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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세계사 - 교양으로 읽는 1만 년 성의 역사
난젠 & 피카드 지음, 남기철 옮김 / 오브제 / 2019년 3월
평점 :
책에도 그렇지만, 내 자신에게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마음 같아서는 책은 30, 나 자신이 70. '에로틱 세계사'라는 제목에서 기대할만한 내용은 있는데 없다. 한 문장에 한번씩 섹스, 페니스, 음경 같은 말이 꼭 들어갈 정도로 오픈되어 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지루하다. 어린시절 처음으로 코스모폴리탄을 샀던 이후로, 미용실 잡지에 손가락을 끼워 페이지 표시를 해놓고 읽은 코너가 있었던 이후로, 성에 대한 내용으로 점철된 텍스트를 맞이하여 지루함을 느낄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이 바로 그걸 해낸다. 에로틱은 죄가 없는데 세계사 라는 부분이 문제였을까.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해 많이 알아서 지루함을 느낀걸까 생각도 해봤는데, 아니 내가 알면 얼마나 뭘 안다고 싶기도 하고, 솔직히 tmi인 정보가 쉴새없이 주어지는 내용이라 그게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 판에 박힌 학교 성교육 수업도 수업 안하고 놀며 때울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이고 즐거웠는데, '에로틱 세계사'는 정년 퇴임을 십년전쯤 한 노교수가 연 특별 강의를 수강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피임법(p.35)이 실제로 효과가 좀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피임법이라 하면 콜라나 커피를 마셨더니 피부가 까만 아이를 낳았다거나 하는 90년대식 유머같은 허무맹랑한 방법일거라 생각했는데. 인류 문명의 기원이 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문득 떠오르며 고대인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고 갑니다. 또, 여성의 성욕/성감이 남성보다 아홉배 강하다(p.55)는 부분에서 테이레시아스가 여성의 육체를 버리고 남성을 선택한 이유를 개인적으로는 생리, 임신, 출산의 문제로 봤다. 여성의 신체가 아홉배 더 섹스를 즐길 수 있다더라도 테이레시아스가 여성의 몸으로 산 7년 동안 아이도 몇 낳고 매춘부로 살았다고 하니, 공백이 없고 오르가슴에 도달하기에 간편?한 남성의 육체로 돌아가길 꾀하는 편이 좀 더 경제적이지 않았을까. 최근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여성의 생리에 대해 과거와 현재 삶의 양식을 비교하여 설명한 글을 봐서 직관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다. 이견 받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와핑'이라는 행위가 관음과 자극을 위한 역겨운 의도가 아닌 근친에 의한 유전적 방어를 위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누이트들의 스와핑(p.131)은 전통적인 '램프 불끄기 놀이'를 끝낸 뒤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내를 빌려준 남편의 성을 이름으로 붙여준다는 것이다. 상대 남자의 성을 공공연히 이름으로 쓰는 자식을 키우다니. 이누이트들의 저런 문화가 가능했다면 종족보존은 개인이 아닌 종의 보존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더 크다. 그렇다면 현대의 스와핑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현대의 스와핑에서도 상대방 남자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생긴다면 그들 부부는 상대남성의 성을 따 아이 이름을 짓고 자식으로 잘 키울까. 유전질환을 막기 위한 필요의 이유가 아니라면 스와핑을 원하는 현대인들의 이유는 뭘까. 문득 스와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간음하지 말라(신 5:18)는 기독교적 결혼관과 불교의 '10선도' 등의 계율을 따르며 생긴 학습된 견해는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는 뒤의 모수오족(p.138)의 섹스 파트너 공동체, 카사노바의 수녀 여자친구(p.193), 미공군의 스윙어 클럽 (p.269) 부분에서도 비슷하게 나온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서는 상상의 간통으로도 교수형(p.173)을 당할 정도로 시선이 달라진다. 성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것이다.
읽다보니 과거와 현재 동안 수많은 성행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한번 존재했던 행위가 금기시됐다고 해서 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문명의 행위들도 그러할까. 과거에는 자행되어 왔으나 현재에는 아예 사라진 문화나 행위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스킨쉽에 후진은 없다는 명언이 인류사의 큰 흐름에도 적용되어 아로새겨져 내려오고 있다니. 모든 연인들은 그 점을 잘 기억하고 단계를 소중히 하도록. 내용 자체는 괜찮기 때문에 아마 성/섹스에 대한 내용이니깐 흥미진진하고 재밌겠다는 고정관념 섞인 기대를 버리고 읽는다면 좀 더 나을 것이다. 과연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섹스는 어떻게 그 모습을 달리하며 이어져왔는가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알고 싶은 학구적인 눈으로 책을 읽기를. 왕년에 잡지 좀 읽었던 우리들은 다음월 호 잡지를 읽는 편이 더 재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