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TH 고스 - 리스트 컷 사건
오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도대체 몇년을 기다려 온건지 모르겠네. 이 책이 일본에서 처음 발매된 때가 2002년이니까 6년. 무려 6년이란 세월을 혼자 상사병을 앓아왔다. 그 사이에 'ZOO' 라던가 '여름과 불꽃과 나의 시체' 같은 오츠이치의 다른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오긴 했지만 덕분에 기대감만 더 부풀어 오르고…… 진짜로 보고 싶은건 본격미스테리 대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출세작이라는 GOTH 였기 때문에, 보고싶다 보고싶다 주문을 외우다시피 하며 살다가 드디어 발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단숨에 구입해 버렸다. 속전속결. 보니까 GOTH만화책이 동봉된 한정판 박스세트도 같이 발매가 된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쪽은 예약판매인 관계로 바로 받아볼수 있는 일반판을 구입했다.

표지 디자인이 일본어 원서와 동일해서 그런지 이 책이 몇년 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책이라는 실감이 나서 감격스러웠다. 다크실버 바탕에 블랙나이프, 그리고 흰색의 큼직한 문자로 제목이 쓰여진 모노톤의 표지는 심플 그 자체이다.

"죽이는 인간과 죽임을 당하는 인간이 있다. ……나는 전자다." 그런 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나'는 밤과 어둠을 사랑하고 인간의 잔혹한 면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악취미를 가진 'GOTH'. 그런 본성을 숨기고 학급에서는 밝은 학생을 가장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언제나 외톨이로 지내고 있는 동급생 여자아이 모리노에게만은 본질을 간파당하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만드는 방법을 나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겠어?' 라며 다가온 그녀. 그렇다. 모리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 다만 그녀는 후자다. 죽임을 당하는 인간. 주변에서 일어나는 엽기적인 범죄현장 속으로 위험을 게의치 않고 자진해서 깊이 관련되어 가는 둘. 그것은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나 정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잔혹한 사건과 범죄자에 대한 흥미 때문이다.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본질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현실을 혐오하거나 현실과 타협하려 하지 않고, 그때문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들이 타고난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서로 연관되는 총 여섯편의 작품이 실린 연작단편집

각 단편의 대략적인 개요. 많이 부실하지만, 이 이상 더 알고 들어가는 것은 'GOTH'를 즐기는 데 있어서 치명적이므로 어쩔수가 없다. 짧게……
1. 암흑계 - 모리노가 주워 온 한권의 수첩에는 납치된 여성이 산속에서 조각조각 잘려져 가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연쇄살인범의 일지인 것은 아닐까. 수첩에는 확인된 피해자 외에도 아직 보도되지 않은 또 한명의 여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처참하게 신체 각 부위를 해체해서 기묘한 형태로 배치하는 연쇄살인범.
2. 리스트 컷 사건 - 사람, 동물, 인형할 것 없이 손목이라면 가리지않고 잘라가는 해괴한 범죄가 일어난다. 그 범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나.
3. 개 - 애완동물이 연달아 실종된다. 구덩이속에서 썩어가는 상태로 발견되는 동물들. 그 주위를 배회하는 수상한 소녀와 한마리의 개. 
4. 기억 - "……내게도 여동생이 있었지. 쌍둥이 동생이었어. 오래전에 죽었지만." 모리노에게 여동생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모리노가 살던 집을 찾아간다.
5. 흙 - 사람을 산 채로 관에 넣어 땅속에 파묻은 뒤, 관에 낸 구멍으로 대나무관을 연결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든 범인. 범인의 그런 기형적인 충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6. 목소리 - 죽은 언니의 살해범이라 자처하며, 언니의 죽기 직전의 육성이 담긴 테입을 내미는 범인.

이 책을 읽고나서 확신했다. 이 작가는 천재가 틀림없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에서 이런 기괴한 발상이 나올 수 있는지. 분위기나 내용적인 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방향이 다르다. 뭐랄까, 보통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곳을 더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때로는 편집광적인 면마저 느껴진다. 감탄스러운 것은, 언제나 이 작가의 트릭에 걸려 버리게 되는 점. 어렵게 돌리지 않고도 실로 깔끔하게 독자를 속여 넘기는 기술이 대단하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서술트릭인만큼 당연히 반전 이야기이다. 그 반전은 범인이 누구인가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이야기중 어느 부분이, 또는 무엇이 갑자기 뒤집혀 버릴지 모른다.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이 갑자기 뜻밖의 곳에서 뒤집혀 버릴때의 당혹감. 짜릿하다. 서술트릭 이외의 다른 트릭은 거의 없으므로 특별히 머리를 굴리며 읽을 필요는 없지만,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틀림없이 카운터 펀치를 맞는다. 그것도 연타로.

솔직히 첫 단편을 읽으면서 잠깐이지만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스토리적인 면으로나 미스터리적인 면으로나 조금 약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 첫단편인 암흑계-Goth는 'GOTH' 의 설정이나 세계관에 익숙해지고 분위기에 적응하게 하는 일종의 '프롤로그'로서 받아들이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대체로 뒤쪽으로 갈수록 더 높은 평가를 하게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작품인 개-Dog가 제일 좋았다. 기발함을 떠나서, 황당하고 정신이 번쩍들게 만드는(오히려 정신이 멍해진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 전개가 충격적이였다. 사람을 순간 프리즈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센스 너무 좋다.

이 책의 분위기는 겉표지가 주는 인상처럼 시종일관 흑백의 세계를 고수한다. 그 흑백의 이미지는 이단교의 비밀 종교의식을 연상시키곤 한다. 아, 흑백이라던가 의식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나의 극히 주관적인 인상. 그렇지만 그런 음울한 분위기를 수반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비정상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감정이 절제된 어투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 둘사이의 괴리감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공기가 묘하게 섬찟하다. 다만, 상식을 벗어난 가치관을 가진 일탈한 등장인물들이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잔혹한 사건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만들어 내는 어둡고 위험해보이는 분위기는 현실감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공포를 느끼거나 혐오감을 느끼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역시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기다림을 톡톡히 보상해 주는 걸작이였다. 그 동안 읽었던 오츠이치의 다른 소설들을 다시 꺼내 읽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