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 내가 비밀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 주위에는 온통 말 못할 비밀뿐이었다. 할 수 있는 말 밑으로 어둠에만 속하는 울림이 있었다. 내 여동생들과 나는 지난 5년간 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함구했다. 그 세월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침대에 몸을 던지며 울부짖던 때도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기론 그건 낮에 부모님이 시내 사무실에서 보내는 삶과는 별개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밤 내가 부엌에 내려가서 맞닥뜨린 아버지가 이제는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외려 화가 나 있더라도, 내게 혹은 삶에 화가 나 있더라도, 그리고 내게 저주를 퍼부으며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그 모든 일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p 165 "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는 소재 자체만으로도 읽기 어려운 책이다. 거기에 분량도 적지 않다. 이는 1990년대 미국에서 실제 벌어졌던 아동 성범죄와 이를 다룬 법정 공방을 그려내면서 저자 자신의 어린시절을 교차해가며 보여준다. 독특하게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하면 모호함이 떠오른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소설보다 분명한 사실적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인가가 매우 모호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이 소재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에는 꽤나 고약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허구가 섞여있겠지 하거나 섞였기를 기대하게 된다.

 

 " "나는 어린 남자애를 좋아해요." 그가 말했다. "안 그러려고 무척 애를 써도 그래요. 성적으로요." - p233 "

 읽는 도중에 계속해서 리키라는 인물이 왜 아동을 대상으로 욕망하는가에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극악스러운 범죄 뉴스를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왜?" 하고 매번 품는 의문이지만 어떤 사고와 계기로 행동과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거기다 함께 다룬 어린 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할아버지의 친족성폭력 또한 그 이상의 거부감이었다. 마땅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리키의 불우했던 출생과 성장기 같은 것들을 읽으며 그게 어떤 이유가 되는지 반문했다. 할머니와 오빠 같은 다른 가족들이 알아선 안된다고 입막음을 당하는 지점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 나는 화면 속 저 남자를 구제하는 일을 돕겠다고 이곳으로 왔다. 저런 남자를 돕겠다고 이곳으로 왔다.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과거 내게 일어난 일로부터 내 이상과 내 실제가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 둘은 별개여야만 했다.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스크린 속 남자를 보자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만지던 손길을 다시 느꼈고, 그래서 알았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훈련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일하러 온 명분에도 불구하고, 내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리키가 죽기를 바랐다. p 311 "

 

 아동성폭력의 피해자가 왜 가해자인 리키의 사건에 파고들었을까. 비슷한 사건은 마주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일텐데 굳이 지난 사건을 집요히 파고든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읽었다. 극복했기 때문일까 혹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얽매여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한 극복과 긍정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도구를 위해 마땅한 죄를 지은 범죄자의 삶을 동정하여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리키가 처음 교도소에 들어갔다 석방된 후로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제러미가 죽었다. 그애의 엄마인 로렐라이 마저 그를 편들어 증언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생명을 죽였고, 또 기회만 주어진다면 능히 죽일 것이다.

 

 더구나 로렐라이가 니키의 재판에 굳이 찾아와 사형을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생명존중에 대한 감동을 느끼기보다는 어떤 인상적인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마이클 샌들 교수의 강의에서 나온 질문과 비슷하다. 간략히 옮기자면 '선로에 있는 다섯 사람이 곧 다가올 기차에 치일 위기에 쳐했다. 그 앞 길목에 한 뚱뚱한 사람을 밀어 희생시키면 그로 인해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그녀가 니키의 사형을 반대했던 이유도 용서보다는 사형 집행 영장에 남을 자신의 서명이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석된다. 덧붙여 할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한 딸에게 그 사실을 함구시켰던 부모의 결정처럼 묻어두거나, 여동생처럼 자신에게 아예 없던 일로 하기 위해서 사실을 외면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읽는 동안, 그 후에도 마음은 불편했다. 평소 범죄수사물 미드를 즐겨보는 편인데도 시각으로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범죄 장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무거움이 있는 책이었다. 우리-보편적으로-가 원하는 결말은 없지만 지독한 현실이 있고, 군상들이 존재했다. 범죄물을 좋아한다면 색다른 느낌으로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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