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5072 <그대의 차가운 손>
˝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남을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수는 없는 거다.˝
가면을 안쓰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한강작가님의 <그대의 차가운 손>은 제목처럼 차가운 작품이었다.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온기라는 것은 없었다. 껍데기 속에 감춰져 있는 감정과 아픔들. 왜 우리는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걸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각가 장운형이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에는 작가나 미술가 등 예술가가 자주 나오는데, 다 우울한 사람들이다. 이러다 특정 직업군에 대한 편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액자식 소설이지만 장운형이 실종되기 전에 남긴 글이 이 소설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부모님의 무관심과 위선 때문에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 보다는 주위 시선을 더 의식해서 타인에게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식들에게는 차갑기만 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 였다. 돈을보고 어머니와 결혼했으면서도 타인들에게는 언제나 존경받고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으며, 타인들 앞에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없었다. 여기에 외삼촌이란 사람도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외삼촌은 이런 위선적인 아버지를 뱀 같은 놈이라고 알아보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나는 용기 있는 아이가 된건가, 비겁한 아이가 된건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그리나 그것이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리면, 나 말고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진실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가령 내가 오늘 밤 죽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 진실 아닌가?] P.59
특이한건 외삼촌의 외향이었다. 외삼촌은 군대시절 오발사고로 손가락을 잃고 이후 망나니로 살아가는데, 주인공인 장운형은 단 한번도 외삼촌의 오른손을 본적이 없었다. 가면속에 진실을 감추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제나 오른손을 감추는 삼촌을 보고 자라면서 그는 진실의 추함을 알게 된다. 결코 보여질 수 없는 진실, 내가 속이고자 하면 속일 수 있는 진실. 그는 껍데기가 결국은 진실이라는 삐뚤어진 시선을 갖게 된다.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한순간 강렬하게 찾아들지만, 의지할 만한 물건은 못 된다. 곧 변형되고 때로는 퇴색되며 영영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어떤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다. 다만 애정을 느낀다고 했다. 그것만이 나에게 정직했기 때문이다.] P.85
장운형은 성인이 되면서 조각가가 된다. 그의 분야는 석고를 부어 만드는 라이프캐스팅. 어린 시절 가면을 쓰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간 부모와 외삼촌 때문이었을까? 그는 내면 보다는 껍데기, 특히 손에 집착한다. 그러다가 첫 전시회에서 L이라는 여자를 보게 된다. 100킬로그램의 거구에다가 타인에게 비호감을 주는 외모였지만 그는 그녀에게, 특히 그녀의 손에 끌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라이프캐스팅 모델이 되달라고 한다. 언제나 타인으로부터 격멸의 시선을 받던 L은 그의 호감을 받아들이고 모델이 된다. 이후 그녀는 손 뿐만 아니라 몸까지 석고를 뜨게 된다.
[내가 만들어준 고통 속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석고가 잘 굳을 때까지 고통을 연장시켜주는 것 뿐이었다. 석고에 파묻힌 그녀의 몸 위로, 마치 그 거대한 흰 더미에 잘못 얹혀진 것처럼 그녀의 조그만 얼굴이 솟아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질경거릴 때마다 그녀의 처진 뺨이 흔들거렸다.] P.106
그의 애정을 통해 눈을 뜬 L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그리고 살을 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를 떠난다. 그는 L의 흔적이 담겨있는 석고상을 보면서 L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감정은 무뎌져가고, 다른 여자들을 대상으로 석고를 뜨면서 그렇게 작품활동을 계속해나간다. 여전히 그는 껍데기만을 만들 뿐이었다.
[짐짓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커다란 몸에 갸날픈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이란 뭘까. 자신을 향해 혐오의 눈길을 쏘아 보냈던 남자애. 그 소년의 껍데기를 사랑하는가.] P.122
그러다가 우연히 길에서 L과 재회한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의 L이 아니었고 살이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식욕이 여전했고, 몰래 먹고 토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껍데기에 불과한 외형 때문에 그녀는 매일 매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서 살게된 L은 자신의 과거이자 거대한 껍데기였던 석고상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느낀다. 장운형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몇일 집을 비운 사이 그녀는 그녀의 껍데기를 깨부수고 그의 집을 떠난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엇인가가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결코 알아낼 수 없었다.] P.187
이후 장운형은 E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L과 대조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E, 하지만 그는 그녀의 외모 뒤에 숨겨진 진실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E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차가움을 느끼지만, 자신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그와 가까워진다. 결국 하룻밤을 자게 되지만 그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낀다. 그가 안은 그녀 역시 껍데기였기 때문일까?
[이따금 나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왜? 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 P.271
그는 E에게 그녀의 얼굴을 뜨고 싶다고 한다. 지금까지 단한번도 그가 떠보지 않았던 부위인 얼굴. E는 그에게 왜 자신을 뜨고 싶어하는지 묻는다. 그는 E에게 뭔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그래서 진실을 알고 싶어 뜨고 싶다고 말한다. E는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는 E의 얼굴을 석고로 뜬다.
[네가 날 뜨고 싶다고 했을 때. 마치 내 가죽을 벗겨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지.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아마도 난 증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야.내 껍데기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걸.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껍데기라면, 그게 껍데기인들 무슨 상관이겠어?] P.302
이후 그는 그녀의 석고상을 완성하고 E에게 보러 와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녀는 예전과 다르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보러 오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진실이 드러날까봐 두려워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그의 끈질긴 구애 끝에 E는 그의 작업실로가고 그곳에서 자신의 얼굴 껍데기들을 본다. 그의 제안으로 이번에는 전신 석고를 뜨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석고를 뜨면서 주먹을 펴지 않는다. 그는 그녀의 주먹을 피려고 하지만 그녀는 완강이 거부한다. 결국 그녀는 석고 뜨는걸 완강히 거부한다. 그는 당황한다. 뭐가 문제였던걸까?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손을 보여준다. 그는 그녀의 손이 몹시 차갑다는 것을, 예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대한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진실을 털어놓는다. 이후 두사람은 함께 사라진다. 껍데기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어딘가로...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짓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P.313
껍데기가 진실같아 보여도 진실은 아니다. 껍데기일 뿐이다. 진실은 내면에, 자신이 감추고 있는 그곳에 있다. 손도 마찬가지다. 손이 차갑더라도 그 안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 나의 껍데기만을 아는 사람들은 타인일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내면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내면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Ps. 드디어 한강작가님의 소설을 모두 완독했다. 단 한작품도 빠지는 작품이 없었다. 감정이 너무 깊어 우울하긴 했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평생 소장해서 계속 읽어야 겠다.
Ps. 모든 작품이 다 좋았지만 누군가에게 한강작가님의 첫 책으로 추천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
장편 :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단편 : 노랑무늬영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