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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변변한 유치원도 없는 궁벽한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산과 들판을 가로지르며 나뒹굴던 때의 추억은 아동기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초등학교 입학
연령인 여덟 살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슴팍에 가제손수건을 달고 십 리를 걸어 면소재지에 위치한 학교에 들어갔다.
한 반에서
생활할 55여 명의 친구들은 문자를 익히지 못한
채 학교에 온 친구들을 도와 함께 글자를 공부하며 소통의 기쁨을 누렸다.
처음 받은
교과서로 공부하며 신기한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은 또 다른 세상을 동경하는 상상의 세계로 이끌었고,
선생님이 건네
준 간행본을 소리 내어 읽으며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들었다.
교과서 외의
책들이 있어 앎의 영역을 확장하여 잠재적인 역량을 발휘하며 살 수 있는 길을 얼 수도 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책은 공부하며 사는 삶의 방편으로
자리하였다.
1980년
이른 봄 학교에 입학한 후로 줄곧 학교를 오가며 이제는 자신만을 위한 공부에서 벗어나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동반 성장하는 길을 모색하는 교사로
생활한 지 26년째에
접어들었다.
돌이켜보면
회한으로 얼룩진 날들이 많았지만 독서로 생각의 깊이를 더하면서 자기 성장을 도모하는 생활을 잇는 제자들을 보면서 희망을 읽는 날이
늘어났다.
삶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읽기로 지평을 넓혀가는 공부의 본질에 가까운 독서는 내실 있는 인생의 고갱이로 자리하여 예기치 않은 문제들에 직면할
때마다 크고 작은 지혜를 주었다.
서자로
태어났지만 읽는 이가 주인인 물건으로 대변되는 책이 있어 신분의 벽을 넘어서는 혜안으로 닫힌 문을 열 수 있었다.
세월 속에 묻혀 빛을 볼 수도
없는 글들을 찾아 나서는 길에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저자는 2012년 7월부터 1년간,
하버드대학교
옌칭 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선본실의 서고에 있는 희귀한 책들을 많이 접하였다.
진리를
궁구하며 지행합일을 덕목으로 삼은 학자들이 걸었던 길을 재조명하는 후대 학자는 그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들의 궤적에 깃든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놓쳐서는 안 될 가치를 넌지시 일깨운다.
오랜 책들이
뿜어내는 퀴퀴한 냄새 가득한 서고에서 옛사람들의 책읽기와 메모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책에 찍혀 있는 장서인,
책을 좀 먹는
책벌레,
책벌레를 막는
나뭇잎 책갈피,
책 내용과
관련한 메모 등에 얽힌 사연들이 융해되어 흐른다.
십대의 아이들과 마주하고
수업하는 시간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물으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낸다.
내신 성적
관리와 수능시험 대비,
비교과
활동까지 챙겨야 하는 고등학생들의 답은 상위 등급을 받아야 유리한 위치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기에는 씁쓸한
면이 있다.
숲을 보지
못한 채 나무에만 국한해 미래를 보는 근시안적인 태도에 변화를 요구해보지만 쉽지는 않아 틈을 내어 책벌레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는 어려서부터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을 정도로 책 읽기에 몰두하였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기까지 그는 가난과 결핍으로 점철된 생활 속에서도 형편이 넉넉했던 이서구의 책들을 빌려 읽고 베껴서 보관하여 사유하는 가운데
내용을 음미하였다.
그는 책을
낭독하며 소리로 기운을 돋웠고,
책을 읽으면
내용을 뽑아 적는 초서,
책을 교정하는
교서,
책을 평하는
평서,
책을 저술하는
저서,
책을 빌리는
차서,
책을 햇볕에
쪼여 말리는 포서로 갈무리하는 9가지 활동을
구서재(九書齋)에 담았다.
경계를 분명히 짓고 자기 한계를
규정한 채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앗아가는 자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세 끼 밥을 먹듯이 독서 활동도 자유로울 때 살아있는 유기체로
질적인 성장에 공명할 수 있다.
기억의
한계로부터 생각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용하는 메모는 공부할 때에도 학습 내용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관리하는데 위력을
발휘한다.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거나 책 속의 내용이 유발하는 궁금증을 적는 경우,
발췌한 내용을
초서한 메모를 계통 있게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폭넓은
독서력과 꼼꼼한 메모 습관이 빚어낸 이덕무의 ‘앙엽기’는 가난한 시절 항아리에 든 잎사귀를
꺼내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였다가 저술하였던 생활 속의 기록이 창작물로 승화되었다.
박지원은
이덕무의 앙엽기를 적절히 변형하여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인 열하일기의 현장감은 보이면 적고
떠오르면 썼던 즉석 메모를 잊기 전에 옮겨 적음으로써 가능했다.
책을 읽다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여 두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학술적 사유로 갈무리하여 온 다산 정약용은 밥 먹듯 메모하고 숨 쉬듯 기록하여 강진의 제자들에게
맞춤형 가르침을 전하였다.
사소한 관찰과
메모로 시작된 기록이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18년 동안 다량의 저술로 인문학적
고찰을 염두에 둔 다산의 사유는 어떻게 공부하며 현재적 삶에 충실한 인간으로 자리할지 반문케 한다.
번갯불처럼
달려드는 깨달음-묘계-이 가뭇없이 사라지기 전 잽싸게
메모하여 질서를 잡아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생각에 다수가 공감할 때 망량을 막을 수가 있다는 말에 숙연해진다.
지금껏 아이들
앞에서 남의 소리를 그대로 전하며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가공하여 온 것은 아닌지 회의하며 눈의 피로가 더하기 전 본질을 궁구하는 책 읽기로
앎의 지평을 열어 활달한 자유인으로 걸림 없이 나아가고 싶은 바람에 열기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