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
김솔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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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상당히 흥미롭다!
일단 1장을 통과하면 그 다음부터는 책을 덮지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1장이 지루하다거나 어렵다는 의미는 아니고, 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김솔 작가님의 장편을 두어 편 읽어 본 개인적 경험으로 장편이 대체로 이런듯한 느낌적인 느낌?).  


소설을 1장까지 읽고나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프롤로그는 이토록 비장하며, 도입부는 이렇게 장황할까, 싶다. 그런데 2장에 들어서면 충분히 비극적으로 읽혀지는 운명적 만남과 한 사람의 처절한 복수의 서막이 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남자가 법정에서 천 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보호시설에 왔다. 아름다운 용모, 세상 걱정 없어 보이는 표정, 고급 의복과 승용차. 그는 한눈에 봐도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고, 사회봉사는 그저 시간 채우기에 불과한 형식적인 행사였다. 어느날, 겟세마네라는 방에 수용 중인 사지절단 행려병자가 그에게 접근해 마치 세에라자드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대신 올 때마다 자기에게 음식을 한 가지씩만 가져다 달라는 제안, 아니 유혹을 한다. 이야기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행려병자의 말은 진짜일까, 아니면 식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  
 
'나'는 청년에게 그가 13년 전의 일을 기억하도록 몇 개의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는 '나'와의 사랑도, 자신의 죄악도, '나'라는 사람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소설은 화자에 따라 복수의 대상이 2인칭 '너' 혹은 3인칭 '형제님(그)'으로 불리면서 서술한다. 독자는 쳥년에게 중남미 여행기를 들려주는 자가 당연히 '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읽을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독자가 추적해 나가는 것은 13년 전 사건의 진실, 그리고 보호시설 내부에서 과연 '나' 가 누구냐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화자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들이 사이사이 등장한다. 성별, 과거의 직업, 대화 패턴, 이어지는 크고 작은 반전들.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정체, 그리고 '그들'이 '그'와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진실과 거짓 여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백지상태인 '그'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대화와 독백을 읽고 관찰하는 독자가 더 혼란스럽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사건의 가해자이자 복수의 대상인 '그'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13년 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사건 내막까지 가해자 당사자의 입장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건의 피해자인 '나'에 의해서만 모든 정황을 설명한다. 왜일까? 어쩌면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현실에 대한 일갈 또는 한풀이(?)라는 생각이... .


ㅡ 


성폭력 사건, 사회적 약자 차별, 권력층의 카르텔, 존엄한 삶, 이기와 탐욕, 상실된 인간성,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념의 옳고 그름, 증오와 사랑, 죄악과 용서. 파블로가 들려준 남미 여행기와 그의 과거사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이야기는 장소와 사람을 달리했을 뿐 13년 전의 '그'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우리는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면서 살아가는 중인 지금 당장의 존엄한 삶에 대해서는 왜 논하지 않을까. 서점 스터디셀러에도 존엄성에 있어서 삶보다는 죽음을 다룬 책들이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한다. 우리는 어째서 한순간의 죽음보다 더 긴 삶의 존엄성을 간과하고 있나. 존엄한 삶을 살면 존엄한 죽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보호시설의 원장신부를 비롯한 성직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 그리고 수용인들까지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민낯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 갖는 위험성,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과정이야 어떻든 우리는 결과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반복한다. 어쩌면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미덕이야말로 인정認定과 용서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꾼, 연출가, 암살자, 이들 중 누가 과연 '나'일까. 그들 모두일지도 아니면 그들 모두 아닐지도. 


이 책 자체가 '그'에게 전하는 메세지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피해자를 위무할 수 없을 수준의 처벌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또다시 가해지는 폭력일 뿐이다. - P251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건 이 책을 쓴 자가 아니라 읽는 자이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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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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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92년까지 쓴 글인데, 198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 글이 집단의 일상을 포착해 한 시대의 현실, 특히 신도시에서 느껴지는 현대성에 가닿으려는 시도라고 밝힌 작가는 포착한 장면에 끼어들거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가능한 피하려고 했지만, 당초의 예정과는 다르게 자신을 투여했다고 썼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여인. 열차 안의 사람들. 쇼핑센터 안의 손님과 계산원 들. 대중교통에서의 에티켓과는 무관한 사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주문과 계산을 하는 채소 장수와 손님. 백화점 앞의 호객꾼. 노숙자. 타인을 향한 쑥덕거림. 지레짐작과 막무가내의 뒷담화. 자유주의 함께 등장한 단어, 무쓸모 인간. 20년간 유지되었다가 사라진 이민자들을 위한 임시 주거지. 작가의 눈에 들어온 사람과 장소 들. 


전철역의 노래하는 맹인과 개 한 마리의 조작, 그리고 동전을 던진 이들이 갖는 그날 하루의 보시에 대한 기대감.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모멸감 따위는 감수할 준비를 해야하는 먹고 사는 현장. 자신의 아이만 최고이기를 바라고 그 아이가 자라서 그들이 이루지 못한 계급에 속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열망. 기계와 숫자로 '판독'되어지는 '나'라는 존재. 거지의 순종을 망치는 노출증 남성. 전철 안에서 타인의 태도와 말을 통한 의도없는 망연한 상상. 병원 응급실에서의 주저. 이입되는 타인의 죽음. 소비를 통해 은연 중에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표출하는 소비자. 쇼핑 카트에 담는 신도시 중산층 주민이라는 자부심. 생계를 위한 피지배자들의 파업을 열등한 존재의 우둔한 행위로 바라보는 시선들. 현실의 몰이해와 모든 척도를 자신에게 두는 일방적 견해와 판단, 뒤따라오는 이를 통한 자기만족과 안도감.   


​아니 에르노는 이 모든 것들에서 그녀 자신을 본다. 


ㅡ 


글 안에는 우리가 평소에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독자의 이웃 혹은 직장 동료 등 생활권 내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들이다. 장소 역시 전철, 광장, 공원, 쇼핑센터, 미용실, 병원, 우체국 등 아주 익숙하다(개인적으로 나름 신도시라는 곳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참고로 책에서 언급한 도시는 꼭 신도시만의 풍경은 아니다). 


약 30여 년 전의 풍경에 대한 8년간의 기록은 형태를 달리해 여전히 우리의 모습을 띠고 있다. 신체 노출이나 '구걸'은 현실 세계가 아닌 SNS의 화면 안으로 들어가 더 많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일자리 부족과 생계에 따른 경쟁은 '삶의 질'이라는 명분으로 더욱 치열해졌다. 출산율이 낮아지니 자식의 장래에 거는 기대치는 무한대로 높아져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를 양산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도 부모도 만족하지 못하다. 아동의 아사는 극빈층에 대한 무관심에서 다른 범죄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타인을 향한 무례가 스스로를 우월하게 만든다는 얄팍하고 질 낮은 자신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 제가 내뱉는 말들이 곧 자신의 인격임을 전혀 모르는 무지. 벗어나기 요원한 노동의 굴레. 그리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한 여성 폭력.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작가는 타자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든 적든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투영하게 됨을, 작가는 고백한다. 여러 군데에서 무척 공감했고, 종종 작가의 행동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너무 인간적이시다).



역자는 서문에서 '이화감異化感'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를 제시한다. 기존 한국어 번역을 존중한다면 '소외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따돌림의 감정이 아닌 자기 자신과 타자성으로 분열된 주체의 상태를 담아내기 위해 제시한 단어라고 각주를 달았다. '문화적 이질감'과는 다른 의미일까? 간혹 세대 간, 지역 간 차이에서 내가 종종 느끼는 감정이라... .  






자신들이 내 역사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심조차 않는 무명의 사람들, 내가 결코 다시 보게 되지 못할 얼굴들, 육체들 안에. 아마도 거리와 상점의 군중에 섞여 든 나 역시 타인의 삶을 지니고 있으리라.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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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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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어떤 면에서 내 삶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내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어. 때때로 삶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알고 보니 아무 의미가 없고, 나를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워.



20대에 단 두 권의 소설로 스타 작가 반열에 올라 돈과 명성을 얻었지만 지독한 신경쇠약에 걸려 2년 동안 전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앨리스, 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데다 어머니가 임종한 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부유하다 직장을 잃고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펠릭스, 어려서는 언니에게 치였고 대학 생활 내내 우수한 성과를 냈지만 박봉의 문학잡지 편집자 자리에 그친데다 사랑도 결실을 맺지 못해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조하는 아일린, 늘 가벼운 만남 만을 추구하는 진중한 가톨릭교도 사이먼.  


소설은 네 남녀의 우정과 사랑을 사실적이고 신랄하게 그리고 있다. 과거에 저지른 죄와 죄책감, 후회와 용서, 우성과 사랑의 경계선, 성性과 사랑, 성공과 실패 등 2,30대 청년들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혹은 중년의 우리가 경험했을 감정들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묘사된다.   






열여덟 살에 대학에서 처음 만나 룸메이트로 시작해 10년이 넘도록 절친 사이인 앨리스와 아일린. 현재 두 사람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일상을 비롯해 정치, 사회,철학, 예술, 환경 등 여러 생각들을 공유하며 연애나 가족 문제까지 조언해주지만, 정작 가슴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은 털어놓지 않는다. 또한 이메일 쓸 때마다 사랑한다, 보고싶다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두 사람이 만난지는 오래 전이다.  



두 커플의 관계도 상당히 대조적이다. 
먼저 앨리스와 펠릭스는 데이트 앱을 통해서 처음 만났고,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앨리스는 작가지만 펠릭스는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에는 조심성이나 배려를 염두하지 않는듯 보인다. 일회성 만남으로 끝날줄 알았던 그들은 우연히 재회하면서 만남을 이어간다. 반면 아일린과 사이먼은 유년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이웃이다. 사이먼은 청소년기의 아일린에게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평생 동안 친구로 지내게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과한 배려는 오히려 서로를 밀어내는 꼴이 되고 만다.  


자신의 삶에서 사이먼이 없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아일린은 섣부른 연인 관계였다가 오히려 그를 잃게 될까봐 가까이 가는 것을 망설였고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늘 기대기만 하는 민폐같은 존재인 것 같아 불편했다. 사이먼은 평생 친구로 남아 있겠다는 약속을 미욱스럽게 지키며 다른 여성들과 가벼운 만남을 가장해 늘 아일린의 주변을 지킨다. 사이먼은 펠릭스에게 한때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그만두었다고 털어놓는데 어쩌면 아일린을 사랑해서였기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만취해서 온 펠릭스는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앨리스의 상처를 건드린다. 앨리스 입장에서는 누군가 건드려주기를, 그래서 마음껏 화라도 낼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째 펠릭스의 자격지심도 조금 느껴진다. 


결국 눌러놨던 감정의 찌꺼기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심경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진정한 카타르시스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렇다고 해서 모두 이들처럼 아름다운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여차하면 평생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 네 남녀의 심리는 단순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너무나 복잡미묘해서 만약 내 친구가 나에게 이러한 심정을 토로한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외롭고, 돈 때문에 불안한 삶.
행복과 불행이 오락가락하며 때로는 그 감정선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사랑이 전부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랑 없이는 살 수 있는 게 인생 아닌가.
상처 받고 아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청춘의 전유물은 아닐터다. 


그들,
아직 아프고 상처받을 날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사랑하기를. 




280.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게 훨씬 낫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훨씬 낫지. 그리고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바라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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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페이지터너스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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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을 포함한 중단편 소설 다섯 작품이 실린 마샤두 지 아시스 선집이다. 실린 작품 모두 인상적인데, 다섯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잘 것 없는 우월감, 알맹이 없는 허위와 허세, 의미 없는 미사여구, 사악한 칭찬과 찬사, 위장된 겸손, 이성, 그리고 광기와 폭력.  


<점쟁이>에서 부정을 저지른 두 인물을 통해 두려움은 이성을 멀게 하고, 인간은 제가 바라는대로 상황을 해석함을 볼 수 있다. <회초리>에서의 다미앙은 양심의 가책은 뒤로하고 너무나 손쉽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권력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약자끼리 제 살 파먹기를 종용하는 구조를 짚고 있다.  








이 선집에서 압권은 표제작인 중편소설 <정신과 의사>다.

이 소설에서 모순은, 애초에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가 목적한 것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를 구분짓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는 듯 보인다. 인간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경중의 차이일 뿐 대부분은 광기가 있으며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 "인간 이성을 마비시키는 바스티유 감옥" 이라는 표현 역시 역설의 의미를 담은 건 아닐런지. 


또한 시위대를 조직한 이발사 포르피리우 역시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시위를 개인의 정치적 야망으로 이끌어 나갔고, 시위의 당초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다 권력의 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약제사 크리스핑 소아리스의 처세는 비열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가 이성을 앞지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정신의학과 과학에 대한 열정을 넘어선 광기, 명예를 탐하는 욕망. 박사의 열정이 오직 의학의 발전과 인류에 대한 봉사이기만 했을까. 더하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지만 않는다면 과학의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무방한가.  


소설의 결말은 그야말로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한바탕 소동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정의와 공정과 공평보다는 불의와 불공정과 불공평이, 검소와 나눔과 배려보다는 사치와 탐욕과 이기심이 더 일반적이니, 따라서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야말로 '정상'이고,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비정상이라는, 그래서 도덕성이 우월한 사람이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기막힌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쩌면 세상 전체가 '카자 베르자 병원'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이타구아이시市에는 단 한 명의 정신병자도 없다는 진실의 씁쓸함, 그리고 '겸손함'이라는 병명으로 카자 베르자 병원에 스스로 수용되기를 선택하고 끝내 퇴원하지 못한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 어쩌면 우리의 의문은 그가 카자 베르자에 입원할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일지도 모른다.


<정신과 의사>를 읽다보면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1799년 나폴레옹 정부 수립까지 숨가쁘게 지나간 프랑스 혁명의 단면을 보는듯 하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나라의 독재 정권 시대를 연상케하고.   



사이사이 공포스럽기까지 한 소설들을 다 읽은 후 되짚어봤다. 19세기 중후반, 브라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현재의 세계 어느 도시든 큰 괴리가 없다. 폭력을 단죄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부정한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개의치 않는다. 정직과 성실의 가치는 시대착오적인 구습으로 치부된다. 얄팍한 술수와 비겁함이 경쟁력으로 포장된다. 우리가,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 사회가 '카자 베르자 병원' 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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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세계문학 첫 문장 111
열린책들 편집부 지음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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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에 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이 현재 286권이 출간됐다. 그중에서 111권의 표지와 첫 문장을 모은 엽서북이다. 사실 엽서북이라고 생각도 못했다가 인친님 피드를 보고 엽서북인 줄 알게 됐다. (이 아까운 걸 어떻게 엽서로...!) 








제임스 A. 미치너의 <소설>로 시작해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집>이 마지막 장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ㅡ괴테, 아서 코난 도일, 유진 오닐, 버지니아 울프,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 빅토르 위고, 대실 해밋, 아서 코난 도일, 제임스 조이스 등ㅡ들 외에도 체사레 파베세, 베르톨트 브레히트, 레이먼드 챈들러 등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 표지가 보여서 반가웠다. 


아직 한 작품도 읽어보지 못한 베르코르, 존 파울즈, 조르지 아마두, 나기브 마푸즈, 마이크 레즈닉, 에릭 앰블러, 옌스 페테르 야콥센 등은 목록에 올려놓고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책에 담은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첫문장은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로렌스의 <채널리 부인의 연인>.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이라도 첫문장을 읽으면 대략 유추되는 것들이 있다. 소설의 분위기, 문체, 정서적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직업 등. 무엇보다 첫문장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표지는 점점 더 작품의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하고. 


이외에도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표지를 보면서 지난 코비드 시국에 코로나 감염으로 임종한 루이스 세풀베다가 떠올라 잠시나마 추모의 시간을 가졌고, 몇 권의 책들은 독서모임 멤버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이나 추억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집에 있는지 몰랐던 윌라 캐더의 작품(나의 안토니아)을 발견한 것도 나에게는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생각보다 전집에 출간된 지 몰랐던 작품들이 꽤 되더라는. 



한 장 한 장 넘기자니 유독 마음이 갔던 작품들이 눈에 들어와 남겨놓았던 독후기록도 찾아서 읽어보고, 동시에 작가들 면면도 찬찬히 살펴보는, 나에게는 휴식의 시간이었다. 불현듯 도록을 이렇게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서 가까운 몇몇 이들에게 요령껏 활용하라고 선물할 요량이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첫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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