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리아드 (양장, 한정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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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오늘날처럼 형편없지 않던 시절... 하고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는 것같이 시작되면서 아득한 먼 미래의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현학적인 요소가 가득한 SF우화라고 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두 로봇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가, 아득히 먼 행성들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따뜻한 조언과 작은 원조의 손을 내밀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봇이 인간을 구한다고 하는 설정에서 느껴지듯이 스타니스와프 렘 특유의 시니컬함은 변함없지만 이 작품 같은 경우에는 우화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산뜻하게 읽고 가볍게 웃을 수 있습니다. 교훈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황당 무계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이야기입니다. 진지한 장편만 읽어 본 독자로서 이러한 렘의 일면을 알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서만 접할 수 있는 특수한 용어나 고유 명사에 의해 만들어진 독특한 분위기도 놓칠 수 없습니다.

 

'첫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반목하는 두나라의 왕에게, 주인공인 두 로봇이 전쟁에서의 궁극의 지휘명령계통기술을 전수함에 따라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2개의 나라로 나누어진 혹성에 내려선 두로봇. 각각 아트로시투스(잔인), 페로시투스(포악) 이라는 두 명의 통치자에게로 다가간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는, 군대의 강화를 요구하는 왕들에게 가르강티우스의 비법을 이용할 것을 조언합니다. 가르강티우스의 비법과 거기에 숨겨져 있는 역설적인 덫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또, 조금은 목가적인 느낌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에 남습니다.

 

트루를은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타입인데 반해, 클라포시우스는 반대로 행동하기 전에 잘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타입입니다. 그런 둘은 때로는 반목도 하지만 사이 좋은 친구입니다. 두 명의 대화는 만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읽고 있으면 즐겁습니다. 두 명은 일단 로봇이지만, 행동거지로 보아서는 인간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 단편집이 이론이나 치밀한 설정을 중시하기 보다는 유머러스한 풍자나 해학쪽에 더 치중을 두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편 하나의 길이는 짧지만, 그에 비하면 읽는데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이유중 하나는, 우화풍이라고 해도 현학적 요소가 거의 글 전체에 가득 채워져 있어서, 생각없이는 가볍게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데, 오히려 그런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자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조금 독특한 단어들이 다수 사용되고 있어서 그것에 익숙해지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뭐, 렘의 작품을 간단하게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즐길수 있었습니다. 팬으로서 충분히 만끽했습니다. 읽을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두 로봇이 엮어나가는 이야기로부터, 당시의 사회상이나 비판등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너무나 인간 냄새나는 로봇들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오래된 소설이지만 읽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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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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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온'이라는 가상의 땅입니다. 지도는 물론이고 오래된 책 속에서조차 일체 그 기록을 찾아볼수 없는 그 곳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쪽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어서, 전쟁이라던가 과학문명의 혜택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평온하고 유유자적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는 사계절 외에도 겨울이 끝나면 찾아오는 뇌계 즉, 천둥의 계절이라 불리우는 또하나의 계절이 있습니다. 천둥의 계절에는 귀신이 온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있는데, 겐야는 이 천둥의 계절에, 하나뿐인 누나를 잃은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년 겐야는 어째서인지 이곳 온에 대해서 잘 융화하지 못하고 이질감 같은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온의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줄 혈연관계가 소년에게는 없습니다. 어느 날, 광장에서 우연히 만난 주술사의 말을 듣고 겐야는 자신이 '바람 와이와이'라는 새모양을 한 어떤 존재에 씌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작인 야시에서부터 이어져오는 이계의 모습은 매우 기이하고 신비스럽습니다. 빨려들 것 같은 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무서운 세계. 야시에서 보여준 밀도있는 세계도 좋았지만, 장편에서의 보다 광범위하고 깊어진 세계관이나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맘에 듭니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온은, 그 외관만으로는 어느 시골의 외딴 마을을 떠올리게 할 만한 곳입니다. 어쩐지 그립고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동화나 설화속의 나라같은.... 현실의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법도 하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닿을 듯 하면서도 닿지 않는 그런 느낌. 수수께끼의 정령 '바람 와이와이'의 존재도 독특해서 겐야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전반부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후반부에서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겐야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이야기가 갑자기 아카네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아카네는 현실세계의 일본에 살고 있는 소녀입니다. 무대가 온에서 이 쪽 세계로 옮겨오는 것이죠. 혼란스럽기도 하고 흥이 깨진다고나 해야할까요. 도바 무네키라는 인물의 등장도 갑작스러웠고..... 그전까지 '온'에서의 이야기가 맘에 들었기 때문에 무대가 현실세계로 옮겨오면서 흥미나 몰입도가 조금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세계에서의 이야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궁금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밝혀져 가는 구성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것도 포함해서 불만없이 즐겁게 읽을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너무 급하게 마무리 되는 것 같다는 인상은 지울수가 없습니다. 분량이 조금 더 많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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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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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조지아의 시골 마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퇴역군인 잭 리처는,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 용의로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 되고 만다. 정처없이 걷던 도중 식당에 들렀다가 영문도 모른채 갑작스레 체포된 것이다. 그곳에서 형무소로 이송된 잭 리처는 하마터면 살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누가 그의 목숨을 노리기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듯한 은행원 출신의 남자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혐의가 풀려 석방된 잭 리처는 여순경 로스코와 함께 피해자의 신원을 쫓기 시작한다. 피해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이 사건의 배후에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98년도 앤서니 최우수 처녀 장편상' 수상작. 

 
주인공 잭 리처는 전직 헌병 출신으로, 군수사관으로서의 냉철한 판단력과 특수훈련으로 다져진 전투능력을 겸비한 소위 만능 유닛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적도 없이 부평초처럼 각지를 방랑하는 날들. 그런데 우연히 들른 벽촌에서 살인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만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 자신이 직접 사건의 진상을 쫓기 시작한다는 전개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큰 사건에 휘말려 들어간다는 스토리는 흔히 접하게 되는 설정이긴 하지만, 그것을 상쇄시키는 훌륭한 구성과 빠른 이야기 전개 때문인지 진부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군요. 도저히 데뷔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잘 계산된 도입부부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 좋아요∼.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적이에요. 읽는 동안에, 주인공 잭 리처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영상 이미지가 떠올라 오는 느낌. 저같은 경우는 예를 들자면 슈왈츠제네거라든지 스탤론같은 80년대의 액션영웅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군요. 거대한 악에 대한 주인공의 단순 명쾌하고 통쾌한 분노의 폭발같은 것 들 말이에요. 하드하고 장렬한 액션 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스트가 가까와져 오면서 밀려드는 초조함과 긴박감을 오래간만에 맛보았습니다. 다음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수 있는 마무리도 깔끔했고 불만없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폭력적인 장면에서의 화끈함도 좋았구요. 답답하고 지루한 작품을 읽고 난후의 각성제로는 최고입니다. 

 
게다가 액션뿐 아니라 추리적인 요소도 제법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잭 리처는 군수사관으로서의 경험이 말해주듯 추리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싸우는 셜록홈즈랄까. 여러 장면에서 주인공의 이런 추리가 빛을 발하곤 합니다. 상대의 심리를 깊게 통찰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추리가, 등장인물들을 몇 번이나 궁지로부터 구해냅니다. 냉정 침착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해 나가는 이런 잭 리처의 모습은 한마디로 '멋있다' 입니다. 이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계속해서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주인공.  

 
그러나, 로맨스로서는 어딘가 좀 아쉬움이 남네요. 원래 이런류의 작품에서는 로맨스를 기대하지 않는것이 정상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남의 일 대하듯이 그토록 쿨하던 사람이 여주인공인 로스코 앞에서는 어쩐지... 아, 그렇다고 이중인격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딱히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래도 기대한 것 보다는 덜 쿨하네요.  순수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여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찌되었든 둘이 헤어지는 건 좀 싫으네요. 다음편이 나오려면 어쩔수 없는 마무리인 것은 잘 알겠지만, 이야기 전편에 걸쳐서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 놓은 모래성을 일거에 그런식으로 무너뜨려 버리니까 좀 황당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로스코가 다 팽개치고 잭리처를 따라서 같이 방랑길에 올랐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면 다음편부터는 주인공이 새로운 여자를 사귈수가 없기 때문에 안되려나요. 이해합니다.


잭 리처 시리즈가 계속해서 번역되어 나와주었으면 좋겠어요. 가급적이면 시리즈 전부를 읽고 싶은 마음이지만 최소한 가장 호평을 받은 몇작품 만이라도요. 그러고보니 시리즈 중 톰쿠르즈 주연으로 영화화되는 작품이 있다고 하던데... 다음부터는 아무래도 톰 형을 연상하면서 읽게 되겠네요. 잭리처는 장신인데...좀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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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크림 러브 -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가’ 나가시마 유 첫 장편소설
나가시마 유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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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이 시치로는 예전에, 자신이 제작한 게임과 그 게임을 소재로 한 소설이 히트해 꽤 유명세를 탄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무직이다. 직장을 관둠과 동시에 이혼한 아내와는 지금도 자주 연락을 하는 비교적 깔끔한 관계로 지내고 있지만 미련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 무카이 시치로와 그의 친구인 츠다의 현재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들이 학생이였던 1992년의 이야기와 2년전 시치로가 이혼할 무렵의 이야기가 병행해서 진행된다. 유유자적하게 흘러 가는 이혼남의 일상. 그 안에서 보여지는 서로 상반되는 유형의 두 남자의 우정 이야기, 그리고 헤어진 아내와 시치로 사이의 애틋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인상적이다.

 
별거중에도 아내는 수시로 시치로의 집을 찾아와 한밤중까지 머무르다가 마지못해 돌아가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내가 찾아오지 않자 시치로는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무작정 아내의 집을 찾아가 온갖 걱정으로 속을 끓인다. 바람을 피운 것은 아내이고 자신은 그런 아내에게 그에 대한 별다른 대가도 치루게 하지않고 순순히 보내주었다. 이혼 과정도 원만했고, 위자료조차 청구하지 않았으며, 아내에게는 지금도 연인이 있다. 밤늦은 시간에 혼자 빈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쓸쓸함은 다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고 때로는 혼자인 아내가 가엾게 느껴지는 것을 어쩔수가 없다.  

 
결혼은 문화라는 친구 츠다의 말처럼, 부부에게는 그 부부만의 '문화' 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비록 헤어진 부부라도 둘만이 공유하고 있던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이미 서로를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생각이 나면 또다시 상대의 안부가 걱정이 되고, 이제 나와 관계는 없지만 그래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오래된 동료의식 같은게 생겨나게 되는건 아닐까. 헤어진 아내를 향한 시치로의 미묘한 감정은 그런 동료의식 같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연애, 부부, 우정,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과 헤어짐, 90년대의 향수등 여러 가지 재료들이 먹기좋게 잘 섞여 있다. 안타깝고 쓸쓸한, 그러면서도 따뜻한 어른들의 성장소설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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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H 고스 - 리스트 컷 사건
오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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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몇년을 기다려 온건지 모르겠네. 이 책이 일본에서 처음 발매된 때가 2002년이니까 6년. 무려 6년이란 세월을 혼자 상사병을 앓아왔다. 그 사이에 'ZOO' 라던가 '여름과 불꽃과 나의 시체' 같은 오츠이치의 다른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오긴 했지만 덕분에 기대감만 더 부풀어 오르고…… 진짜로 보고 싶은건 본격미스테리 대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출세작이라는 GOTH 였기 때문에, 보고싶다 보고싶다 주문을 외우다시피 하며 살다가 드디어 발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단숨에 구입해 버렸다. 속전속결. 보니까 GOTH만화책이 동봉된 한정판 박스세트도 같이 발매가 된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쪽은 예약판매인 관계로 바로 받아볼수 있는 일반판을 구입했다.

표지 디자인이 일본어 원서와 동일해서 그런지 이 책이 몇년 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책이라는 실감이 나서 감격스러웠다. 다크실버 바탕에 블랙나이프, 그리고 흰색의 큼직한 문자로 제목이 쓰여진 모노톤의 표지는 심플 그 자체이다.

"죽이는 인간과 죽임을 당하는 인간이 있다. ……나는 전자다." 그런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나'는 밤과 어둠을 사랑하고 인간의 잔혹한 면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악취미를 가진 'GOTH'. 그런 본성을 숨기고 학급에서는 밝은 학생을 가장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언제나 외톨이로 지내고 있는 동급생 여자아이 모리노에게만은 본질을 간파당하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만드는 방법을 나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겠어?' 라며 다가온 그녀. 그렇다. 모리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 다만 그녀는 후자다. 죽임을 당하는 인간. 주변에서 일어나는 엽기적인 범죄현장 속으로 위험을 게의치 않고 자진해서 깊이 관련되어 가는 둘. 그것은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나 정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잔혹한 사건과 범죄자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본질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현실을 혐오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려 하지 않고, 그때문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들이 타고난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서로 연관되는 총 여섯편의 작품이 실린 연작단편집

각 단편의 대략적인 개요. 많이 부실하지만, 이 이상 더 알고 들어가는 것은 'GOTH'를 즐기는 데 있어서 치명적이므로 어쩔수가 없다. 짧게……
1. 암흑계 - 모리노가 주워 온 한권의 수첩에는 납치된 여성이 산속에서 조각조각 잘려져 가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연쇄살인범의 일지인 것은 아닐까. 수첩에는 확인된 피해자 외에도 아직 보도되지 않은 또 한명의 여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처참하게 신체 각 부위를 해체해서 기묘한 형태로 배치하는 연쇄살인범.
2. 리스트 컷 사건 - 사람, 동물, 인형할 것 없이 손목이라면 가리지않고 잘라가는 해괴한 범죄가 일어난다. 그 범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나.
3. 개 - 애완동물이 연달아 실종된다. 구덩이속에서 썩어가는 상태로 발견되는 동물들. 그 주위를 배회하는 수상한 소녀와 한마리의 개. 
4. 기억 - "……내게도 여동생이 있었지. 쌍둥이 동생이었어. 오래전에 죽었지만." 모리노에게 여동생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모리노가 살던 집을 찾아간다.
5. 흙 - 사람을 산 채로 관에 넣어 땅속에 파묻은 뒤, 관에 낸 구멍으로 대나무관을 연결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든 범인. 범인의 그런 기형적인 충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6. 목소리 - 죽은 언니의 살해범이라 자처하며, 언니의 죽기 직전의 육성이 담긴 테입을 내미는 범인.

이 책을 읽고나서 확신했다. 이 작가는 천재가 틀림없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에서 이런 기괴한 발상이 나올 수 있는지. 분위기나 내용적인 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방향이 다르다. 뭐랄까, 보통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곳을 더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때로는 편집광적인 면마저 느껴진다. 감탄스러운 것은, 언제나 이 작가의 트릭에 걸려 버리게 되는 점. 어렵게 돌리지 않고도 실로 깔끔하게 독자를 속여 넘기는 기술이 대단하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서술트릭인만큼 당연히 반전 이야기이다. 그 반전은 범인이 누구인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이야기중 어느 부분이, 또는 무엇이 갑자기 뒤집혀 버릴지 모른다.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이 갑자기 뜻밖의 곳에서 뒤집혀 버릴때의 당혹감. 짜릿하다. 서술트릭 이외의 다른 트릭은 거의 없으므로 특별히 머리를 굴리며 읽을 필요는 없지만,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틀림없이 카운터 펀치를 맞는다. 그것도 연타로.

솔직히 첫 단편을 읽으면서 잠깐이지만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스토리적인 면으로나 미스터리적인 면으로나 조금 약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첫단편인 암흑계-Goth는 'GOTH' 의 설정이나 세계관에 익숙해지고 분위기에 적응하게 하는 일종의 '프롤로그'로서 받아들이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대체로 뒤쪽으로 갈수록 더 높은 평가를 하게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작품인 개-Dog가 제일 좋았다. 기발함을 떠나서, 황당하고 정신이 번쩍들게 만드는(오히려 정신이 멍해진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 전개가 충격적이였다. 사람을 순간 프리즈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센스 너무 좋다.

이 책의 분위기는 겉표지가 주는 인상처럼 시종일관 흑백의 세계를 고수한다. 그 흑백의 이미지는 이단교의 비밀 종교의식을 연상시키곤 한다. 아, 흑백이라던가 의식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나의 극히 주관적인 인상. 그렇지만 그런 음울한 분위기를 수반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비정상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감정이 절제된 어투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 둘사이의 괴리감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공기가 묘하게 섬찟하다. 다만, 상식을 벗어난 가치관을 가진 일탈한 등장인물들이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잔혹한 사건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만들어 내는 어둡고 위험해보이는 분위기는 현실감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공포를 느끼거나 혐오감을 느끼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역시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기다림을 톡톡히 보상해 주는 걸작이였다. 그 동안 읽었던 오츠이치의 다른 소설들을 다시 꺼내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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