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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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133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제가 순수하게 저절로 생겨난 사랑, 불쌍하고 애처로운 무고한 사랑을 억눌러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랑을 그렇게 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이 말을 제일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아니 오히려 조금 늦게 만났더라면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지 않았을까?



도쿄역에서 22살의 유학생 놉펀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끼라띠는 처음 만난다. 그녀는 놉펀의 아버지의 친구인 아티깐버디 공의 아내였는데, 부부는 태국에서 도쿄로 신혼여행 중이었다.놉펀은 왜 젊은 그녀가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했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다. (실제 나이는 서른 다섯살이었다...)

[한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와 착 달라붙은 첫날의 일들과 여러 감정은 내 기억에서 잊힐 날 없이 살아 있을 것이다. 자그마한 하얀 꽃송이가 있는 남색 복장에 흰 모자, 그리고 하얀 신발은 내 마음에 들어와 아로새겨진 숙녀의 첫 옷차림이었다. 내가 우아하고 매우 품위 있다고 느낀 차림이다.] P.18



끼라띠 역시 나이 많은 남편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놉펀에게서 느끼고,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놉펀과 친하게 지낸다.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건 간에 나는 모두 좋아해. 하지만 바로 그거야. 나는 아름다움을 보는 경향이 있어. 거의 모든 것은 관찰할 만하고 구경할 만해. 예컨대 이 호숫가의 잔물결이 이는 수면 역시 나에게는 흥미로워. 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해.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결점과 시듦이 없는 상쾌한 감정을 발생시키기 때문이지.˝] P.47



처음에는 그저 동경이었겠지만, 먼저 사랑을 느끼고 다가간건 놉펀이었다. 그는 유학생 신분에 중산층 출신이었고, 그녀는 왕족 혈통에 이제 막 결혼을 한 유부녀 였지만 놉펀은 물러서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어떤 감정이 나의 행복을 방해했다. 그것은 시시각각 가장 강렬한 무엇인가가 일어날 거라는 두려움으로 내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두려움이 가슴속을 오르내렸다. 나는 그걸 꽉 눌러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상당히 힘에 부쳤다. 그것을 완전히 막기는 어려웠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나는 지쳤고 피곤했고 행복했다.] P.77



하지만 끼라띠는 이를 거부한다. 그저 친하게 지낼 뿐 사랑은 아니라고 하며, 놉펀은 아직 어려서 모른다고, 이 모든건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될거라고, 유학생인 니가 졸업해서 고국으로 돌아와 성공적인 삶을 살길 바란다고 말할 뿐이었다.

[˝내 좋은 사람이여. 마지막으로 내 조언을 받아들이길 바라. 자네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업을 위해 조국을 떠나 일본에 왔어. 자네의 목표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하고 견고하게 잡고 있어야 하네. 지난 두 달 동안 자네와 나 사이의 관계는 잊어버리게. 그건 꿈이라고 생각하게.˝] P.111



몇달이 흘러 끼라따는 남편과 함께 태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놉펀은 다시 한번 열렬한 자신의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만, 돌아오는건 놉펀과 다소 거리를 둔 그녀의 답장이었다. 결국 놉펀은 뜨거웠던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업에 매진하고, 성공적으로 졸업하여 고국으로 돌아간다.

[나에 대한 강렬한 감정은 적당한 때가 되면 점차 사라져 갈 것이고, 결국 나는 자네 인생에서 중요한 무엇이 아니게 될 거야. 그러면 족쇄 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의 감정과 행복이 예전처럼 놉편의 마음으로 돌아올거야. 나는 그 시간을 기도하며 기다려.] P. 124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건지, 놉펀의 마음은 이제 식었는데, 끼라띠는 그게 아니었고, 오히려 마음속에서 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 도쿄에서 만났을때는 자신의 신분때문에, 이제 막 결혼했기 때문에, 상대방의 미래를 걱정했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을뿐이었던 것이다. 이제 남편도 죽고(?) 혼자가 된 끼라띠는 놉펀이 돌아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스스로에게 이상함을 금할 수 없어. 왜냐하면 지나온 시간에 내 행복을 이루었던 중요한 부분은 나에게 일어난 실제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어떤 것에 대한 희망 또는 기대였기 때문이지. 지금에 와서도 내 삶은 아직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네. 진정한 행복은 여전히 앞날에 표류하고 있어.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고 희망하지. 그리고 기다리고 있어.˝] P.151



끼라띠는 놉펀에게 있어서 도쿄의 일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아있음을 알게 되고, 게다가 약혼녀도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사랑의 고통은 끼라띠가 느끼게 된다. 과연 두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자네의 사랑은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죽었지.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의 것은 죽어 가는 몸에서 여전히 자라나고 있어.˝] P 171





개인적으로는 도쿄에서 끼라띠의 태도 그리고 편지에 쓴 내용이 아쉬웠다. 끼라띠의 신분과 상황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하더라도 본인 역시 마음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기대가 있었다면, 놉펀이 포기하지 않도록 여지를 남겨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아직 22살밖에 안된 놉펀이 숨겨진 끼라띠의 마음을 안다는건, 알아주길 바라는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놉펀의 영원할수 없었던 마음도, 끼라띠의 숨겨야 했었던 마음도 다 이해는 된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왜 사랑 앞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온전히 드러낼수는 없는 걸까? 그렇게 뜨거웠던 마음은 시간앞에서 식어버릴 수 밖에 없는걸까? 그냥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서 도망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완전 막장이구나...)



약간 뻔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나름 좋았다. 이국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깔끔한 번역도 그렇고 작품자체가 재미있었다. 책을 읽는 중간에 혹시 끼라띠가 놉펀과의 사랑을 위해 남편을 독살(?)하는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도 해봤는데, 그런 쇼킹한 이야기 없이 전형적으로 흘러갔다. 뭔가 특별한게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은 만족하실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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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1-16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때가 좀 안 맞았네요 생각해 보면 그때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혼하고 가고 놉펀은 공부하러 간 거니... 놉펀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저 한때 좋아한 사람이 있었지 할 수밖에 없을지도...


희선

새파랑 2022-11-16 07:13   좋아요 1 | URL
때가 맞아서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도 결국은 많은 차이 때문에 불행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ㅋ

잠자냥 2022-11-16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독살 반전! ㅋㅋㅋ 진짜 갑자기 스릴러물 될 뻔 ㅎㅎㅎ

새파랑 2022-11-16 09:59   좋아요 1 | URL
그랬으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ㅋ 그러면 레베카급이었을듯 합니다 ~!

scott 2022-11-1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의 사랑이 끝났을때 당신의 사랑은 시작했다 <그림의 이면>]
요문구는 출판사에서 광고 띄지에 새겨 넣어야 함요 ^^

새파랑 2022-11-16 11:53   좋아요 1 | URL
앗 안됩니다 ㅋ <헤어질 결심> 표절입니다 😅

프레이야 2022-11-16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 이 책이 올해 133째인거죠^^
참 다양하게 많이 읽으십니다 :)

새파랑 2022-11-16 13:05   좋아요 2 | URL
읽은책의 97퍼센트가 소설인거 같습니다 😅 150권이 목표입니다~!!

페넬로페 2022-11-16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정말 타이밍이 100퍼 입니다.
새파랑님!
소설 많이 읽으셔서 이제 소설가로 데뷔할 타이밍 같습니다~~

새파랑 2022-11-16 16:18   좋아요 1 | URL
저같은 초딩 실력으로는 소설은 불가합니다 ㅋ 전 그냥 독후감 쓰는데 만족합니다 ^^ 전 좋아하는건 취미로만~!!

서니데이 2022-11-16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이름이 낯설었는데, 태국 작가인가요.
도쿄를 배경으로 태국 주인공이 등장한다니, 낯선 세계 더 낯선 사람들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새파랑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11-16 18:45   좋아요 1 | URL
저도 태국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봤네요 ㅋ 우리나라랑 정서적으로 약간 비슷한 면이 있는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2-11-16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은 역시 독살 반전이 매력 아닐까요? ㅎㅎ

새파랑 2022-11-18 06:28   좋아요 0 | URL
그런 반전 매력이 없고, 사랑 이야기이다보니 바람돌이님은 이 책 별로이실거 같아요 ^^

서니데이 2022-12-08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새파랑 2022-12-08 20:46   좋아요 1 | URL
와우 벌써 결과가 나왔군요~!! 서니데이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