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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 참 추억의 이름이다.

추억은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제 할아버지께서 이 분의 창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유성기(축음기)가 있었다.

 

태엽이 감긴 유성기에 엘피판을 얹고, 그 위에 소리통의 머리통을 얹으면 판에 찍힌 실 같은 줄을 따라 신기하게도 노래가 들리는 것이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그냥 육성으로 하는 소리보다 더 감칠맛이 있었고 아름다웠다.

 

임방울씨가 부른 쑥대머리를 그 때 들었다.

그 노랫말은 생각이 나지 많지만, ‘쑥대머리로 시작되는 노래이니 지금도 쑥대머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 들은 깊은 소리를 들으려고 언젠가 임방울씨가 불렀던 시디를 구해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임방울씨는 소리의 대가라고 할만하다. 오재익과 공창식씨로부터 서편제를 배우고, 유성준에게서 동편제를 배워서 그들의 장점들을 녹여서 더 나은 노래로 진화시켰으니, 그 실력이 그렇게 뛰어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이 책은 어차피 픽션이기에 사실과 다르게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흠모하고 연구한 저자가 나름의 자료를 정리하고, 그가 살았던 향토에서 발굴한 사료들을 통하여 확인된 내용도 포함했을 것이므로 거의 사실과 진실에 가까운 기록일 것으로 생각된다.

 

임방울씨의 아버지는 그를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기를 원했지만, 역마살을 끼고 태어난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는 팔자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굿쟁이요, 그의 외삼촌 김창환은 당대를 풍미한 소리꾼이었다.

 

그를 가졌을 때, 그의 어머니는 달을 품는 태몽을 꾸었다.

그는 전국명창대회에서 일들을 하고, 일본 콜롬비아 음반회사에서 음반을 내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또 자기 이름을 걸고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을 위무하는 공연도 했다.

 

저자는 아홉 살 때, 진달래꽃이 피던 봄 날, 고향 마을에 살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꽃다운 아내와 사별한 다음 아내의 무덤 주변을 진달래꽃을 심으며, 구슬픈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임방울 국창이 부른 앞산도 첩첨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혼은 어디로 행하는가로 시작된 단가 였다. 그 뒤 저자는 열 한 살 되던 해 목수가 상량식을 하던 날 부르던 쑥대머리를 접하고 그 노래가 좋아서 목수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 뒤 신춘문예에 당선된 다음에는 그 상금으로 전축을 사고 임명창의 음반들을 사서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휴대용 녹음기로 녹음을 해서 출퇴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듣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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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소설이다. 내게는 그렇다.

소설은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를 갖는 하나의 스토리라고 단순하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소설은 참 괴이하기도 하고 이질감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색조로 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다수는 모두 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책 제목부터 암울한 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눈먼 올빼미], 올빼미는 낮보다는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조류이다.

이 올빼미가 눈까지 멀었다니, 그 형편이 암울 자체이며, 절망적으로 유추된다.

이 작가는 이란 최고의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사후이긴 하지만 20세기 아랍을 움직인 50인에 선정되었다니, 그의 역량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가 태어난 이란에서 현재까지 출판이 금지된 상태란다.

이 책의 주인공은 그 출생과정과 그 부모도 확실치 않고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자기 부친이 진짜 아버지인지 숙부인지도 불확실하다. 자신은 유모에게서 양육을 받고 자란다. 그 어머니는 그를 고모에게 위탁하였고,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리고 아내도 자신과 함께 고모를 어머니로 삼고 자랐다.

그러나, 결혼을 했지만, 이름만 부부였고 실제는 부부로 살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섹스 불능자거나 동성애적인 삶을 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고, 결국 이런 아픔과 상처 속에서 스스로 병이 깊어서 죽게 된다.

이 소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태롭게 위치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른 세 살에 처음 인도에서 이 소설을 출간했다한다.

그러나, 이렇게 젊은 나이에 쓴 소설에서 저자는 염세주의적인 내세관을 피력해 놓은 것에서 그의 생애가 순탄치 못할 것임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란 작가의 소설을 처음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글을 낯설기만 하다.

무엇이라고 딱 잡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읽어 온 소설들하고는 글의 분위기나 서술 방법이 분명 특이한 것이다.

이 책이 시작할 때 저자의 직업은 필통 뚜껑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묘산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직업에 대하여는 지속하지 않고 만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의 이야기가 계속성이나 일관성 면에서는 약간의 혼란을 준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방을 무덤으로 인식하고 살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고립된 삶을 잘 상징적으로 묘사했다고 보여 진다. 오로지 그의 방 환기구를 통해 바깥세상을 암호처럼 해독하며 살아감을 알 수 있는데 작가는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살았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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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아카데미 시상식 최초로 흑인 감독이 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동명의 ‘노예 12년’이다.

그리고, 그 감독 이름은 스티브맥퀸 감독이다.

이 책 내용은 실제로 12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솔로몬 노섭’이라는 사람의 자전실화소설이다. 이 주인공이 아버지 쪽 조상은 로드아일랜드의 노예였다. 그 분들은 노섭 가문의 소유였으며, 그 가문의 주인이 임종을 하면서 유언으로 그 아버지는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노섭은 1808년 7월에 태어났고, 1829년 크리스마스에 흑인인 앤 햄프턴과 결혼하여, 세 아이를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주인공은 노동을 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그 연주 실력이 주위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1841년 3월, 그 날-노예로 납치되던 날-도 일자리를 구하려고 길을 걷고 있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워싱턴에서 서커스단을 운영하는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좋은 조건과 두둑한 보수를 제안하며 당장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솔로몬 노섭은 자기 아내에게 알릴 필요도 없이 금방 연주하고 돌아오리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들을 따라 나선 후 워싱턴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갑작스럽게 납치가 되어 노예 수용소에 갇히게 된 후, 조지아에서 탈출한 노예로 취급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 다니면서 겪게되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목화와 사탕수수 경작 등 힘든 노동에 동원되는 참상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많은 내용을 이루고 있다.

1853년에 노예 생활에서 풀려 알 때까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200년도 지난 지금 그와 비슷한 상황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최근의 소식에 시간의 역류를 실감한다.

신안군의 염전에서 행해지고 있는 노동착취의 이야기가 곧 현대판 노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역 주민들과 경찰 간부까지 연루되어 무고한 한 인간을 불법으로 강제 노역에 동원시키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부려 먹는 현실이 착잡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솔로몬 노섭’은 자유롭게 살다가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정신적 고통은 더 참혹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탈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도 한 때 노예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회심하여 회개한 기도가 찬송가사가 된 유명한 노래가 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을 용서해 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영생을 얻었네] 고백하면서 감사한 내용인데, 이 소설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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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달리다]로 시작한 건축가의 책.

건축가는 움직일 수 없는 지상의 구조물이나 건축물을 짓는 사람이어야 함으로 움직임의 대명사격인 ‘달리다’의 말이 잘 매칭이 되지 않는 언바란스나 파격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저자가 이 표현을 쓰는 것은 필시 무슨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예단하며 글을 읽는다. 저자가 강한 상징과 암시의 기호로 의도적으로 차용했으리라는 생각으로 내용으로 들어 간다.

첫 챕터의 소제목이 또한 ‘세계를 달린다’로 되어 있다.

이쯤에서는 서문에서 보던 ‘달리다’의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저자가 세계적인 건축가이니 일본을 넘어 전 세계적인 건축을 하는구나하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건축의 변화의 트랜드를 ‘이제 건축가는 상대(건축을 의뢰하는 크라이언트)를 내려다보며 일을 고르는 엘리트가 아니라 매번 레이스에 나서야 하는 경주마’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변하게 된 계기를 1997년 스페인의 빌바오라는 지방 도시에 프랭크 게리라는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빌바오구겐하임미술관이 지어진 것에서 비롯했다고 기술한다.

이런 건축계의 변화의 흐름에는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의 경제세계화라는 상황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이제는 설계의뢰를 수주 받는 입장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건축공모전 즉 ‘설계경기’에 적극 참여해야 수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가에게는 시간도 예산도 여유로운 상태에서 느긋하게 임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형실은 경주마처럼 쉬지 않고 뛰어 다녀야 살 수 있다는 현실진단이다.

그냥 앉아만 있으면 자신도 사무실도 무너지기 때문에 계속 세계를 무대를 종횡무진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다녔던 나라들과 관계자들의 에피소드와 정서, 건설 현장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독한 술을 마시는 통과의례를 통해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상대의 이득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완곡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프랑스, 이태리, 영국을 똑 같은 유럽으로 통칭하지만 세 나라는 공모방식이 전혀 다르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미국의 건축계는 그 배후에는 유대인이 실세들이라는 발견도 싣고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랑의 경험을 한 민족들이라 국경을 넘어선 교역에 관심이 있는데, 이는 현재 세계적인 추세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오른 손을 다치는 큰 사고를 당하였고, 두 번이나 대수술을 받았는데, 일부러 물리치료를 게을리 하여 약간 불편한 상태로 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오른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온 몸으로 느끼고 자신을 전체로 대지에 놓아 봄으로써 더 깊게 건축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체험담이다.

저자는 대 재해 시스템으로서 ‘문명’의 중추를 담당한 것은 ‘건축’이라고 단언한다.

생명의 위기를 느꼈을 때, 안온하고 강한 보금자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앞으로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건축’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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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가노 현 아즈미노에 살면서 집필에만 전념하는 작가가 귀촌을 준비하거나 바라는 이들에게 쓴 불편한 충고의 글이다. 작가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귀촌의 현실에 대한 감상과 소망을 직설화법으로 통렬하게 짚어 내고 있다.

 

언론의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작년까지만 해도 꾸준히 귀농 인구가 증가했으나 금년부터는 약간 주춤한 추세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귀촌은 퇴직 후 노후를 여유롭게 보내거나, 아예 도시의 삶에 지쳐 있는 중년들에게 마지막 희망봉이며, 로망인지도 모른다.

 

시골을 전원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부른다.

시골이나 촌이라고 하는 어감에는 불편함이나 옹색함 같은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그러나, 같은 시골이라도 전원이라고 부르면, 그 곳에는 낭만이 있고, 여유가 흘러넘치고 있는 듯하다.

 

한 참 일할 나이에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하우스 재배를 한다거나, 유기농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귀농이라고 부르고, 정년을 하고 은퇴하여 낙향하여 시골에서 지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은 위의 두 부류, 즉 귀농과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에 해당하는 충고인 것이다. 우리는 시골하면, 우선 순박함이나 여유로움 정도가 떠오른다.

옛날 같으면, 시골하면 교통이나 생활적인 면에서의 낙후와 불편함이 느껴졌지만, 특히 산간 오지나 섬 지방을 빼고는 크게 교통이 불편한 곳은 많지 않은 형편이다.

 

또한 전기가 시골 첩첩 산중까지 다 들어간 지금은 생활적인 면에서도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는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귀농이나 전원생활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시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골의 삶은 수월하거나 여유로운 삶이 가능할까?

 

이 책은 이런 생각은 망상이고 환상이라고 단언한다.

시골도 도시와 똑 같이 사람이 사는 곳이므로, 도시에서 일어난 일들이 시골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수 있는데 어떤 면에서 시골의 형태가 더 악화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골은 도시 사람들의 생각처럼 인정이 있거나 순박한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골 사람들은 한 마을이 한 가족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개인적 프라이버시가 아예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골은 도시보다 더 시끄러운 소음이 더 발생하는 곳이라고 설명해 준다. 사기꾼이나 도둑도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평소 철저히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도시에서는 사소한 불편사항이 제도적이고 행정적으로 잘 수습이 되지만,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는 문제도 염두에 두어야 하며, 몸이 아프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연락과 처리 등이 도시처럼 수월치 않으므로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일본 농촌에 사는 일본 작가가 쓴 책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는 실정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실정과 흡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귀촌을 준비하고 있거나 노후를 전원생활을 보내려고 계획하시는 분들은 사전에 꼭 읽어야 할 참고 서적이라고 감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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