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정말 TMI 대방출이다. 아, 나는 예술-예술가에 대해서 이 정도까지 알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약간의 지적허영심 정도만 채운다면, 책을 들고 아는 이름을 발견하고 본 적 있는 그림을 눈도장 찍고 널리 알려진 일화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면 된다. 그런데 이 사람-줄리언 반스-은 전에 요리할 때도 그랬지만 날 순순히 놔둬줄 요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알아 괴로운 것들을 너에게도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손해라는 듯이 뛰어난 글빨을 이용해서 살살 사람을 꾀어낸다. 그냥 예술에 대해 아는 척 하려는게 아니라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 것을 너에게도 말해주지 않고는 못배긴다는 듯이 털어내놓았다. 그러면서 미끼를 던진다. '읽어봐, 재미는 있잖아'

 

 문제는 재미있다는 거다. '저는 솔직히 미술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요?' 라고 자신을 방어한다고 해도 이 사람이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그런 것 쯤은 상관없게 만드는 읽는 재미를 준다. 다만 그 재미란 것이 드가의 '성적 수단의 부실함'(183)을 언급하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콘돔을 샀다는 주장이 제기 됐건 말건 알고 싶지도 알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tmi 파티라는걸- 모르고 드가의 그림을 본다면 참 좋을텐데, 책을 읽고나면 이제 앞으로는 드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음, 영 좋지 못한 능력이지만 콘돔을 샀긴 했다지'하고 떠올리며 감상하게 될 것이다. 이것든 드가와 내 사이에 일어난 불행인가 이해인가 아리송해하면서.

 

 사실 미술관에 다녀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소문난 전시회라는 곳에는 일부러 찾아가도 보고 도록이며 도슨트 설명이며 찾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다소 미술작품들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은 그 시간들이 나한테는 아무런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이 잘 그렸다, 예쁘다 같은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림을 보고 그 이상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면 아마 계속 작품들을 보려고 노력했을텐데, 누군가 떠먹여주어서 알게되는 것 외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걸 알고나니 미술과 예술이란 것들이 더 멀게만 느껴졌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을 읽는 일도 두려움이었다. 이 사람의 아는 척만 열심히 들어주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책을 덮을 일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사적인'이란 단어를 간과했던 것일까, 넘쳐나는 tmi들이 예술세계를 지질한 인간세계로 끌어당겨 준다. 읽다보니 작가에게 차라리 예술은 예술의 세계로 남아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쿠르베가 '항문으로 18리터' 대신 '복수 흡입'으로 수종을 치료하려 했다(102)는 것이나, 보들레르와 들라크루아의 기싸움, 그들이 남긴 일기 내용 같은 것, 보나르가 죽은 아내그림을 집착적으로 그린 것(216), 피망을 특히 잘 그리는 발로통이 친구 모랭에게 들은 "내 친구들을 보면 총각일 때는 성격이 좋았는데 장가든 뒤로는 고약해지더군."(265)이란 조언이나, "결혼을 예술의 적으로 간주하는" 예술가들의 강력한 전통(191) 같은 걸 읽다보면 차라리 그들의 삶을 모르고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미술작품일텐데, 하는 아쉬움이 불쑥 든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얘기만 늘어놓는 우스운 책은 아니다. 읽다보면 줄리언 반스는 이 많은 예술가들과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는걸까 의문이 들 정도로 미술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이쯤되면 요리 정도는 그냥 손대지 않아도 됐을텐데 음식에 대한 에세이(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도 냈었지,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걸까 작가에게도 벽이 느껴진다. 새알을 바라보며 새의 그림을 그리는 마그리트를 두고 양이 있는 지역을 지날때면 양갈비를 떠올리며 "저녁거리네"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314) 웃으면서 재밌게 책을 읽다가 근본적인 관념수준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물론 읽으면서 얕은 희망도 느꼈다. 나도 영 못쓸 인간은 아니란 듯이 그래도 책을 읽으니 미술에 대한 이해가 좀 생겼나 싶은 때도 있었다. 보나르에 대한 단락을 읽으며 욕조 안에 있는 사람의 하반신 그림을 보았다.(217) 선뜩하게 칠해진 색감을 두고 내심 '왜 저렇게 시체처럼 그렸담' 하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그가 진짜로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다는 내용을 보게 된다. 물론 그녀가 죽은 모습을 그대로 그려놓았던 것은 아니지만, 죽은 사람처럼 그렸다고 생각했던 상황과 비슷하게 시기가 엮여가니 '내가 그림을 본건가' 싶어지는 때였다. 정말 그림으로 뭔가를 전달할 수 있고 그걸 수신할 수 있는게 무려 나에게도 조금은 있다고? 어쩌다 하루에 두번은 맞는 고장난 시계같은 감이지만 잠깐 맞았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어떤 부분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듯 읽었다. 특히 '15 이것은 예술인가?' 부분이 그랬다. 이게 바로 예술입니다,하고 반박조차 받지 않을 작품들도 보는 눈이 없다며 스스로를 한탄하는 와중에 '예술인가?'하는 미술품에 대해서 무엇을 어쩌겠는가 하는 배짱이었다. 나 역시 최대한 따라가려고 노력하며 읽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놓을 건 놓아가며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에 대한 부담감을 접고 약간의 호기심만으로도 이 책을 충분히 시작할 수, 끝맺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해 잘 안다면 아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테지만 거기까지는 나도 볼 수 없는 영역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놓겠다. 나도 생과 사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더 맞겠다. 앞으로 이어질 시간들, 그것을 견뎌내는 일에는 때로는 이유가 없지만 때로는 의미를 찾고 있다. 특히나 "화가들은 결코 자기들이 정확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지 못하고 죽는다.(109)"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우리 모두의 삶도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걸어야하는 것이다. 아래 옮겨놓는 문장은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추모이며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버티는 삶들에 대한 염려이다.


 " 이는 모든 것을 팽개쳐버리는 예술가들이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혹은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화가들보다 훨씬 큰 감동을 주는 본보기다.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 대담한 자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일하고, 끊임없이 분발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고,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을 파기하는 일이 잦으며, 작품이 타락하지 않도록 반드시 타락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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