도 불러오지 못했다. 이래저래 방법을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꼭 그렇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어쩔수가 없을 것 같았다. 뭐였더라, 손으로 주무르며 갖고 노는 색색의 장난감같이 말랑이던 마음이 딱딱하고 검게 굳어버리는 현무암처럼 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내뱉지는 않았지만 불쑥 욕이 솟아올랐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생각해봤다. 책에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사람으로 살지는 꿈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직업을 넘어서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 그 자체도 결국은 평생을 꿈꾸는 방향성일 것이다. 이렇게 짜증나는 순간에도 욕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것. 아니 애초에 이런 순간에 욕이 떠오르고 마는 사람인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꿈같은 소리아닌가.

 

 "우리만 아는 농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책을 곱게 보는 편인데, 일부러 그런게 아니지만 택배 포장을 뜯다가 그만 띠지에 가위가 닿았다. 아예 다 잘려지지는 않았어도 꽤 깊게 가위자국이 생긴 띠지를 보면서 '어쩔 수 없지'하고 넘어갔다. 처음엔 그랬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잘라진 틈을 보면 조금 미안해진다. '넌 띠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하고 웬 인형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책에 상처를 냈기 때문일까, 읽으면서 내 눈에 눈물 쏟을 일이 많았다. 상처 준 만큼 울게 되다니. 이 책은 농담을 한다고 해놓고 내 마음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책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다시 마음이 물렁거린다. 책을 읽으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카페에서 책을 읽지 말 것을, 내가 진짜 무모했다고. 커다란 커피숍 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며 남몰래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이는 추레한 독자는 화장실로 달려가 급히 끊어온 휴지로 코를 풀며 쪽팔림을 느낀다.

 

 대도시의 삶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여자와 걸핏하면 전기가 끊기고 모기의 습격을 받는 보라보라 섬에서 사는 여자의 삶에서 서로를 이해할만한 구석은 얼마나 될까. 그녀의 친구들조차 4층인 그녀의 보라보라 집 방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려다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 만큼 나도 그녀의 삶을 멋대로 정반대의 구역에 구분지어 놓았다. 물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은 맞지만, 그녀 삶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일부들은 내 삶에도, 모든 사람들의 삶에도 존재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쓰지는 않았겠지만 진실하게는 내놓았기 때문에 그녀가 보여준 보편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사실 나는 한번도 아버지에게 용돈 입금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말한 7에 공감했다. 한적한 새벽길을 달려 인천공항에 나와 이민가방같은 캐리어을 내려놓아 준 어떤 날을 공유했다. 올랑드를 두고 " 설마 노트북 달래? "하고 물을 수 밖에 없었던 달라지지 않음도 닮아있었다. 마트를 사랑하는 건 그녀와 내가 영혼의 쌍둥이-수많은 조각들 중 꼭 맞는 한쌍-라는 증거였다.

 

 실제로 나도 'I'm sorry'란 말을 때때로 해야할 상황에서 왜 sorry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도 조금은 긴가민가하다. 파인 땡큐 앤 유?처럼 반사적으로 내뱉은 적도 있지만, 어쩔 때는 이럴때 해줄 수 있는 다른 더 좋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에 그녀의 남자친구였던 남편의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오는데, 그녀가 그려주는 그의 프로필은 서정적이면서도 슬퍼 마음에 들었다. 기념일에 관한 이야기, 계단에 대한 이야기, 결국은 폐업한 그의 꿈,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차를 세우는 점, 중국식당에서 한국인의 치킨수프인 죽을 사온 일, 무엇보다 전날의 짜증을 공복이라는 웃음으로 덮어준 마음 씀씀이 같은 것이 좋았다. 그녀가 그를 통해 'I'm sorry'를 깨달았듯이, 그녀가 조심스레 덧붙여놓은 슬픔들을 보며 나도 한번쯤을 그녀를 위해 'I'm sorry'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더불어 나랑은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 실제로는 가까워질 수 없을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말이 통하지 않을!, 그에게도. 그리고 조금은 더 기꺼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와 슬픔을 나눌 내 친구들에게 그 말을 건네줄 수 있을 것 같아졌다.

 

 전부 솔직할 수는 없지만, 일부 진실되게 그녀에게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언젠가 가까운 이들에게 가볍게 아무것도 아닌척 흘려 말했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내밀하고 얼룩져서 숨기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삶을 얘기하는 '우리만 아는 농담'을 읽으며 다들 이렇게 살고 있구나, 조금 안도했다. 삶에 있어 오롯한 내것은 없는 것 같아 조금 실망도 했다. 특히 아빠와 얽힌 "편도 항공권" 글을 읽으면서 " 그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일은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일이라는 것 "이라는 문장이 또렷하게 가슴에 박혔다. 이 말을 좀 더 젊었을 적의 내가 읽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기꺼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은 누군가와 새롭게 사랑에 빠질만한 여력도 없지만, 그게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일이라면 더욱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다. 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식이 결혼해서 애낳고 사는 것을 너무나 바라는 부모님이 듣는다면 전혀 절대 좋아하지 않을 만한 것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과 내가 연결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게 무섭다.

 

 책을 읽다 감정적으로 지쳐서 잠깐 쉬었다 읽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때 대충 몇 줄 읽다가 덮으려던 책을 다시 펴게 만든 부분이 친구 소현과 그녀의 할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녀의 친구와 심지어 그녀의 친구의 할머니, 다른 가족들까지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먼 집"은 내가 사랑하는 영화였다. 어느 날 오후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영화는 그 날 오후와 그 뒤의 오랜 시간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너무 달라 아무런 접점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미 닿아있었구나 싶어졌다. 문득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영화를 보고 느낀 것들이 조금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제는 태연이의 친구 소현이와 소현이네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할머니의 먼 집"을 꼭 보길 너무나 추천하다. "우리만 아는 농담"도 "할머니의 먼 집"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과 온도를 가지고 있다. 좋은 사람의 곁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이 두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이 어쩐지 너무나 이해가 간다.  

 

 다 읽고 난 뒤에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내가 발견한 보편으로, 그들에게도 감동이 전해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에세이는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앞으로 에세이 책 앞에 서서 신간을 살피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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