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여섯 개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좀비, 트랜스젠더, 강박적 모성애, 자아 분열, 사회적 계급, 삶과 죽음, 사랑과 연민, 노화, 성적 욕망, 그리고 연대 등 여러 소재를 데려와 판타지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초엽 작가는 추천사에서 "책장을 넘기며 연신 놀랐다. 와, 이게 어떻게 전부 한 작가가 쓴 이야기지?"라고 썼는데, 소설집의 두 작품만 읽고도 이 말에 수긍이 갔다. 장편 <체공녀 강주룡>을 떠올려봐도 이번 소설집은 확연히 다른 색깔인데, 심지어 실린 소설마다 소재, 주제, 형식적인 면까지 마치 여러 명의 작가가 협업한 옴니버스 소설집같은 다채로운 느낌이 든다.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서울을 빠져나와 연천으로 향하는 '나'. 그가 연천으로 향하는 이유는 생사 여부를 모르는 남편을 만나러 가기 위함인데, 그렇다고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을 사랑해서는 아니고, 다만 무엇을 해야 할지 달리 떠오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나'는 비감염자를 구해야 한다는, 감염자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등의 뚜렷한 목표가 없다.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갈 뿐이다. 아마 온 세상이 좀비 형상을 한 감염자 뿐이라고해도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살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우리가 삶을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는 것처럼.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갤러리 큐레이터인 한나와 호텔 메이드 클레어. 각각 갤러리와 호텔을 벗어나 군중에 섞여 있다면 그들의 직업, 나이, 학력 등을 알아볼 재간이 없다. 고작 호텔 직원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나, 비슷한 또래의 여성에게 갖는 클레어의 동경과 질투. 소설은 두 사람에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급에서 우위에 있고 싶은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한나와 클레어)
자본주의 흐름에 학교라고 예외일까. 어쩌면 지성의 전당은 옛말이고 학교야말로 사회적 계급을 가장 여실히 느끼게 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위 '루저'라고 매도되는 이들을 향한 애도조차 인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세네갈식 부고)
'나'가 두 개의 자아로 쪼개진 시점이 인상적이다. 가해자가 마들렌을 성추행 한 것에 분노하는 한편, 자신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즉 질투에 의한 분노를 느끼는 '나'. 가해자인 소설가를 미워하면서 한편으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할 만큼 잘못된 관습과 가부장제 프레임에 익숙해져 있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이중성, 그 이상을 깨닫는다.
(나, 나, 마들렌)
삶에 대한 누군가의 절박한 소망이 누군에게는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시장 경제 논리.
(마치 당신 같은 신)
<김수진의 경우>는 트랜스젠더 여성 김수진의 임신 및 출산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작가의 독특한 상상이 돋보인다.
ㅡ
실린 작품들이 모두 50쪽을 넘기지 않는 짧은 소설들이지만 그 안에서 다루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소설들은 독자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전에 이미 읽는 이의 마음을 슬쩍 건드려놓는다.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모른 척하고 싶은 각자의 마음 한 조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