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하는 여자들
대니엘 래저린 지음, 김지현 옮김 / 미디어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읽을 책들 더미 위에 '반박하는 여자들'이 맨 위로 올려지던날 지나가던 사람이 흘끗 보고 한마디 했다. "반박하는 여자들?" 예상이 가는가? 말꼬리가 미묘히 올라가있었다. 반사적으로 가슴이 선뜩했다. 맨 위에 올려두지 말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짓 "왜요?" 하고 물으니 "책 제목이 뭐 그래?" 하고는 가버렸다. 책 제목이나 표지에 페미니즘 관련된 내용이 있으면 가끔 읽을 순서가 되어도 맨 위에 올려놓지 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했다. 페미니즘에 따라붙는 혐오와 공격성이 옮아붙을까 싶었던 것이다. 평소에 놓여진 책들을 슬쩍 훑는 일들이 없진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말끝이 올라간 한마디를 들었다. 여자들이 왜 반박을 해서는.

 

 책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 건조하다. 책의 제목을 보고 무서운 페미니즘 전사들이 잔뜩 흥분한채로 고양된 감정을 드러내며 피해의식에 가득한 얘기를 쏘아낼 것이라 생각했을 사람들에게 유감이다. 평범한 소설들로 채워진 소설집일뿐이다.

 

 " 장 뤼크는 미국인은 아니다. 아마도 유부남인 듯하고 나이는 나보다 확실히 많다. 내 평생 처음으로 혼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난 다음 날, 그는 내게 커피를 사주고는 지금쯤 고향에서 샘이 바람피우고 있을 거라고 우긴다. 그는 내가 어리고 순진하며 내 미래는 그가 말하는 진실 그대로 될 거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와 네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나서야 내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된다는 걸 깨닫는다. p.134 "

 

 이 책의 재밌는 점은 이런 순간이다. 어디서 마주쳤던 것 같은 사람과 상황들에 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예의발랐을때 나에게도 자신이 옳고 삶은 이런 것이라며 개똥철학을 늘어놓으려 드는 꼰대들과의 대면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땠었나, 너무 많은 시간을 예의차리며 그 앞에 앉아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된다는' 깨달음이 더 빨리 왔었다면 좋았을텐데.

 

 다른 단편들보다 '풍경 27'이 마음에 들었다. '반박'도 실제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 괜찮았지만 틴에이저의 시선이라 좀 거칠었다. 하지만 '풍경 27'은 금방이라도 무슨 사건이 생길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잘 느껴지는 분위기도 좋았고, 리차드 기어가 나온 '언페이스풀'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는 내용도 흥미진진했다. '언페이스풀'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고, 혹시 안봤다면 그냥 '언페이스풀'을 보면 될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영화는 재밌으니까.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던 영화라 '풍경 27'을 읽으며 '언페이스풀'이 연상되는게 좋았다. 생각보다 짧게 마무리되어서 아쉬웠지만 읽는동안 그래서, 그 다음은? 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다. 

 

 " 그때는 웨슬리를 임신한 지 5개월째였는데, 그 사실을 쉽사리 잊어버렸다. 모든 일의 주도권은 그녀의 몸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녀가 아기를 원하는지, 아기를 잘 돌볼 것인지, 사랑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는 그녀의 안에서 자라다가 태어날 테고, 그 과정에서 둘 중 하나는 - 특히 그녀가 - 죽을지도 모르며, 그녀 몸의 모든 것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그래야 다시 임신할 수 있을 테니까. p.315 "

 

 임신이 여자의 몸을 기능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임신과 출산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만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면서 느꼈던 불쾌함은 일의 주도권이 그녀의 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문제들이 사실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성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필연/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맞겠다.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며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을 만났다. 모성이 너무나 위대해서 모성으로 그것들을 모두 이겨낼 수 있는게 당연하지 않다.

 

  어느정도 강렬한 내용이 들어있지 않을까 준비하며 읽었는데 생각보다 묘하다. 제목이 도전적으로 보여지는 것에 비해 내용은 그림자로 비추는 어른한 형태로 윤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좀 아쉽기도 하고, 이런 방식의 접근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 읽어왔던 여성들을 주제로한 글들에 비하면, 좀 순한맛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한국적인 소재가 담긴 내용이 더 매운맛에 익숙한 탓도 있겠다. 심심하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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