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황금종이 1~2 세트 - 전2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3년 11월
평점 :
돈이면 최고라는 생각이 많아지는 십대들과 생활하면서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장래에 사회 속 한 구성원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열에 아홉은 돈 많이 벌어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한다. 욕망대로 살아가는 데 돈이 전제되어야 함을 극명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지금도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 중 하나가 돈을 많이 모아 건물 하나 사서 월세 받으며 살고 싶은 바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종이>>라는 제목에서부터 구린 돈 냄새는 진동하여 인상을 쓰게 하더니 옴니버스 형식으로 쓰인 소설은 읽을수록 점입가경이다. 청렴 개결함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인권 변호사에게 의뢰하는 송사는 돈을 매개로 하는 구린내 짙은 일들이 대부분이다. 돈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자매도 무용해지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의 만화경을 보는 듯하다. 부모 생전에 재산을 오롯이 물려받은 자식들이 약속한 생활비를 부모에게 주지 않아 거리로 내몰린 노인들의 딱한 사정이 언론에 보도되는 현실에서 돈의 무소불위의 괴력을 행사한다. 돈의 노예로 전락한 이들은 아버지가 어머니 몫으로 남긴 유산마저 빼앗으려 소송을 걸고,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금고를 습격한 형제들의 모습은 아버지 죽음을 애도하는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렸다.
평생 철물을 두들겨 모은 아버지가 마련한 건물을 날릴 위기에 몰린 아들은 임대료를 4배나 올려 받으려 작정하고 세입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정성을 다하여 식당을 운영해 단골이 많은 부부는 건물을 옮겨 식당업을 새롭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식당 사장은 건물주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이 벌어졌다. 돈 되는 일에 매달리는 변호사와는 달리 서민 편에서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적극적인 이태하 변호사는 금력과는 거리를 두고 신념에 부합하는 일에 도움을 전한다. 불의와 타협하여 안일한 생활에 젖지 않으려 의식을 무장하고 사는 이들은 돈의 노예로 돈에 지배당하는 삶을 배척한다.
수임료와는 상관없이 정의롭고 청렴한 행보로 약자를 변호하는 이태하에게 돈과 관련된 송사는 끊이지 않는다. 카지노에 미쳐 전 재산을 다 날리고 건물까지 날려먹은 아들은 어머니의 생명까지 빼앗았다. 도박과 가상 화폐 투자에 빠져버린 두 남자는 죽음을 결행하며 폭주하고, 사색이 짙어져 가면서도 돈 욕심과 살 욕심을 부리는 큰고모 등을 통해 돈에 혈안이 된 이들의 처연함을 떠올린다.
“나도 돈 좋아해. 다만 노예로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라는 변호사의 한마디는 휘둘리지 않을 신념대로 사는 용기 있는 자의 자기 관리이다.
이 소설에서는 인권 변호사와 결을 같이 하는 인물이 나와 긍정적인 의미를 두텁게 한다. 부정을 축출하고 정의로운 시대를 여는 민주화 운동을 지도력 있게 폈던 한지섭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와 과학 영농가로 활동 중이다. 끝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영농가로 애플망고를 수확한 날, 변호사 부부를 초대하여 첫물을 선보이고 싶은 바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중략)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중략)’
마치 바라는 손님이 와서 알알이 박힌 포도를 따 먹을 때의 기분 좋음은 농사 짓기 까다로운 애플망고를 수확하는 데 든 수고와 상쇄되는 것처럼 전해진다.
생활에 불편함을 초래할 정도로 돈을 지니지 못하면 돈은 인간의 존엄마저 박탈해 버린다. 유산 상속이 걱정돼 홀로된 아버지의 만혼을 저지하려는 자식, 수천 억 거부의 후손에게 마음을 줬다 죽음으로 내몰린 딸,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노인을 돌보는 20대 여성의 생활은 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물욕에 눈이 멀어 정체성을 잃고 돈을 탐하다 생명까지 않게 된 사례는 지금도 흔하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가져서는 안 될 돈을 탐하다 보면 돈에 종속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에 갇히고 만다. 범법 행위임을 알면서도 미성년자에게 담배 심부름에 기생해 사는 노인의 이야기는 길어진 노년에 경제 활동이 전무한 노인들의 실존의 적신호를 드러내는 듯해 마음이 무거워진다.
옹색한 살림에 돈이 없어서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시절에도 갖지 말아야 할 것은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존엄성을 잃지 않을 용기로, 돈에 종속된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하여 써야 할 데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고, 아껴야 할 때에는 아끼는 삶을 살아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