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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예상치 못한 일이 불러오는 파장은 자못 커서 어떻게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아 한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40대 중반의 남자가 있다. 열일곱 살에 만난 열여섯 살 소녀를 잊지 못한 채 소녀를 찾으러 나선다. 예민한 촉수로 감각이 살아날 때, 이성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빙산이 녹아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이름 모를 생물을 길러내는 것처럼 근원적 사랑을 낳는다. 찰나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지는 않았지만, 이별의 시간도 예비하지 않은 채 헤어진 만남에는 아쉬움이 밀려 든다.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알아차린다.
나를 사랑한다고 여기던 소녀가 던진,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나는 가짜’
라는 한마디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모호할 때를 직면할 때마다 떠오른다.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시간적 서사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영역에 대한 경계는 모호해진다. 장자의 꿈에 나비가 나였는지, 내가 나비였는지 경계가 확연치 않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소설 속 인물들은 책을 모티프로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라고 말하던 소녀는 소년을 떠났고, 고열에 시달리며 곤란을 겪던 나는 소녀와의 만남을 갈구하였다. 간절함이 소녀에게 전해졌는지 벽을 관통하여 소녀가 생활하는 도시로 갈 수 있었다. 죽음이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가르는 것처럼 높디높은 요새 같은 벽을 통과한 순간, 벽 바깥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아 스스로 감당하며 지내야 할 몫은 숙명처럼 자리한다. 시간의 축적은 무효하므로 공간의 광장에 서 있는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다. 이 도시에 순응해 사는 이들은 현재만의 시간을 살고 있을 뿐이다.
둘이 상상 속에 만들어 낸 비밀의 도시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 도시 생활자는 자신의 그림자는 벽 바깥에 두고 지내야 하고, 벽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림자를 지녀야 한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도시로 들어간 나는 애타게 그리던 소녀와 재회하지만 그녀는 소년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소녀는 열여섯 살에 머물러 있어 십 수 년이 흘러 만난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새 나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소녀는 오래 된 꿈을 읽는 이의 두 눈에 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약초로 달인 특별한 차를 내놓는다. 열여섯 살에 머물러 있는 소녀는 숙명처럼 추운 겨울에는 책 한 권 없는 도서관 난로에 불을 지피고 약초 차를 내놓는다.
도서관 문을 닫고 집으로 가는 소녀와 함께 나는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강물을 보며 걷는다. 날이 밝으면 나는 무심한 채로 현실에 순응하며 소녀가 건네는 약초차를 마시며 오래된 꿈을 읽는 시간들에 회의가 들었는지 그림자 수명이 다하기 전 이 도시를 벗어나려 한다. 문지기의 감시를 피해 철옹성 같은 벽을 넘어 헤어나기 힘들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도시를 벗어날 생각조차 않는 사람과는 달리 용기 있게 도시의 벽을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나는 사십대 중반에 축적된 마음과 기억을 유지한 채, 몸만 십대의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모습 그대로인 채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관념의 실이 소녀의 몸과 마음을 촘촘히 엮어 하나로 이어지기를 갈망하며 소녀와 하나로 이어지지 않은 현실을 직시한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2부 마지막에 나오는 한마디는 불확실성이 대두되는 도시에서 자신의 정체를 잃지 않고 생존하려는 이의 분투가 담겨 있는 듯하다. 도서관에 있는 나는 진짜인 나의 대역에 지나지 않은 가짜는 아닌지 의문을 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독해져 본질을 찾아 나서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도시의 웅덩이에는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 두었지만, 본체가 내는 진정한 소리에 용기 있게 귀 기울이는 이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무언가가 무언가와 이어져 있다.’
문장처럼 출판 유통 회사에서 일하며 책과 함께한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은 듯하다. 나는 변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고야스 관장이 물러난 자리를 이어 도서관장직을 수행한다. 산책하다 유명을 달리한 고야스 관장의 유지대로 작을 마을 도서관에서 책 속에 의미를 발견하고 또 다른 꿈을 꾸며 인생의 이정표를 찾는 여정은 도서관에서 시작될 수 있다. 문명 세계와는 동떨어진 공간일수록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늘려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가 있다.
나는 마을 도서관 지하 정사각형의 방에서 그림자가 없는 고야스 유령(?)과 만나 도서관 운영에서부터 주변 동정을 나누며 비밀을 공유한다. 불의의 사고로 다섯 살에 세상을 뜬 아들,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부인의 극단적인 선택 등 일가족이 주검으로 함께 누워 있는 묘소를 찾을 때 뒤따르는 자가 있었다. 생전에 고야스 씨와 소통하며 교류하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다. 소년은 고등학교 진학 대신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방대한 지식을 암기한다. 말없이 도서관에서 책만 읽던 아이가 도시 이야기를 듣고 세밀한 지도를 그려 나에게 건넸다.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형상이 소녀에게서 정밀한 사진 기억력을 가진 소년에게로 이어졌다.
이렇다 할 흔적도 없이 엘로 서브마린 소년이 증발되었다. 가족은 소년의 종적을 찾아 헤맸지만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시일이 지날수록 의구심만 늘어날 뿐 소년을 찾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심증대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허물을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숲속에 숨겨놓고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이로 존재하고 싶은 바람을 좇아 문지기 눈을 피해 도시로 잠입하였다. 소년은 나의 오른쪽 귓불을 깨물어 도시의 불확실한 벽으로 40대 중반의 아저씨를 유인한 셈이다. 꿈속의 선명한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지는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불가항력적인 의식은 벽을 통과해 도시의 도서관에서 꿈을 읽으며 지내는 자신과 맞닥뜨렸다.
오래된 꿈을 읽기 위하여 나와 하나가 되고 싶은 소년은 나의 침대 곁에서 그의 바람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저는 원래 당신이고, 당신은 원래 저니까요.’
라는 소년의 말에 당황해 하는 나에게 우리의 시원은 하나였음을 역설하였다.
소년은 마을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고 지냈지만 현실에서는 꿈 읽는 이가 되는 방법을 찾을 길 없어 헤매다 고야스 씨의 무덤에서 말하던 나를 만나 방법을 찾아 나선 듯하다. 소년은 나와 하나가 되어 이 도시의 도서관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꿈 읽는 이의 직무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통념과 세간의 잣대로 눌러 놓은 의식을 껍질 밖으로 끌어내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로이 펼치도록 유도한다. 나는 도서관을 닫고 나오는 소녀를 별다른 말없이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서 기쁨을 찾았다. 사람들과 교유하며 시는 시간이 강퍅할수록 사회적 적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시간이 나아가지 않는 세계에서 자신의 마음이 내는 소리를 관조하며 현재에 충실한 시간은 잊고 지낸 자신과 조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본질을 숨긴 채 가면을 쓰고 생존하느라 버거운 현실을 벗어난 공간에서 지난한 시간을 성찰하며 잊고 지낸 오랜 꿈을 꺼내 흔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