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강추할만한 작품인것 같다. 대만족중~!!

나는 1880년 가을 어느 화요일, 샌프란시스코의 외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났다. - P11
나는 내 출생에 얽힌 세세한 내용들을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몰랐더라면 험난한 망각 속에서 영원히 해맸을 테니 더 나빴을 것이다. - P12
"내전으로 나라가 피를 흘리는데 칼리굴라의 침대나 산다고 하더군. 물론 그는 그 일은 일체 부정했지.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부정을 그대로 수긍하지는 않는단다. 설사 현장에서 들키더라도 말이야." - P15
그 후 놉 힐의 새 저택으로 이사한 것을 구실로 파울리나는 끝내 자기 방에서 제일 반대쪽 끝에다 남편의 방을 정해 주고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갔다. 자기 몸에 대한 불쾌감이 남편에 대한 욕망을 능가하고 만 것이다. 턱살에 가려 목선은 사라지고 가슴과 배는 주교님처럼 되어버렸다. 다리는 채 몇 분도 몸을 지탱해 주지 못했고 혼자서는 옷을 입지도 구두를 신지도 못했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실크 옷에 눈부신 보석들을 달고 있어서 구경거리를 연출했다. 살이 겹치는 곳의 땀 냄새가 제일 골칫거리여서 악취가 나느냐고 자주 귓속말로 내게 묻곤 했다. - P23
"죽는다는 거……… 그러니까……… 그건 빨리 끝나고 품위가 지켜지는 일일까? 죽음이 다가온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피를 토하게 됩니다, 선장님." 타오치엔은 슬프게 말했다. - P30
"여기가 소머스 부인의 찻집이란다. 이 근방에서 하나뿐인 찻집이지. 커피는 어디서든 마실 수 있지만 차는 여기서 마셔야해. 미국인들은 독립 전쟁 때부터 이 밍밍한 음료를 정말싫어 했어. 보스턴에서 반란군이 홍차 나무를 불태우는 바람에 전쟁이 시작됐거든." "그렇지만 벌써 백 년도 더 된 일이잖아요." "그래, 세베로, 그러니 애국심이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냐" - P33
"몰락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가난이란 없어 가지지 않은 것도 가진 척 해야 하거든." - P41
"원래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니?" 세베로는 귓불이 발개져서 부정하려 들었지만 고모는 거짓말을 꾸며 낼 틈도 주지 않았다. "나도 그랬거든, 얘야. 어쨌든 할아버지가 뭐라고 쓰셨는지 알아야 답장을 할 게 아니냐." "저를 군사 학교에 보내거나 어디서든 전쟁이 나면 보내라고요." - P47
"고모님께 진 빚 평생 잊지 않겠어요." 세베로가 감동해서 말했다.ㅇ"그래야지. 잊지 않도록 하렴. 인생은 길고 긴 것, 언제 내가 네 도움을 청할지 누가 알겠니." - P48
"죽는다는 거, 황홀하지 않니? 살인은 굉장한 모험이고 자살은 실용적인 해결책이란 말씀이야. 나는 이 두 가지 생각과 게임을 벌이는 거야.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있어, 안 그래? 내 생각을 얘기하자면 말이지. 세베로, 나는 그냥 늙어서 죽을 생각은 없어. 옷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내 생을 끝내고 싶어. 그래서 연습 삼아 범죄 사건들을 공부하는 거야." - P65
자신을 그렇게 철저히 무시한다는 사실에 놀라서 그의 주의를 끌어 보려고 넘어지는 척했다. 여러 개의 손이 잽싸게 달려와 그녀를 잡아 주었지만 창문 옆에 서 있던 그 댄디의 손은 예외였다. 그 남자는 그녀가 가구의 일부라도 되는 듯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자 린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몇 년 동안 연애 소설들에서 예고되었던 바로 그 남자이고 자기 운명의 연인이라고 정해 버렸다. 병풍 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젖꼭지가 돌처럼 딱딱하게굳었다. - P90
1단계는 혼자서 ‘가르소니에르‘에 찾아오게 해 패거리 앞에 소개한다, 2단계는 자기들 앞에서 누드모델이 되도록 설득한다. 그리고 3단계는 그녀와 함께 잔다. 마티아스는 그걸 한 달 안에 모두 끝내겠다고 했다. - P91
내기를 폭로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세베로 자신이 린에게 빠져 있는 것과 똑같은 그 아찔한 감정으로 그녀가 마티아스에게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 P95
타오 치엔이 딸에 대한 연민을 가족의 명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자신도 그래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의무는 린을 보호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날 찻집에서 엘리사는 세베로 델 바예에게 다정한 어조로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 P106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게 아니야, 린,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애정으로도 충분해." 세베로는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태도로 말했다. "아기에겐 아빠가 필요해. 내게 두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줘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애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을 약속할게." " - P116
세베로는 대지 깊은 곳에서 긴 비명이 솟구쳐 발부터 입까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울음이 안으로부터 물밀듯 밀려와 온몸을 휘감고 머릿속에서 소리 없는 폭발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소리 없이 린을 부르면서 하염없이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함께할 수 있기를 몇 년 동안이나 꿈꿔 왔는데 이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돌연 그녀를 앗아간 운명이 믿기지 않았다. - P126
세베로는 뱃머리에 앉아 끝없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린을 잃은 상실감을 결코 달랠 수 없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 없이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미래가 자신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은 전쟁에서 죽는 것이었다. 금방그리고 신속하게 죽는 것, 원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 P143
"죽이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아요. 살아남는 게 더 힘들답니다. 방심하면 죽음이 당신을 배신하고 데려갈 거예요." - P164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언제나 진실이 가장 쉽게 이해되는 법이니까요." - P181
어쩌다 타오 할아버지와 엘리사 할머니가 생각나 울던 일은 없어졌지만 설명하기 힘든 악몽들이 규칙적으로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내 기억 속에는 새까만 공백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뭐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늘상 존재하는 위험스러운 것이었고,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미지의 것이었다. 어두운 곳이나 군중 속에 있을 때면 더 심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걸 견딜 수 없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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