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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과 신비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8
르네 샤르 지음, 심재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이 책은 르네 샤르의 1938년부터 1947년까지 쓴 시와 글들을 실었다. 이브 베르제의 1967년판 서문을 찬찬히 읽다보니 르네 샤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1907년에 태어나 1939년 서른두 살에 포병 부대에 소집되어 1940년 5월까지 알자스 지방에서 복무. 1941년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가들과 접촉한 후 1942년에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 본격 가담하여 '알렉상드르'라는 가명으로 활동. 1944년 팔 골절로 부당을 당하고 알제리의 알제로 전출되어 약 한 달 동안 연락장교로 활동. 이것이 책에 실린 글들이 쓰여진 시기에 시인의 주요 이력이다.
1939년 9월 3일의 시 <꾀꼬리>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시인의 심경을 그대로 나타낸다.
꾀꼬리가 여명의 수도에 들어왔다.
그 노래의 칼날이 우울한 침상을 가두었다.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난다.
/ '꾀꼬리' 전문
1938년에서 1944년에 쓰인 글들에는 유독 '현존'을 언급한 시구가 많다. 이외에도 여러 의미의 상징적 어휘들이 등장하는데 전반적으로 맥락을 살펴보면 '존재성'과 연관이 있다. 특히 에바드네를 비롯한 여성(소녀, 누이, 등)에게 상징성을 부여한 시구들이 눈에 띄는데, 여러 부분에서 표현된 바로는 사랑과 연민의 대상이자 기대고 싶은 의지처, 그리고 희망과 이상향을 상징하는 의미로 읽혀졌다.
'엄격한 분할'이라는 연작시(그냥 메모인듯도 하고)를 통해 시의의 내면과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중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명증성에 대해 서술한 41번이다.
'시인의 내면에는 두 개의 명증성이 있다. 첫 번째 명증성은 외적 현실이 가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 단번에 그 모든 의미를 드러낸다. 이 명증성이 깊이 파들어 가는 경우는 드물고, 그저 관여적일 뿐이다. 두 번째 명증성, 시들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명증성은 한 편의 시 속에 끼워 넣어져 있고, 시인에게 깃드는 강력하고 기이한 신들의 명령과 주석을 전한다. 이 명증성의 헤게모니는 빈사적賓辭的이다. 언표되는 순간, 엄청난 공간을 점유한다.'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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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본인은 <히프노스 단장>의 메모들이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자신이 갖는 효력에 신중하며, 자유를 예비해줌과 동시에 그 모든 걸 위해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휴머니즘의 저항의 기록이라고 밝힌다.
시인은 인간이 일생동안 겪어나가는 고난, 그로인해 생기는 상처와 고통이 전혀 무용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들이 결국 자신의 삶의 방향을 가리키고 그 끝에는 어떤 형태로든 과실果實로써 드러날 것이라면서.
그가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동지가 적군의 총에 처형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쓴 글. 작정만하면 구할 수 있었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을을 무사하게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그는 사격 신호를 내리지 않았다. 이때 가졌던 자괴감과 분노, 그리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이 짧은 글은 그의 고뇌가 온전히 전해진다. 이후에 쓴 글 또한 함께 저항하는 동지를 향한 애정, 평범한 이들의 경이로운 희생에 대한 존경 들이 담겨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오는 단상들. 행운이라고 여겼던 아름다운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그러한 시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고독. 그럼에도 지나간 과거의 회한에 머물지 말기를, 그는 자신에게도, 타자에게도 당부한다. 측량이 가능한 깊이의 절망은 극복 가능한 운명이니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미래는 희망과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그리하여 인간의 품격을 찾아가기를 그는 간절히 바람한다.
차라리 자신을 박살 내서 완전히 죽게 해 달라는 그의 울부짖음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의 망각이, 나는 역설적으로 모두의 삶을 향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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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때 절반 이상을 낭독했다(물론 혼자 있을 때). 대부분의 시가 그렇기는 하지만 눈으로 읽고 다시 소리내어 읽을 때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도가 유독 큰 글들이었다(반면 윤동주 시인의 글들은 낭독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의 시는 눈으로만 읽어야 담아진다).
실린 글들은 대부분 시인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긴박하게 시간을 쪼개어 썼을 글이다. 산문시, 메모 등 형식에 대한 구애없이 자유롭다. 그의 글에서는 뜨거운 열정과 분노, 희망에 대한 갈구, 생명과 삶, 그리고 자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헌신이 느껴지며, 심지어 때때로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토막글 같은 이 글들은 어떤 전쟁소설 이상으로 독자에게 감흥을 일으킨다. 예전에 시인 이육사, 김광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들을 읽을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이 떠올랐다. 절망의 끝에서 써내려간 열망의 글들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