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끔 슬픔은 정신적인 것이고 갈망은 육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상처고 다른 하나는 절단된 팔이나 다리, 꺾인 줄기에
달린 시든 꽃잎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바짝 붙어서 성장하다보면 결국에는 한 뿌리를 공유하게 된다. 우리는 상실을 논하고 치유하고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인 특성상 특정한 윈칙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운데가 부러진 식물은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냥
죽는다. (p.193)"
"베어타운"을 읽는 동안 어느 날은 눈이 왔다. 바람이 세차게 분 날도 있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집 안은 손톱을 파랗게 만들게
추웠다. 봄은 바깥에 있었고, 집 안은 아직 겨울이었다. 발끝에서 지겹도록 머무는 냉기를 느끼며 베어타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보여주는 세계는 처음이었다. 이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이 새로운 세계를,
베어타운을 좋아할 수 있을까. 가만히 책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두께를 가늠해보며, 약간은 염려하며 그보다 더 조금 기대를
품고 읽어나갔다.
작은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천히 소개받으며 베어타운이 주는 첫인상을 가늠해봤다. 모든 것을 오로지 하키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이분법으로 나뉘는 도시에 질려갈 때 쯤 길게 늘어진 실마리를 찾아냈다. 실마리를 잡고 난 뒤부터는 쇠락해가는 도시와 이를
일으켜낼 운동 경기, 열광하는 사람들과 성장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급격히 걷혀나갔다.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무겁고도 깊었다. 다소 생소한
하키 팀의 성공담을 감명깊게 볼 수 있을까 염려했던 일이 사라지자, 그저 이 이야기가 그냥 하키 팀의 성공담이었길 바라게 되었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소년들의 어깨에 마을의 활로가 걸린 것처럼 구는 사람들의 행태가 경멸스럽고, 선수들이 쓰는 떡친다는 표현이 불쑥
등장할 때마다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키도, 선수들도 돈벌이를 위한 도구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선수들은 마을에 불러올 돈이 되고, 승리를 위해서
잘못된 행동들이 묵과된다. 마치 재능있는 선수의 특권 같지만,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 곰에게 주는 먹이 보상과 다름이 없다. 팀의 결속력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한 강요된 남성성은 기민한 영혼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 속에서 보보라는 인물의 성장은 거의 유일한 위안이고 웃음이
된다.
청소년팀이 우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온 마을이 그것에 집중할 때 '마야의 사건'이 터져나온다. 팀에서 가장 유능한 선수 케빈에게
준결승 승리 축하 파티에서 페테르의 딸 마야가 성폭행을 당한다. '케빈에서 초대를 받아 어른들이 없는 빈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고
즐겼기 때문에' 절망적인 순간에 어린 소녀를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도 강제로 뜯겨나가는 블라우스 단추를 바라보며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질문들이 무얼지 헤아린다. 슬프게도 그것은 "술을 마셨는가? 어떤 관계였는가? 제대로 저항했는가?" 따위의 익숙하고
어리석으며 모욕적인 질문들이다.
이 사건은 베어타운을 작은 충격에 빠뜨리고 충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를 뒤흔든다. 깊숙히 베어타운 안으로 몰입해
나가다가도 문득,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시점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베어타운에서 성폭행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문학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말한다면 바로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주 쉽게는 왜 방금 전까지 당신과 웃으며 술을 마시고 키스를 했던 여자가 "싫다"고 하면 더 이상의 어떤
행위도 허락치 않는 것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현실이 절망적인데에 비해 "베어타운"은 희망적으로 끝을 맺었다. 마야가 케빈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궁금했던 것보다,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할까봐 걱정하며 읽은 것치고는 희망찬 결말이었다. 이 이상의 소설적 허용은 줄 수 없다는 듯이 모든 인물들이 변화하고, 상황이
반전되는 사이다같은 결말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 속 소녀는 무릎을 꿇지 않았고, 그녀의 곁에는 가족과 친구와 진실을 보는
지지자들이 남았다. 책장을 넘기느라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쥐고 서서히 "베어타운"을 걸어나오며 이 소설이 꽤 트렌디했음을 느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