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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평점 :
어둠이 내려와 산 그림자를 집어삼키고 잰 걸음으로 집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저녁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허기진 배를 문지르며 조금만 기다리라는 주문을 걸었던 결핍의 청소년기가 떠오른다. 식구들이 두레밥상에 둘러앉아 밥숟가락에 집중하며 보리밥을 먹느라 손을 재게 움직일 때 이른 저녁을 물린 친구들은 그들만의 노래로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놀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한여름의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미소 짓게 한다. 낮 동안 세상을 환히 비추던 태양은 빛을 잃고 암흑 세상으로 바뀌면 부끄러움이 많아 서로 내외하며 거리를 두었던 동네 친구들은 골방에 모여 감자 삶은 그릇을 끼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우리들만의 향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이더라도 늘 화합하며 조화로운 결혼 생활을 잇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상대에 대한 기대를 낮추지 않는 가운데 바벨탑을 쌓으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남녀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우연이 필연을 낳아 숙명처럼 결혼하고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이들 중에는 상대의 배신으로 약속을 파기하고 새롭게 출발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회의에 젖을 때가 있다. 결혼 생활 동안 배우자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가운데 또 다른 배신의 조짐은 가까이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감지하며 감각조차 묻어두고 지내야 할 때가 있다. 아델이 재혼한 필립이 혜성을 찾아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은 어쩌면 결혼에 따른 관성의 법칙을 파기하고 싶은 욕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배신을 잉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 위에 서서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의 우연한 만남이 연애로 이어져 한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테디는 스무 살 연상의 소설가와 연애하였지만 상대가 등을 돌림으로써 연애는 끝이 났고 영화 제작자로 자리를 틀어 수영 코치 켁을 조연으로 발탁한 뒤 그와의 사랑을 시도하지만 피상적인 관계로 끝이 나버릴 사랑처럼 비춰진다.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욕정에 끌려 애착하다 스러져가는 치명적 사랑은 허탈하면서도 장렬한 최후를 배태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여 더 이상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숙명적인 끈으로 묶여 한 공간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사랑의 결정체로 흔적으로 남은 자식을 낳아 기르며 불화할 때도 있지만 하나의 시선으로 최고의 선을 지향하는 삶을 꿈꾸며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일상을 보내려 한다. '나의 주인, 당신'에서는 함께 생활하는 남편을 주인으로 여기며 살기보다는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이를 향한 그리움에 달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라 치부하는 게 두려운 여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다른 것들을 욕망해 왔다. 시적 영감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시인 브레넌의 모습에 끌려 금단의 영역인 그의 집을 찾아나서는 아내의 행동을 진솔함을 위선으로 덮고 살았던 이들이 부도덕하다고 질타하기에는 불편함이 따른다. 허상에 지나지 않는 껍데기를 벗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 한 마리 개는 워렌을 주시하며 앉아 있다. 남편에게 자신을 그만 놓아 달라고 간청하지만 쉽사리 그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는 남편의 단호한 태도는 그녀의 마음까지 짓누르고 말았다. 시간이라는 연속선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 없겠지만 워렌은 가슴 속 주인을 떨쳐버릴 수 없어 그의 행방을 찾아 상상하며 또 다른 욕망을 꿈꾸며 스스로를 위로할는지도 모른다.
거칠면서도 매력적이고, 세련되면서도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도시 뉴욕은 자본과 열정이 가득한 꿈의 도시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정유회사에 투자하였다 큰돈을 손에 넣은 제인은 암 4기로 죽음을 향해 다가서는 불운이 닥쳤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편안한 삶을 잇는 것처럼 보이지만 악재는 주위를 뒤덮고 마는 어둠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다가와 심각한 양상을 낳을 때가 있다. 그녀는 남편사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 배란일을 맞추기도 하지만 버닝은 다음에 가지면 될 것이라 말하며 시간을 유예하지만 그녀에게 다음은 보장되지 않은 미래일 뿐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돈이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가려고 하지만 현실은 마음처럼 이뤄지지 않는 것도 많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배우자를 절망으로 몰고 가는 장본인으로 남는 '뉴욕의 밤'을 자처한다. 취향이 다른 이와 결혼하여 상충하면서 결혼 생활이 고행이라며 결혼할 때 취향이 동일한 이를 찾아야 한다며 성격까지도 꼭 고려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 이들이 늘어난다.
20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돌아보면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의 모습으로 고치고 다듬어 살겠다는 다짐은 애초에 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 판단될 때가 있다.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일 중 하나가 배우자 외의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일진대 데스와의 관계를 그만 두라고 애원하는 아내의 간절한 바람을 도외시하였다. 상대를 기만하고 불륜 행각을 벌이는 배우자에게 '포기'하라고 종용했지만 욕정에 눈이 먼 상대를 고치는 일보다는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을 따라와서 겉도는 삶을 살았던 지난 시간을 청산하는 게 빨랐다. 찰랑거리는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귀고리'는 여성의 매력을 발산커할 때가 있다. 사랑의 신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 중 귀고리는 몸에 밀착되어 함께 하고 싶은 바람을 담아 상대에게 선물하며 사랑의 증표로 남기고 싶은 소망의 신물로 기능할 때가 있다. 재혼한 부인에게 선물한 귀고리를 잠깐 빌리려 했던 일이 파티에까지 귀고리를 착용한 채로 참석한 정부는 나이 든 장인과 비교적 젊은 사위가 팸을 함께 탐하였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났을 때 받은 상처는 컸지만 여전히 팸은 또 다른 남성을 만나 욕정을 풀어내느라 어젯밤에 있었던 당혹스러움은 망각의 강으로 흘려 보내버린 듯하였다.
생기발랄한데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주변을 밝게 했던 스물다섯의 노린은 아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시절을 보내던 시간이 지속될 것이라 믿었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이별을 통보받고 실연의 아픔에 휩싸였다. 지난밤의 추억은 가슴속에 쟁여두고 본연의 일에 충실한 아서의 마음을 돌이키고 싶은 욕심에 그녀는 그를 찾았지만 기억 속 그녀와 멀어진 모습에 환멸감만 더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약혼했어.’
한때는 인생을 가득 채웠던 사랑의 대상을 따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아서의 씁쓸함을 담은 ‘플라자 호텔’은 이기적인 사랑의 일면을 보여준다.
병에 걸려 고통 속에 하루하루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가는 아내 마리트의 자살을 돕기 위해 남편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지난 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와인을 마시고 그 맛을 음미하며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 하지만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는 일이 힘들어 보였다. 동행한 스물아홉의 수잔나는 사위어가는 자신에 비해 생기 있는 그녀를 대면하고 있다는 게 자살을 결심한 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워 보인다. 의도했던 대로 차가운 주삿바늘 속 약을 아내에게 투여하는 남편을 향해 자신을 사랑했냐고 묻는 아내의 질문은 같은 공간에서 한 방향을 보고 살았던 부부의 어긋난 마음속을 가늠케 한다. 아내의 자살을 도운 남편은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치유 받으려는 듯 수잔나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깨어났을 때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아내와 마주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비몽사몽간에 그녀의 생존을 목도한 수잔나는 줄행랑을 쳤고 둘 사이의 관계는 종식되고 말았다.
일상적 관습과 규칙에 얽매어 눈치를 보며 지냈던 이들에게 밤은 비교적 자유롭게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충동과 세상의 금기에 맞서는 동기를 부여하는 감각적 시간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 사방을 붉은 산호 빛으로 물들이며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노을처럼 남녀의 사랑도 생명을 다하면 어느 새 사그라지고 마는 것일까? <<어젯밤>>이라는 제목 아래 연결된 9편의 단편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담고 있지만 단란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남녀 사이의 엇갈린 시간 속 또 다른 욕망을 꿈꾸며 지내는 이들의 미묘한 심리를 감각적으로 육화하였다. 사랑이란 가슴이 시키는 일이라 이성적으로 제어하기 힘든 감정 놀이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 아래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퇴색되어 본연의 가치를 망각한 채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을 찾는 이기적인 속성을 드러낼 때가 많다. 사랑하는 마음을 결혼이라는 관습으로 묶어 와해되기 쉬운 마음을 지탱해주지만 어느 순간 그 마음은 부는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넘나듦이 있어 때로는 맹목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인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