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126

˝삶이 그렇게 동요할 때마다 끝에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자유, 정신, 깊이 같은 것이었고, 또한 고독,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냉정함 같은 것이었다.˝


작가의 이름만 봐도 믿음이 가는 작가가 있다. 헤르만 헤세는 나에게 있어서 그런 작가다. 내가 그의 작품을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렇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는 너무 유명해서 제외하더라도, <싯다르타>, <크눌프>, <클링조어> 이 세 작품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들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들 중 하나였다.


이번에 읽은 <황야의 이리>도 정말 좋았다. 아주아주 좋았다. 하지만 만약 이 책에 감동이 있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고, 추천해주고 싶냐고 물어보면 아리라고 답할 것이다. 일단 작품 자체가 정말 어려웠다...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아주 사랑하게 됐다고 답할 것이다.



이 작품을 간략히 설명해보자면, <황야의 이리>는 <편집자 서문>, <하리 할러의 수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편집자 서문>은 이 책의 서문격으로, 하러 할러의 이웃에 사는 남자(이하 이웃남자)가 그를 관찰한 내용과 그의 수기를 입수해서 펴낸 과정을 담고있다. 이웃남자가 보기에 하리 할러는 인상부터 평범하지 않은 남자였다. 이웃남자는 처음에는 그를 멀리하였으나, 점점 그에게 끌리게 된다. 무엇때문에 끌렸던걸까?

[그는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 무한하고 무서운 천재적인 고통의 능력을 내면에서 길러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그의 이러한 염세주의의 토대는 세상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자기 경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가 어떤 제도나 인물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할 때에도 항상 자기 자신을 제외시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겨누는 화살의 첫번째 대상은 항상 그 자신이었고, 그가 미워하고 부정하는 첫번째 인물도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P.20



점점 그와 가까워지는 듯 했으나, 어느날 갑자기 하러 할리는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웃남자에게 한권의 수기를 남긴다. 그리고 이어서 <하리 할러의 수기> 내용이 펼쳐진다.

[곧 내 머릿속에서도 이 사내를 황야의 이리로만 부르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들 사이에서, 도시 한가운데에서, 군중들 속에서 길을 잃은 한 마리 이리 - 다른 어떤 이미지도 그를, 그의 내향성과 고독, 야생성, 불안, 향수, 고향 상실을 더 잘 표현해 낼 수는 없으리라.]  P.29




<하리 할러의 수기>의 첫 문장은 ‘미친 사람만 볼 것‘으로 시작한다. 그랬었다. 이 수기는 병적이면서도 아름답고 깊은 성찰이 담긴 환성적인 글이었고, 한 인간의 괴팍한 성격뿐만 아니라 한 세대의 고뇌를 담고 있는 수기였다.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갔다. 술잔은 비었고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쉽단 말인가? 그래서 아쉬운 건 아니다. 지나가 버린 건 하나도 아쉽지 않다. 아쉬운 건 지금과 오늘이고, 그저 고통만을 주었을 뿐 아무런 기쁨도 감동도 주지 않은 이 잃어버린 무수한 시간과 나날들이다.]  P.43



50살의 지식인 하리 할러는 겉으로는 지적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거친 본능의 이리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를 단지 두가지 모습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이 두가지 모습은 단지 대표적인 모습일 뿐, 하리 할러는 두가지 이상의 다양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 결코 화해할수도 타협할수도 없는 복잡한 인간.

[뒤로 돌아갈 길은 없다. 이리로 돌아갈 수도,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도 없다. 창조된 모든 것은 가장 단순해 보이는 것마저도 순수하지 못하고 뿔뿔이 분열되어 있으며, 생성이라는 더러운 물결에 던져져 결코 그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갈 수 없다. 창조되기 이전의 순수 상태로, 신에게로 이르는 길은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리나 어린아이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죄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즉 점점 더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P.90



정신분열적인 그의 모습은 대단히 위태로워 보인다. 그는 왜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된 걸까? 이유는 당시 독일 사회의 비합리적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군국주의와 증오가 가득했었고, 하리 할러는 이러한 독일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하지만 그의 글 때문에 그는 조국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지식인으로서의 분노와 무력함때문에 그는 황야의 이리가 되어 시대의 자살자가 된다.

[이 모든 고통, 이 모든 터무니없는 고난, 자아의 천박함과 무가치에 대한 이 모든 자각, 패배에 대한 이 모든불안과 죽음에 대한 이 모든 공포―이 많은 괴로움을 반복하느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는 편이 더 현명하고 간단하지 않을까?]  P.97



자살을 계획하던 그는 어느 주점에서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여성 헤르미네를 만나게 되고, 이때부터 그는 현실과 몽상을 오가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꿈에서는 괴테와 모짜르트를 만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미친 사람만 입장이 가능한 가장무도회에 가서 환각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점점 정신분열이 심해진 하리 할러는 자신의 분신인 헤르미네를 칼로 찌른다. 그런데 뭔가 현실적이라는기분이 들지않는다.이건 환상인걸까?

[당신은 이제 이 다른 세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당신이 찾는 것은 당신 자신의 정신 세계라는 것도 아십니다. 당신이 동경하는 저 다른 현실은 오직 당신 자신의 내면에만 있습니다. 나는 당신 속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열어드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의 영혼의 화랑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건 기회와 자극과 열쇠일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드릴 뿐입니다.]  P.248



어쩌면 헤르미네 역시 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이리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구분할 수 없는 현실과 망상.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다보니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없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 <황야의 이리> 리뷰를 어거지로 쓰긴 했는데, 내가 쓴건데도 뭔말인지 모르겠다  ㅋ 대단히 몽환적이면서도 난해한 작품이었다. 10퍼센트도 이해를 못한것 같다. 그럼에도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인것만은 확실하다. <황야의 이리>가 ‘히피의 성경‘이었다고 해설에 쓰여있는데 완전 공감된다.

아직 못읽은 헤세 작품들도 빨리 만나보고 싶다.



Ps.  <황야의 이리>는 <싯다르타>의 매운맛 버젼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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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1-01 23:5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감동은 없고 추천할순 없지만 아주 사랑하게 된 책이라니요. 이건 완전 무조건적인 찐 사랑아닌가요 새파랑님 ㅎㅎ 저는 앞페이지 몇 장 읽다가 어려워서 덮었던 기억납니다 ~~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 ~

새파랑 2022-11-02 07:18   좋아요 4 | URL
어려워도 왠지 좋은 느낌? ㅋ 정말 난해했습니다만 뒤로 갈수록 흥미롭더라구요~ 밑줄도 못그었습니다 ㅋ

scott 2022-11-02 00: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초딩때 수레바퀴 아래서 읽고
중딩때 싯다르타를 읽고
헤세를 머얼리 했습니다

헤세 작품중 데미안을 가장 마지막(고딩 시절)에 읽었는데

헤세 작품이 항상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는 건

아주 많은 한쿡인들이 좋아 하고 즐겨 읽고 있는 다는 거겠죠 !ㅎㅎ


새파랑 2022-11-02 07:20   좋아요 4 | URL
역시 학창시절부터 스콧님은 대단! ㅋ 저도 찐 한국인인거 같습니다. 헤세 작품은 그냥 애정이 갑니다 ^^

서곡 2022-11-02 12:21   좋아요 2 | URL
저는 어쩌다 우연히 싯다르타를 가장 먼저 어릴 때 읽었고요 그담이 수레바퀴 그담이 데미안이었네요

새파랑 2022-11-02 12:54   좋아요 2 | URL
전 대학교때 데미안 읽고, 아 아니다 하고 헤세는 접었었는데, 성인이 되고 다시 읽으니 좋더라구요~!!

페넬로페 2022-11-02 0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르만 헤세 작품인데 제목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져요~~약간 서부영화 느낌이 나서 ㅎㅎ
작품이 어려워도 새파랑님이 사랑하게 된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새파랑 2022-11-02 07:21   좋아요 4 | URL
그죠? 뭔가 서부영화 총잡이가 나올거 같은 제목? 왠지 유치(?)하게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읽어보면 왜 이 제목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더라구요 ㅋ

거리의화가 2022-11-02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려운데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뭔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측면 때문인 것도 같아요ㅎㅎㅎ 헤세 작품이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작품을 읽기에는 난해하고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데미안도 한번으로는 이해가 잘 안됐어요^^; 소개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1-02 12:14   좋아요 3 | URL
어렵긴 한데 가독성이 좋아서 금방 읽어지더라구요 ㅋ 책속에 숨어있는 의미가 많아서 어려웠지만 대신 흥미롭더라구요 ㅋ

전 데미안도 어렵지만 좋았었습니다~!!

서곡 2022-11-02 11: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아하는 작품입니다 ~~

서곡 2022-11-02 11:25   좋아요 3 | URL
이거 읽고 나서 친구에게 좋다고 했더니 헤세는 어릴 때 읽고 더 이상 안 읽는다 해서 황야의이리는 어른용이라고 설명해야 했죠 ㅎ

새파랑 2022-11-02 12:15   좋아요 4 | URL
어른용이 맞는거 같습니다~!! 책좋아하는 분들은 이 책 좋아하실거 같아요. 최상위 수학문제 푸는 기분? 😆

서곡 2022-11-02 12: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만큼 마니 읽거나 사랑하는 정도는 못되고 황야의이리랑 요양객은 어른 되고 나서 새로운 마음으로 잘 읽은 작품들입니다

새파랑 2022-11-02 12:52   좋아요 3 | URL
저는 헤세 작품읽은게 저 여섯 작품이 다입니다 😅 서곡님이 저보다 훨씬 많이 읽으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역시 책은 읽는 시기가 중요한거 같아요~!!

서곡 2022-11-02 12:57   좋아요 2 | URL
헐 아닙니다 ㄷㄷㄷ 저도 대여섯? 정도 밖에 안 읽었습니다 그리고 권수와 애정이 비례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꽈아

Yeagene 2022-11-02 14: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까지만 헤세 작품읽고 오랫동안 읽지 않았네요 ㅎㅎ새파랑님 어렵지만 사랑하는 작품이라니 궁금합니다♡

새파랑 2022-11-03 10:05   좋아요 3 | URL
헤세는 젊었을때 많이 읽고 이후에는 안읽는게 트렌드군요~! 전 거꾸로 ^^ 강추는 못하지만 좋습니다~!!

alummii 2022-11-03 08: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세는 이제 황야의 이리 읽을 차례에요~~ ^^ 최상위 수학이라니 수포자로서 도전의지가 더 뿜뿜 생기네요 ^^ㅋㅋ 새파랑님 이게 어거지 리뷰라니요 ~~~그럼 전 아마 거지 리뷰 쓰게될듯요 ㅋㅋㅋㅋ 😆

새파랑 2022-11-03 10:06   좋아요 4 | URL
앗 거지 리뷰 ㅋ 전혀 아니십니다~!! 저는 나르치스를 읽고나서 유리알 유희를 읽으려고 합니다 ^^

그레이스 2022-11-03 08: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데미안 보다 수레바퀴아래서가 더 좋았던것 같아요
넘 오래되서 다시 읽어야할 작가!

새파랑 2022-11-03 10:07   좋아요 5 | URL
전 싯다르타가 가장 좋았었습니다 ^^ 갑자기 싯다르타를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coolcat329 2022-11-03 08: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운데 애정이 가는 작품이 진짜 멋진 작품 같아요. 저 작년 여름에 헤세의 사상이 집대성 되었다는 <유리알 유희>를 더운 여름에 읽다가 혼자 고생했는데, 이 작품도 만만치 않군요. 그 책도 앞에 서문이 한 50페이지 있는데 그 부분이 참 안 읽히더라구요. 근데 <황야의 이리>에도 서문이 나온다니 ㅎㅎ 늘 읽고 싶던 작품들이었는데 새파랑님 글 읽으니 더 읽고 싶어졌습니다.

새파랑 2022-11-03 10:08   좋아요 4 | URL
쿨캣님이라면 황야의 이리야 그냥 뚝딱 읽으실거 같습니다 ^^ 유리알 유희도 어렵나 보네요 ㅋ 아직 장바구니에만 담아두고 구매는 못했습니다~!!

레삭매냐 2022-11-03 1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황야의 이리> 을유문화사 버전
이 저는 개인적으로 땡기네요.

민음사 책들은 표지가 참...

매운 맛 버전 !!!

coolcat329 2022-11-03 18:43   좋아요 3 | URL
저두 을유가 땡깁니다~^^

새파랑 2022-11-03 19:10   좋아요 2 | URL
을유버젼은 늙대 한마리 사진 있는거 맞죠? 저는 민음사 버젼이 더 좋은거 같습니다. 책꽂이 꽂기에도 좋고 ^^

희선 2022-11-06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책이군요 새파랑 님 글을 보다보니 하리 할러가 헤르만 헤세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소설에 작가가 담기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예전에는 그런 거 거의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보이기도 하네요


희선

새파랑 2022-11-06 16:22   좋아요 1 | URL
하리 할러랑 헤르만 헤세랑 약칭이 똑같습니다 ㅋ 실제로 자전전인 이야기라고 하더라구요. 게다가 여책의 여주인공 이름은 헤르미네 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