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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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갑니데이.' 어릴 적이었다. 할머니께서 뜨거운 물을 버릴 땐 항상 이렇게 누군가에게 말을 하셨다. '할머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아무도 없는 마당 귀퉁이에 물을 버리면서... '땅 속 짐승들 델까봐 피하라 카는그다. 갸들 놀랄까봐.' 할머니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시고는 부엌으로 향하셨다. 참, 오래 오래 할머니와 더불어 내 속에 남아있는 긴 여운의 한 마디였다.

희망의 이유를 읽으면서 땅에서 태어나 평생 땅과 함께 사셨고, 그렇게 당신 오신 땅으로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머리로 먼저 계산하고 행동하는 현대인에게 땅 속 짐승들의 뜨거움이 느껴질까... 그들이 데일까봐 걱정하는 맘을 알 수 있을까... 제인 구달이 평생을 침팬지와 더불어 살 수 있는 힘도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그들을 만났기 때문인 듯 하다. 나의 할머니가 생활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땅 속의 그들을 만났듯이...

평생을 침팬지와 함께 한 삶이라서 침팬지 이야기가 대부분이리라 생각했는데... 침팬지 보다 더 복잡하고 무서운 짐승,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배고프지 않는데도 같은 종족을 해할 수 있는 인간, 홀로코스트의 잔인성과 비극성, 그리고 급속하게 파괴되어 가는 환경과 자연, 그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을텐데... 제인 구달은 조심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적어도 인간은 역사를 되새김질 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치욕의 역사적 상처를 깁고, 상처가 아물면 그 위에 고운 새살을 만들 수 있을거라... 그래서 우린 그 새살을 희망이라 말할 수 있을거라고...

세상의 작고 귀한 희망은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믿는 마음에서 비롯됨을 오늘 나의 아들에게 이야기 해 주어야겠다. 더불어, 땅 속에 사는 더운물을 싫어하는 많은 친구들도 가르쳐주어야겠다. 그 애가 자라서 만날 세상은 더 밝을 거라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말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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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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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끝까지 남아주어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자기 생의 끝자락을 지켜주던 아내에게 남편이 건넨 마지막 한마디로 이 영화는 진정한 사랑의 승리자를 매듭지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결코 떠나지 못하던 그녀의 긴 삶도 곱게 마무리되었다. <열정>을 읽으면서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영화였다. 참 바보같이 속고 지낸다고 여겼는데...

인간이 지닌 감정은 그래 열정이라 칭하자. 그 열정은 어쩜 이름 붙이기 어려운 욕심이 아닐까. 세상의 중심이 자신을 향하여 돌아가기를 그래서 세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수많은 욕심들이 열정, 분노, 욕구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책장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생각했다. 모두다 안타깝구나. 참 서럽게 살아버린 인생이라 억울하기도 하겠구나. 크게 용서하고 받아들인 자가 지닌 여유를 그들 모두에게는 허락되지 못했으니 형벌 아닌 형벌로 평생을 견디어야 하겠구나.

단순한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사랑한 두 사람 아내와 친구가 자신을 배신하고 몰래 사랑을 한다. 그냥 자신을 죽이고 도망을 갔더라면... 이라고 여길 정도로 헨릭은 그 두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고, 그것이 더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한 줌의 검은 비단 같은 재로 변한 그들의 41년의 삶. 열정이었다 말하기엔 뭔가 부족하지 않을까...

씁쓸하다. 너무 새콤해서 오히려 쓴맛이 나는 사탕 같다. 맛있을 것 같아서 껍질을 벗기고, 첫 맛이 묘해서 계속 먹었는데, 다 먹고 나도 여전히 씁쓸한... '산도르 마라이' 참 솔직하면서도 조금은 잔인하고 여겨진다. 너무 들추어내면 아프기 마련인데... 인간이 지닌 본성을 너무 많이 보여준 것은 아닌지.

눈이 많이 올 듯한 날씨다. 이 날씨와 참 잘 어울리는 소설 같다. 그리고 벌써 서른의 삶을 살아온 나를 돌아본다. 너무 들추어내면 아프기 마련인데... 조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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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1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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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시집이 5000원이라니...' 눈이 올 것 같은 겨울날이었다. 유독 창문이 큰 찻집 귀퉁이에 먼지가 뽀얀 시집 한 권을 빼어 들며 내가 뱉은 첫 마디가 시집의 가격이었다. 어느새 내가 시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다니... 그 날 내 삶이 얼마나 쓰게 느껴지던지 마시던 커피 대신 맹물을 한잔 마시며 시집의 먼지를 닦고 품에 안았다. 가슴이 조금은 데워지는 느낌, 참 서럽도록 바쁘게 산 시간이었다. 한 편의 시조차도 사치처럼 느끼면서...

김용택은 말한다. 누렇게 색이 바랜 오래된 시집, 그 시집 갈피마다에서 젊은 날이 걸어나온다고. 김용택과 더불어 세월을 지낸 시들은 어느새 그를 닮았고, 여전히 시집 가득 섬진강 강바람 냄새가 난다. 그 바람을 타고 소중한 사람들이 이 한 권의 시집 속에 맨살을 부비며 같이 숨쉬고 그들의 시가 곱게 쌓여간다. 난 그렇게 한 편의 시로 가슴을 데워주는 그들을 사랑한다. 운주사 산등성이 와불님의 팔을 베고 눕고싶다는 정채봉을 사랑하고, 어린 눈들이 녹아 사라짐이 안타까워 살얼음을 만드는 안도현도 사랑한다. 갈대의 작은 몸부림도 쉽게 보아 넘기지 못하는 신경림도 사랑하고, 섬진강 비릿한 삶의 냄새를 아프지 않게 읊어내는 김용택도 사랑한다. 그리고... 몰래 불문과 수업을 들으며 이성복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그 시절의 나도 사랑한다.

가끔 시를 가르치면서 오래도록 고민한다. 또 이 시를 이렇게 마음대로 토막을 내야 하는 것인지. 고기의 가시를 발라주는 것이라고 위로하면서도 매번 펄펄 살아있는 물고기를 단칼에 죽이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미 죽어버린 시를 매번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아닌지 참 많이 망설인다. 고등학교 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분석하던 문학 선생님이 싫어서 귀를 막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꼭 그 때의 문학선생님이 되어 버렸으니...

한 편의 시로 데워지는 가슴, 그런 가슴들이 등을 맞대고 몸 부비며 사는 세상, 나도 그렇게 데워진 가슴으로 그 고운 세상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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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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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올 정도로 파란 침묵이 밀려왔다.' 잠시 책을 덮고 머뭇거렸다. 파란 침묵을 말하고 있다니... 살면서 많이 힘이 든다고 느끼던 시절 우연히 새벽에 잠에서 깨어 냉장고 문을 연 적이 있다. 물이라도 마시면 좋아질거라 왠지 그럴 거라 여기면서... 냉장고 불빛 탓인가 거실을 가득 채우던 푸르름, 그 을씨년스런 공기가 오히려 얼마나 신비스럽던지. 물을 따르다 말고 물 잔에 담긴 파란 어둠을 한 입 가득 삼키고 울어버린 기억이 난다. 그때 마신 파란 어둠 탓인지 살면서 만나는 많은 상처들을 난 쉽게 파랗다고 느끼게 되었다. 검푸른 멍자국 같이... <키친>이라는 글 속에 가득 묻어나는 푸른 상처들이 역자가 말하듯 [상처 깁기]의 바늘땀 같이 아프게 다가왔다. 책을 덮으니 하얀색 표지마저 푸르게 느껴질 정도로...

자그마한 도자기 인형같은 글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더불어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참 잔잔하게 다가왔다. 사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은 처음이었고, 조금은 강하게 현실은 비꼬는 글들이 아닐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잃어버림에 대한 상처를 참 조용하게 풀어가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를 잃은 미카게와 아버지겸 어머니를 너무도 어이없게 잃어버린 유이치, 그리고 형과 연인을 같이 잃어버린 히라기, 사랑하는 애인을 잃은 사츠키... 잃어버리기와 잊어버리기와 이겨내기를 힘들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너무 슬퍼서 세일러복을 입어야 하고, 너무 아파서 조깅을 해야하고, 그리고 방법을 몰라 도망을 가보는 푸른 아픔들이 책장에 가득했다. 그리고 조용하게 자신들의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키친>은 적당히 사람을 우울하게 또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죽은 자를 가슴에 담고 견디어내는 산 자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들을 위해 녹차를 한 잔 엷게 우려 마신다. 조금은 떫은맛이 오래 오래 입안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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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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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직도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았어요.' 대학 시절 우연히 도서관 앞에서 길을 묻다가 만난 남학생이 있었다. 소설책을 여러 권 쌓아서 들고 있었는데, 모두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이 사람 소설을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물었는데... 대답 대신에 하루키 칭찬으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낯선 남자가 보여주는 한 작가에 대한 집착(?)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그 때 나도 이외수란 작가에 빠져서 술자리만 생기면 친한 선배나 후배를 붙잡고 한참을 그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으니까... 술에 취한 나랑 닮았다 생각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 그의 글을 처음 접하면서 느낀 것은... 그랬다. 인간에 대한 너무도 강인한 집착과 사랑이었다. 인간이 지닌 삶에 대한 고민과 갈등... 그런 것을 글로 풀려니 작가 자신이 많이 힘들겠다고 느꼈다. 그 후로 그의 책을 몇 권 더 찾아 읽었다. 삶에 대한 성찰과 다채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참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작가라 느끼면서도 여전히 소설가 하루키는 참 힘들겠다 생각했다. 그가 지닌 상상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 그의 글을 끌고 가고 힘이었고, 그 덕에 책을 놓아서는 안될 것 같은 그런 신비로운 안타까움이 항상 그의 글에는 녹아 있었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책을 읽고 오랜만에 만난 그의 글이었다. 솔직히 새롭다거나 정말 멋지다라는 수식 대신에 '하루키 소설이구나' 생각했다. 이전의 글보다 더하다 못하다라는 평가보다 상처가 많은 어린 소년을 달래려고 많이 고민했구나 여겼다. 사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나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주인공이 가진 상처의 크기가 나에겐 더 중요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다무라 카프카 그 아이가 지닌 속 깊은 상처를 따라가면서 난 이 소설을 읽었다. 태어나서 버림을 받아야했던 아이,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다무가 카프카에겐 너무도 큰 생채기가 아니었을까. 그 생채기가 아물어 딱지가 생기고 상처의 흔적마저 흐려지기 위해서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러면서 소년은 저주하던 자신의 운명을 용서란 이름으로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꽤 긴 여행. 사막 같이 지쳐 돌아와 물 한 컵으로 목을 축이고 소년은 또 다른 여행을 떠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난 목마름의 욕망을 좋아한다. 시원한 물 한잔이면 끝이 나는데, 물로 목을 축이기 전까진 너무도 고통스럽게 견뎌내야 하니... 덕분에 물을 삼키면서 느끼는 행복은 작지만 참 소중하고 오래 기억된다.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시련과 상처가 그렇게 물 한잔에 채워지는 목마름 같았으면 좋겠다 여긴 적도 있었다.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문득 거울에 비친 날 보았다. 나도 가끔은 사막을 닮았었는가? 물 한잔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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