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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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09

˝한번 생겨난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존재합니다. 기억과 마찬가지예요. 가령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잖아요. 그런 것과 같죠.˝


하루키옹의 첫번째 단편집인 <중국행 슬로보트>는 이게 뭐야? 하면서도 계속 읽게 되는 하루키만의 쿨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단편집이다. 하루키가 직접 쓴 해설을 보면, 일단 제목을 먼져 정하고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이런 제목을 정한것도 신기한데, 이런 제목을 가지고 이런 글을 쓴건 더 신기하다.



표제작인 <중국행 슬로보트>는 중국으로 가는 배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주인공인 내가 살면서 만난 세명의 중국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의고사 배치학교를 중국인 초등학교(일본에 있는)로 받아서 그곳에서 만난 중국인 초등학교 선생님,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만난 중국인 여대생,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고등학교때 알고 지내던 친구인자 지금은 백과사전을 팔고 있는 중국인 남자.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하다.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P.11



나는 그들을 떠올리며 아, 중국은 너무멀다고 느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그래서 제목인 <중국행 슬로보트>라고 연계가 된다. 이런 제목을 먼저 정해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는게 가능한건지 놀랍기만 하다. 하루키의 엉뚱한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단편. 이래서 하루키를 끊을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흔히 나오는 실수였다. 잠깐 멍하니 있다가 삐끗한 것이다. 누구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작은 균열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심연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밤바다에 천천히 가라앉는 배를 떠올리게 했다.] P.23






<뉴욕 탄광의 비극> 역시 제목을 먼저 정하고, 내용을 써내려간 작품이라는데, 이 작품은 반대로제목이랑 내용이 전혀 연관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태풍이 올때마다 동물원을 찾는 친구, 그리고 그런 특이한(?) 친구에게서 나는 장례식이 있을때마다 검정 정장을 빌려입는다. 더 특이한건 친구는 검정 정장을 사고 난 후에는 장례식이 한번도 없었는데, 나는 연이어서 장례식에 가게 되고 그때마다 옷을 빌린다.

[˝번번이 미안해. 사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영 손이 안 나가더라고. 상복을 사면 왠지 누군가가 죽는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신경쓸 거 없어. 어차피 나는 입지도 않는데 뭘. 옷도 무의미하게 걸려 있는 것보단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는 편을 좋아할 거야. 이 양복을 맞춘 후로 한 사람도 죽지 않았어.˝

˝원래 그런 거야.˝ 나는 말했다.] P.91



내가 검정 정장을 사게 되면 주변사람들이 더이상 죽지 않게 되는걸까? 그리고 검정 정장을 산다는건 누군가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는 의식인걸까? 갑자기 20대때 정말 좋아했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장례식에 가기 위해 검정 정장을 샀던 기억이 난다. 아직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바꿔 말하면, 모자에서 튀어나오건 보리밭에서 튀어나오건 토끼는 토끼일 뿐이다. 달궈진 아궁이는 달궈진 아궁이일 뿐이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일 뿐이다.] P.93





반대로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내용을 먼저 쓰고 제목은 늦게 지은 작품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여자친구와 함께 오기 위해 비수기의 호텔을 잡았지만 출발 직전에 여자친구랑 싸워서 혼자 호텔에 가게 되고, 도착한 호텔에 있는 나흘 내내 비가 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런데 그 호텔에서 나는 혼자 온 한 젊은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녀를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았었다는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는 그녀가 어린시절 파묻었던 작은 개에 대한, 그녀가 오랫동안 숨겨왔던 또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하루키의 또다른 상징인 양사나이가 나오는 이야기다. 양사나이 하면 <양을 쫓는 모험> 이나 <댄스,댄스,댄스> 가 떠오르는데, 거의 시초인 작품이다. 도대체 양사나이 같은걸 소재로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다소 어처구니가 없지만 하루키니까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중국행 슬로보트>에는 총 7개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다 좋았다. 하루키 단편집을 읽다보면 안좋은 작품도 간혹 섞여있는데 여기에는 없다. 하루키의 초기 3부작 느낌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역시 하루키는 봄에 읽어도 좋고 여름에 읽어도 좋고 가을에 읽어도 좋고 겨울에 읽으면 더좋다.




Ps. 이 책에서 이 문장을 읽고 빵 터졌다.

[˝난 신청곡이라는 거 싫더라. 어쩐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처럼 시작하는 순간 벌써 끝날때를 생각하게 돼.˝]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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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3-02-05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밥 같은 소설같아요.
산해진미 다 갖다놔도
그리운건 단촐한 집밥이니까~!
신청곡 문장 저도 밑줄 좍~~~!!

새파랑 2023-02-05 15:36   좋아요 1 | URL
집밥같은 소설 맞는거 같아요 ㅋ 너무 익숙한데 너무 좋습니다 ~!!

미미 2023-02-05 14: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에 읽기 좋은 하루키군요^^*

새파랑 2023-02-05 15:37   좋아요 1 | URL
미미님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지 않나요? 프루스트라고 ~!! 방금 존버거의 <결혼식 가는길>을 읽었는데 완전 대박 좋네요 ^^

페넬로페 2023-02-05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하루키는 다작 작가이군요.
이 제목은 처음 들어봐요~~
사계절의 사나이, 하루키네요^^

새파랑 2023-02-05 18:20   좋아요 1 | URL
도선생님보다 하루키가 더 책을 많이쓴거 같아요. 느낌적인 느낌입니다 ㅋ

그레이스 2023-02-06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리뷰하셨네요
위에서 댓글 달고 왔는데,
중국행슬로보트 좋은 느낌이었어요
여기서 다시 보니 재독하고 싶네요^^

새파랑 2023-02-06 11:56   좋아요 1 | URL
하루키는 이제 재독 삼독이 익숙한거 같아요 ㅜㅜ 언제 신작이 나올련지 ㅜㅜ

그렇게혜윰 2023-02-06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었는데 갑자기 중국행슬로보트 마니아가 되었다기에 누가 리뷰를 썼나보다 했는데 새파랑님이셨네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3-02-06 11:56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전 요새 알람이 안와서 몰랐었는데 ㅋ 이번달에도 하루카는 읽으려고 합니다~!!

희선 2023-03-09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안 읽어봤어요 예전에 좀 보다가 안 본 적 있어서... 읽었다고 해도 잘 못 보기도 했네요 일본에서 다음달에 하루키 소설 나온답니다 곧 한국에도 나오겠지요 새파랑 님 축하합니다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서니데이 2023-03-1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