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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평점 :
" 두출은 휘파람만 분다. "아파트 슈퍼 앞에 횡단보도 있죠? 거길 건너는데 기분이 좀 이상한 거예요. 옆을 봤죠. 비둘기가요, 저랑 같이 뒤뚱뒤뚱 걸어가다가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아니 무슨 비둘기가 횡단보도로 이족 보행을 해요. 완전 귀여웠던 거죠. 그런데요, 어쩐지 좀 슬프기도 했어요. 마음 한구석이 그랬어요. 할아버지, 신이 있다면요, 신도 우리를 볼 때마다 그런 마음 아닐까요?" -p.293 "
언제부터인가 나이먹는 일이 시시했다. 때때로 내 나이가 몇이더라 기억이 가물할 적도 있다. 서른 어쩌고 하는 의미부여가 서른이 되기 전에는 크게 다가왔는데, 서른이 되고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아이들에겐 스물이 가장 강렬하겠다. 적어도 스물이 되면 안됐던 것들을 할 수 있으니까. 운전하기 술마시기 담배피기 클럽가기 같은 것들을 해도 된다. 해도 될 때 하면 막상 재미도 없지만 스물이 되면 변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서른은 없다. 김광석의 노래 말고는 주어지는 게 하나도 없는데 서른이 뭐가 대단한 것이라고 서른, 서른하나 싶었다. 이런 느낌이라면 마흔이고 쉰이고 환갑이 되어도 그러려니 하고 살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도 그래서 기대가 없었다.
서른이 뭘 어쨌다고.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이란 말을 어르신들이 들으면 웃겠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작 서른 어쩌고로 나이타령하는 뻔한 내용이겠거니 악독한 마음을 품고 대충 책을 들었다. 학교 안다니겠다는 남다른 성격의 미지가 나올 때도 '따돌림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지 못한 상처가 있겠지' 넘겨짚고, 영오를 보면서 '일하는데 전화하고 참견하는 꼬맹이랑 진짜로 대화가 하고 싶을까' 의심했다. 이처럼 내 마음이 악독했는데, 자꾸 읽으면서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니까 감동을 받았다. 끝내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 얽혀있어서 다행이야, 하고 안심하며 책을 덮었다.
호석이 죽고 난 뒤에 남긴 수첩으로 시작된 이 로드무비는 영오, 강주, 보라, 덕배 네 사람이 무덤 여행을 떠나며 절정을 이룬다. 거기에 미지가 두출을 찾아 범수와 강화도로 향하면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로드무비라고 했더니 진짜 차를 타고 길을 떠나는 진정한 로드무비를 구현해냈달까? 꽁하니 마음만 차가워져서 때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우습게 여겼었는데, 줄여서 '서른셋'을 읽으며 언제 어디서고 겹겹이 쌓이는 인물간의 관계성을 지켜보고 있자니 냉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거기에 나도 알고싶은 김밥의 비밀은 미지가 챙기고, 보라이모는 네일보다 먹방 찍으면 대성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개인방송 크리에이터로 성공하길.
소설을 많이 읽지도 않으면서 요즘 나오는 책들은 구정물 튄 자국만 남은 청춘에 몰입해서 싫어'라든가, 내면과 일상 범주에 갇혀있어서 별로'라는 생각만 갖고 있던 것 같다. 그런 것들 안에서도 이렇게 '좋다'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만한 책을 만나게 된다. 영오가 수첩안에서 만난 사람 모두가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니, 너무나 동화같은 이야기지만 그래서 좋았다. 사는게 그렇지 못하다면 꿈이라도 꿀 수 있으니까. 언젠가부터 너무 어둡고 절망적이기만 한 이야기는 가슴이 답답해서 보기 어려워졌다. 그런 일들은 현실에 가득 쌓여있는데, 가끔은 뉴스조차도 보기 싫어진다. 그러니 부정적 소식에 지친 분들이여, 문학에서 오아시스를 찾으시라.
간만에 좋은 느낌을 남기는 이야기를 만났더니 가슴 안에 쌓여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털어내고 환기시킨 기분이 들었다. 목공소 앞 목련나무가 꽃을 피우듯이, 이 봄도 맞을만 하겠다. 내 마음도 따뜻해져서 봄을 맞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누군가 요즘 읽은 책 중에서 괜찮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서른셋'을 권할 것이다. 읽어보시라,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알고보면 외롭고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