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담덕 7 - 전쟁과 평화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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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은 북위와 후연의 참합피전투가 있었던 395년부터 시작한다.


중국 서북에 위치한 후연과 북위의 상황, 왜국의 내부 사정과 도래인들의 실상, 당시 실크로드 동쪽의 예술문화 등을 그리고 있다. 특히 소설에서 담덕이 건축하고자 했던 요동성 7중목탑이 눈에 들어왔는데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료를 찾아보니 기록과 그림으로는 남아 있는 듯하다. 당시의 왕이 광개토태왕인지는 모르겠다만.


이번에는 고구려의 내부 상황보다 중국 서북과 왜국 현황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고구려와 신라의 선린관계, 백제와 가야의 선린관계, 그리고 백제와 왜국의 정략결혼 등 국제 정세가 다채롭게 그려지고,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육지에서 섬나라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의 삶이었는데, 이 부분들을 밀도있게 다룬다.  


7권에서도 여지없이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진의 젊은 승려 도진, 장안 출신의 동진 승려 담시, 5년째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는 신라 왕실의 자제 실성, 백제 월출산 석굴에서 학문의 경지에 이른 왕인, 그의 친구이나 세속적 욕망이 앞서는 사두.  


그리고 드디어 해평의 재등장.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 역모가 실패해 왜국으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고구려 출신들을 규합해 고마성 성주가 된 해평이 과연 복수와 야심을 이루기 위해 과거의 적이었던 백제군에 합류할지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까싶다.  


ㅡ 


사두가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는 목적은 나라를 위해 크게 쓰기 위함이다. 반면 왕인은 학문으로 사람을 구하고자 하고, 그가 생각하는 사람은 나라나 종족의 경계가 없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소우주의 이상향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이런 그가 대륙의 꿈을 꾸는 오진과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담덕이 굳이 태백산 적송을 가져다가 요동성 산 중턱에 7중목탑을 세우려는 뜻은 개국한 조선이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으니 민족이 하나로 일어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성산인 태백산의 적송에 영험함을 부여해 민족의 긍지를 보여준다는 목적을 가진다. 요즘, 너무 어수선하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흉악범죄가 보도되는 일이 있었던가? 거기에 폭우, 폭염, 태풍 등 자연재해가 인재로 변질돼 이게 무슨 일인가싶다. 이럴 때 혜안을 내보겠다는 노력이라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누가?  


초부거사는 왕인에게 왜국왕을 설득하라고 부탁한다. 섬나라를 대동세상으로 만들자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여 응신의 대륙에 대한 욕망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러나 이를 어쩝니까. 그 야욕은 21세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초부거사가 말하는 학문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단지 안다는 것을 넘어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앎은 허접한 쓰레기일 뿐이며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도록, 그 앎을 실천에 옮겨야만 참다운 지혜가 되는 것이다. 원론적이고 식상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누가 이런 말들을 진정성 있게 해주면 좋겠다. 



8권에는 새롭게 등장한 숙신족 정벌과 왜구 및 가야와의 전투가 예상된다.
그런데 모르면 모를까 한 번을 이기지 못할 싸움에 전전긍긍하는 아신왕이 안타깝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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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후쿠나가 다케히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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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ㅡ가와바타 야스나리(젊은 작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아베 코보 등ㅡ의 작품을 읽다보면 비슷한 선상에 있는 감정선들이 목격된다. 1954년에 쓰여진 이 소설 역시 패전 이후 피폐해진 젊은이들의 고독,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집요한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은 네 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고, 1인칭 시점으로 화자인 시인 '나'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각 장마다 시오미의 죽음, 그가 남긴 두 권의 노트에 담긴 내용, 그리고 화자 '나'가 시오미의 글을 읽은 후의 얘기가 담겨 있다.  
 







요양원에서 보여지는 서른 살 시오미는 삶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마치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것처럼. 시오미는 예술가로서의 생명력과 삶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나'가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미래가 없는 그저 하루하루를 끝내고 죽음을 기다리는 게 전부인,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진짜 삶이 아니라면서 살아있음이란, 내면의 모든 것이 전부 다 불타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은 것인데 자신은 그런 황홀감을 못 느끼고 있으니 죽은 거나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입원 환자 7백 명이 병원을 나가는 길은 병이 나아서 정문으로 나가든지 죽어서 영안실로 가든지 둘 중 하나인 요양원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기에 죽음 앞에서 이토록 초연할 수 있을까.  


ㅡ 


플라톤에 푹 빠져 있는 열여덟 살 시오미는 사랑에 의해서만 인간은 지상의 고독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랑지상주의자다. 후배 후지키를 향한 동성애적 감정, 사랑을 잃은 상실, 그리고 한 여인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러나 그의 사랑은 늘 일방적이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순수와 경외를 향한 그의 사랑은 때때로 부담스럽다.  


시오미는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는지,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자각하며 붙잡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쏟아져내리는 절망과 분노와 허탈과 체념 사이를 방황했다. 시오미의 불안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죽음의 공포보다 삶에 대한 불만이었다. 시오미가 영장을 받고 느꼈던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보다 누군가를 죽여야한다는 점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만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가, 사랑을 거부당하고 이와는 정반대적인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야하는 상황에 몰렸을 때 숨은 쉬고 있으나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시오미는 부유하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순수 청년 후지키는 어떤가. 그는 스스로를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자격이 없기 때문에 시오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그런 책임을 진다는 것이 두렵다고 자조한다. 후지키는 심지어 부모의 사랑조차 보답하지 못할 것 같아 부담스럽고 힘에 겹다고,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진지한 감정도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해 사랑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으니 혼자 있기만을 바란다. 이렇다보니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 말라는 시오미의 간곡한 부탁 역시 후지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사는 것이 노력이고 의무인 요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는 시오미.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은 전부 젊은이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전쟁과 가난과 질병 뿐이다. 시오미와 더불어 함께 생각해본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어떤 청춘 시절을 보냈을까, 그들은 그 청춘을 즐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삶의 기쁨을 알았을까.


시오미는, 인간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더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어내고, 대의 명분을 내세워 대량 학살을 용인한다고 말하며 이것이 과연 문명인가, 저주인가, 묻는다. 인간의 지혜가 살상 무기를 고안해내고 전쟁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런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더 이상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없는 세상에서의 삶이 의미가 있는가. 도대체 이 모순의 끝이 있기는 한 걸까. 



군국주의 시대에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과 인간성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은 한심하고 무용한 존재였을 것이다. 개개인의 다름이나 개성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 강인한 남성성을 우선하는 시국에 하나의 이념만 좇으며 살상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 갈 곳을 잃은 이들에게 전쟁터의 총알만큼이나 쏟아져 내렸을 자괴감과 상실감의 무게는 상당했을테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전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시오미가 향할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었으리라. 


소설 초반에 화자 '나'는 자신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시오미 시게시, 오로지 이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서임을 밝힌다. 아마도 이는 시오미뿐 아니라 전쟁과 패전 후 소리없이 살다가 떠나간 청춘들을 기억해달라는 애상곡이 아닐런지. 


문득 지금 이 시각을 살고 있는 청춘들,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으며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랄까...... . 그리고 나는 시오미와 후지키의 나이였을 때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가. 어쩌면 한 방향으로 달려야만 하는 현재의 청춘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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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과 신비 을유세계문학전집 128
르네 샤르 지음, 심재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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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르네 샤르의 1938년부터 1947년까지 쓴 시와 글들을 실었다. 이브 베르제의 1967년판 서문을 찬찬히 읽다보니 르네 샤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1907년에 태어나 1939년 서른두 살에 포병 부대에 소집되어 1940년 5월까지 알자스 지방에서 복무. 1941년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가들과 접촉한 후 1942년에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에 본격 가담하여 '알렉상드르'라는 가명으로 활동. 1944년 팔 골절로 부당을 당하고 알제리의 알제로 전출되어 약 한 달 동안 연락장교로 활동. 이것이 책에 실린 글들이 쓰여진 시기에 시인의 주요 이력이다.  






1939년 9월 3일의 시 <꾀꼬리>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시인의 심경을 그대로 나타낸다.  


꾀꼬리가 여명의 수도에 들어왔다.
그 노래의 칼날이 우울한 침상을 가두었다.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난다.
/ '꾀꼬리' 전문 




1938년에서 1944년에 쓰인 글들에는 유독 '현존'을 언급한 시구가 많다. 이외에도 여러 의미의 상징적 어휘들이 등장하는데 전반적으로 맥락을 살펴보면 '존재성'과 연관이 있다. 특히 에바드네를 비롯한 여성(소녀, 누이, 등)에게 상징성을 부여한 시구들이 눈에 띄는데, 여러 부분에서 표현된 바로는 사랑과 연민의 대상이자 기대고 싶은 의지처, 그리고 희망과 이상향을 상징하는 의미로 읽혀졌다. 


'엄격한 분할'이라는 연작시(그냥 메모인듯도 하고)를 통해 시의의 내면과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중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명증성에 대해 서술한 41번이다.  


'시인의 내면에는 두 개의 명증성이 있다. 첫 번째 명증성은 외적 현실이 가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 단번에 그 모든 의미를 드러낸다. 이 명증성이 깊이 파들어 가는 경우는 드물고, 그저 관여적일 뿐이다. 두 번째 명증성, 시들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는 명증성은 한 편의 시 속에 끼워 넣어져 있고, 시인에게 깃드는 강력하고 기이한 신들의 명령과 주석을 전한다. 이 명증성의 헤게모니는 빈사적賓辭的이다. 언표되는 순간, 엄청난 공간을 점유한다.' (p92) 


ㅡ 


시인 본인은 <히프노스 단장>의 메모들이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고, 자신이 갖는 효력에 신중하며, 자유를 예비해줌과 동시에 그 모든 걸 위해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휴머니즘의 저항의 기록이라고 밝힌다. 


시인은 인간이 일생동안 겪어나가는 고난, 그로인해 생기는 상처와 고통이 전혀 무용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들이 결국 자신의 삶의 방향을 가리키고 그 끝에는 어떤 형태로든 과실果實로써 드러날 것이라면서. 


그가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동지가 적군의 총에 처형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쓴 글. 작정만하면 구할 수 있었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을을 무사하게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그는 사격 신호를 내리지 않았다. 이때 가졌던 자괴감과 분노, 그리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이 짧은 글은 그의 고뇌가 온전히 전해진다. 이후에 쓴 글 또한 함께 저항하는 동지를 향한 애정, 평범한 이들의 경이로운 희생에 대한 존경 들이 담겨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오는 단상들. 행운이라고 여겼던 아름다운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그러한 시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고독. 그럼에도 지나간 과거의 회한에 머물지 말기를, 그는 자신에게도, 타자에게도 당부한다. 측량이 가능한 깊이의 절망은 극복 가능한 운명이니 굴레에서 벗어나라고, 미래는 희망과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그리하여 인간의 품격을 찾아가기를 그는 간절히 바람한다. 


차라리 자신을 박살 내서 완전히 죽게 해 달라는 그의 울부짖음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의 망각이, 나는 역설적으로 모두의 삶을 향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ㅡ 


이 책을 읽을 때 절반 이상을 낭독했다(물론 혼자 있을 때). 대부분의 시가 그렇기는 하지만 눈으로 읽고 다시 소리내어 읽을 때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도가 유독 큰 글들이었다(반면 윤동주 시인의 글들은 낭독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의 시는 눈으로만 읽어야 담아진다).   


실린 글들은 대부분 시인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긴박하게 시간을 쪼개어 썼을 글이다. 산문시, 메모 등 형식에 대한 구애없이 자유롭다. 그의 글에서는 뜨거운 열정과 분노, 희망에 대한 갈구, 생명과 삶, 그리고 자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헌신이 느껴지며, 심지어 때때로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토막글 같은 이 글들은 어떤 전쟁소설 이상으로 독자에게 감흥을 일으킨다. 예전에 시인 이육사, 김광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들을 읽을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이 떠올랐다. 절망의 끝에서 써내려간 열망의 글들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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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 수 없는 미래 - 황폐한 풍요의 시대,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다
마이클 해리스 지음, 김하늘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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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당면한 지구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해서 짚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환경 오염을 시작으로 지구가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역사, 생물 및 진화, 자연, 정치와 경제, 정신분석과 심리, 철학, 프로파간다와 소비 활동, 사회적 자아와 돌봄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탐구하며 원인을 분석한다.  








저자가 찾아간 매립지의 면적은 총 225헥타르에 달한다. 모나코공국에 맞먹는 크기다. 우리는 매년 20억 톤의 쓰레기를 생산하는데 그중 오천만 톤은 전자 폐기물이다. 쓰레기는 땅과 바다도 모자라 우주 밖으로도 보내지고, 우주 쓰레기 오십만 개는 길을 잃은 채 지구 주위를 시속 2만7천킬로미터로 돌고 있다.  


석유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백만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인류가 석유를 발견하고 첫 1조 배렬을 소비할 때까지 걸린 기간은 수천 년, 그다음 1조 배럴을 탕진할 때까지는 고작 3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고민해야하는 지점은 현재 확인된 석유 매장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넘어서 과도한 소비 활동, 오염, 자연 훼손, 기후 변화 등의 과정을 거쳐 생존의 위기에 처한 실존적 딜레마다. 



2019년 뉴질랜드 정부는 더 이상 GDP를 이정표로 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탈성장'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짚는 부분은 대부분 GDP의 허상이다. 국민 대다수는 삶의 질과 행복에 중점을 두지만, 정책 입안자나 경제인들은 '성장'에 집착한다. GDP의 높은 수치는 성장의 열매가 골고루 돌아가고 있음을 증거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미 과거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GDP 성장과 삶의 만족도가 비례하지 않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이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성장'을 놓을 수 없다면, 적어도 경쟁적인 속도만큼이라도 조절을 해야한다는 생각이다.  


여러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됐듯 '원함'과 '좋아함'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좇는 것이 행복 혹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욕망의 실현에 맹목적으로 끌려간다. 모든 것이 무시되고 '돈=행복'이라는 명제 하에 행복을 좇아 행복 기계가 되어 달린다.  


책에서 언급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사례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20세기 초에 정신분석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을 이용해 소비 활동에서 프로파간다를 이용하다니, 거기다 용어가 갖는 부정적 해석을 경계해 교묘하게 PR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그가 만들어낸 치밀함은 현재 알고리즘의 시초라고해도 틀리지 않을 듯 하다.  



자동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영역이 점점 좁혀져가고 있는 현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은행이나 기업의 콜센타는 말할 것도 없고, 음식점의 서빙은 로봇으로의 대체가 확장되고 있으며 이제는 키오스크가 없는 매장이 더 어색할 지경이다. 여행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커피나 호두과자도 기계가 척척 만들어낸다. 아마도 코비드19 시국이 기계 시대를 더 앞당기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러한 세태에 생산성은 상승하고 인간비는 절감되니 고용주들은 환영할만 하겠다. 거기다 정치 및 경제계 인사들이 지키고자 하는 GDP 상승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테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렇다면 점차 인간의 활동 범위는 줄어들고 존재감마저 잊혀져 가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여전히 소비 활동을 통해 삶의 만족도를 올리는 게 가능할까. 



대규모 산불, 녹조현상, 홍수와 가뭄, 홀로세 멸종 등은 이제 화젯거리도 되지 못한다. 우리가 상상했던 문명이 존속되는 미래가 실현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낮아지고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문명인으로서 지켜야할 품위는 백화점에 전시되어 있는 명품에 있지 않다. 저자는 해법을 삶의 지향성과 숭고함에서 찾는다.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없으니 지구의 약탈자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될 일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대대로 이어가야 할 것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이며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임을, 저자는 말하는 듯하다. 


'에우다이모니아'는 평생 동안 일어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이 결코 성취할 수 없는 무언가이며 붙잡히지 않는다. 좋은 삶은 매일, 매시간 엮어나가야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 및 동의한다. 그러니 우리, '에우다이모니아'를 합시다.  



​160.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우리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신호들과 기적 같은 특징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을 존중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이 산소와 탄소를 흡수하고 약과 영양분을 제공하는 일종의 지원 체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데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이들을 남용하고 파괴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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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파랑
기 드 모파상 지음, 송설아 옮김 / 허밍프레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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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편 소설 네 편이 실려있다. <사랑>을 제외한 세 작품은 풍자와 해학, 유머와 위트가 소설 전반에 흐른다.  



사냥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암컷 오리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컷 오리. 
이시도르의 일탈이 과연 방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너무나 천진한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
무슈 파랑의 복수, 그 이후가 궁금하다. 





 



책을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눈에 그려져 웃음이 절로 나온다. 특히 <위송 부인의 장미청년>과 <테오듈 사보의 고해성사>는 영국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적대감, 종교와 신앙심에 대해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인간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성격을 입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익살꾼 사보는 교회와 신부를 싫어해 평소에 얄미울 정도로 신부를 놀림감으로 만든다. 그런데 큰 공사비가 걸린 교회 보수 사업이 시작되자 돈 욕심에 자존심을 버리고 신부를 찾아가 그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며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모파상은 이러한 장면들 하나하나에 인간 사회가 갖는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넘치는 화술로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위송 부인의 장미청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요된 정조를 지키는 처녀를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위송 부인의 의도 자체, 그리고 청년 이시도르의 탈선(?)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고 있다.  



<무슈 파랑>에서는 유년시절부터 그를 키우고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켜준, 한마디로 어머니와 다름하지 않으며 폭군에 가까운 늙은 가정부 줄리와 제 주장이 강하고 이기적인 아내 앙리에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두 여자 사이에서 지레 죽을 판인 파랑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도 해학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  


독자는 아들 조르주의 친부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파랑의 갈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진실을 알든 모르든 각기 다른 이유로 의심과 고통에 짓눌릴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갈등은 치정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여러 갈래에서 맞닥뜨리는 딜레마다. 파랑은 이 문제를 두고 20년 가까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끝까지 해법을 찾지 못한다. 그가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긴 세월 동안 우울과 상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가 이에 대한 혜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다보면 '이렇게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진실을 알고말지' 싶은데, 문득 얼마 전 온라인 북클럽에서 어느 분이 '천성'에 대해 한 말씀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타고난 성정이라는 게 사람마다 있으니 파랑도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더 당황스러운 건 아내가 유책 배우자인데 파랑이 생활비로 매달 만 프랑을 지급한다. 그것도 외도 상대 남자와 함께 사는 아내에게)도 들고. 어쩌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고. 


아무튼 파랑은 자신이 비극적 폭탄을 맞았던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수한다(이성적으로 말하자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이들을 상대로 고통받지 말고 당신의 삶을 살라고 말해야겠지만, 파랑의 복수에 나는 속이 다 시원했다. 조르주는 아무 잘못이 없다만). 복수 이후 파랑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그려지지 않는다. 독자가 그의 마음을 짐작해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독자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에서 데이지(위대한 게츠비), 키티(인생의 베일), 이디스(스토너)를 능가하는 비호감 캐릭터가 등장한다. 파랑의 아내 앙리에트. 그녀가 파랑과 결혼을 한 이유만으로도 예사로운 사람은 아닌데, 한 술 더 떠 파랑이 자신을 돈으로 샀기 때문에 짜증난다고 말한다(파랑의 입장에서 그런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파랑의 '선의'가 어리석음이고, '신뢰'가 갑갑함이라고 얘기하면서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증오한다고 소리치는데, 이는 결국 질투는 고사하고 아내의 외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그의 무신경과 멍청함에 화가난다는 것이다. 죄의식은 고사하고 이런 사고회로는 어떻게 하면 만들어지는지... . 파랑과의 결별 이후 소설에서 간간이 보여지는 앙리에트 삶의 모습은 괘씸하지만 제 살 길을 잘 찾아갔다는 점에서 파랑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모파상의 소설은 권선징악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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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소설들은 모두 1880년대에 쓰여졌다. 당시의 시대성을 감안해도 인류가 마주하는 정서와 고뇌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주는 상처, 진실된 사랑, 이해와 공존에 대한 의식 등 삶이 지속되는 한 꾸준히 생각하고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그리고 기억해야 하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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