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이다. 정말 재미있고, 몰입해서 읽었고, 글이 세련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나오미‘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참 예쁜 이름이구나, ‘NAOMI‘라고 쓰면 서양 사람 같다고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고, 그때부터 차츰‘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름이 하이칼라면 얼굴 모습도 어딘가 서양 사람 냄새를 풍기고 아주 영리해 보여서, ‘이런 곳의 여급으로 놔두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P5

나오미 같은 소녀를 집에 데려와 그 성장하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본 뒤, 마음에 들면 아내로 맞아들이는 방법이 가장 좋다. 어쨌든 나는 부잣집 딸이나 교육을 받은 훌륭한 여자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 P14

"나오미야 배안고파?" 하고 물으면, "아뇨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할 때도 있지만, 배가 고플 때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양식이면 양식, 국수면 국수라고 먹고 싶은 것을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 P16

"그럼 나오미는 무슨 꽃이 제일 좋아?" 하고 언젠가 물어봤더니,‘"난 튤립이 제일 좋아요" 하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 P25

나오미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과 ‘인형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 이 두 가지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그녀의 사랑에 현혹되어 눈이 어두워져 있던 나는 그렇게 뻔한 이치조차 전혀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P60

나는 지금도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떠올리며, 모든 학생들과 함께 낄낄대고 웃었던 내 모습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이제 와서는 웃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이유로 로마의 영웅이 바보가 되었는지, 안토니우스쯤 되는 자가 무엇 때문에 요부의 농간에 칠칠치 못하게 휘말려들었는지, 그 마음을 이제 와서는 확실히 납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동정마저 금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 P75

흔히 세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속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처음부터 ‘속이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남자가 자진해서 ‘속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떤‘여자에게 반해버리면 그 여자가 하는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남자 귀에는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게 들립니다. - P75

나는 생각합니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한테 정복당한 것도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해서 차츰 저항력을 빼앗기고‘구슬림에 넘어가고 말았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 결과 이번에는 이쪽이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쉽사리 여자의 우월감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재앙이 거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 P80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는 일품요리인 비프스테이크로 만족했던 나오미가 어느새 점점 입이 고급스러워져서, 하루 세끼 식사할 때마다 "이런 게 먹고 싶다" "저런 게 먹고 싶다"고 나이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말을 합니다. 게다가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하는 귀찮은 일은 싫어하기 때문에, 대개는 가까운 식당에 주문을 합니다. - P106

도대체 나는 이 여자의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까지 반해버렸을까? 저 코일까? 저 눈일까?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열거하자, 이상하게도 언제나 나한테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얼굴이 오늘 밤에는 참으로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내 기억의 밑바닥에는 이 여자를 처음 만났을 무렵 그 다이아몬드 카페 시절의 나오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 시절이 훨씬 좋았어. 천진하고 귀엽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데가 있고, 이렇게 거칠고 건방진 여자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여자였지. 나는 그 무렵의 나오미에게 반했기 때문에, 그 타성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겠지만, 생각해보면 모르는 사이에 이 여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은 계집이 되어버렸어. - P149

나오미가 굉장한 핫텐카라고? 학생들을 가지고 논다고? ......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도 있겠지.‘분명히 있을 수 있어. 요즘 나오미의 태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게이상할 정도야. 실은 나도 내심 걱정하고는 있었지만, 그녀 주위에 남자친구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던것이다. 나오미는 어린애다. 그리고 활발하다. "난 남자야" 하고 그녀 자신이 말하는 대로다. 그래서 남자들을 잔뜩 모아놓고 천진하게, 떠들썩하게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설령 그녀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눈이 있으면 남몰래 딴 짓을 할 수는 없을 테고, 설마 나오미가… 하고 생각한 이 ‘설마‘가 잘못이었던 것이다. - P169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게 분명해지면, 나는‘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 그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녀가 타락한 죄의 절반은 물론 나한테도 있으니까, 나오미가 순순히 잘못을뉘우치고 사과만 해준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나무라고 싶지도 않고, 또 나무랄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고집이 세고 특히 나에 대해서는 한층 더 강경해지고 싶어 하는 그녀가 설령 증거를 들이댄다 해도 그렇게 호락호락 나에게 고개를 숙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P171

나를 만만하게 얕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이 서로 오기를 부리다가 헤어지게 되면? 그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녀의 정조 자체보다 이쪽이 훨씬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녀의 잘못을 밝혀내고 또는 감독한다 해도, 그때에 대처할 내 생각을 미리 결정해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녀가 "그럼 나는 나가겠어요" 하고 말했을 때, "마음대로 나가버려"하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모르지만. - P172

"그건 그 비오는 밤에 여기서 여럿이 뒤섞여 잔 적이 있었지요. 그날 밤에 눈치챘습니다. 그날 밤 나는 정말 당신을 동정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뻔뻔스러운 태도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여겨졌으니까요. 나는 질투를 느끼면 느낄수록 당신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 P216

그녀의 살‘이라는 귀중한 성지에는 두 도둑놈의 진흙투성이 발자국이 영원히 찍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나오미가 미운 게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 P229

그렇다면 왜 이런 부정하고 더럽혀진 여자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가 하면, 그녀가 가진 육체의 매력, 오직 거기에만 질질 끌려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나오미의 타락인 동시에 나의 타락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로서의 절조와 결벽과 순정을 버리고, 지난날의 자존심도 내팽개쳐버린 채, 창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굴복하면서도 그것을 수치라고도 생각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때로는 마땅히 경멸해야 할 그 창녀의 모습을 마치 여신이라도 우러러보듯 숭배하기까지 했으니까요. - P232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랫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떠날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인사는 지극히 담담한 것이었습니다. - P242

불과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녀를 그렇게 귀찮게 여기고 그녀의 존재를 저주했던 내가 지금은 반대로 나 자신을 저주하고 그 경솔함을 후회하게 되다니? 그렇게 미웠던 여자가 이렇게 그리워지다니? 이 급격한 마음의 변화는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고, 아마 사랑의 신만이 알고 있는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나는 어느새 일어나서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어떻게 하면이 연모의 정을 달랠 수 있을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을 달랠 길은 보이지 않고, 그저 그녀가 아름다웠던 일만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5년동안 계속된 동거생활의 장면들이 되살아나, 아, 그때는 이런 얘기를 했지, 그런 표정을 지었지, 그런 눈을 했지 하는 식으로 계속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데, 그 가운데 미련의 씨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 P246

아아, 나는 도대체 어쩔 셈으로 이런 정밀한 사진을 찍어두었을까요? 이것이 언젠가는 슬픈 추억이 된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P249

"무슨 이유라뇨? 그건 도리를 벗어난 일이니까요.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이젠 나오미 씨를 깨끗이 잊어버리는게 어떻습니까?" - P265

"나오미 씨한테 걸려들면 어떤 남자라도 그렇게 되게 마련입니다."

"그 계집한테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어."

"확실히 그건 마력입니다! 나도 그걸 느꼈기 때문에, 더이상 그 여자한테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가까이 가면 내가 위험하다고 깨달은 겁니다." - P278

그녀의 바람기와 방자함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 결점을 없애버리면 그녀의 가치도 없어져버립니다. 바람기가 있는 계집이다. 제멋대로 하는 방자한 계집이다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귀여워져 그녀의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내면 낼수록 내가 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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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18 07: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이 세련적‘^^ 새파랑님의 강렬한 한줄평! 제목도 단순한듯 강렬해요^^

새파랑 2022-07-18 09:20   좋아요 3 | URL
리뷰를 어제 썼어야 하는데 밑줄을 너무 많이 그어서 옮기다가 지쳐서 일단 오늘로 미뤘습니다 😆 당시 시대를 봤을때는 파격적인거 같아요 ㅋ

yamoo 2022-07-18 08: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이 책 있는데....이 책 시리즈를 처분할가 생각중인데, 생각을 고쳐먹게 만드는 글이네요..^^

새파랑 2022-07-18 09:21   좋아요 3 | URL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저도 이제 네편? 읽었는데 작품마다 편차도 좀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거 같아요 😅
요 책도 호불호가 있더라구요 ㅋ

모나리자 2022-07-18 14: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빨강이 정말 강렬하네요. 너무 예쁜데요.
다니자키 작품을 벌써 네편이나 읽으셨네요. 대단하세요~새파랑님.^^
이번주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 2022-07-18 16:39   좋아요 3 | URL
이제 네편입니다 ^^ 요책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거 같아요~!!

scott 2022-07-18 16: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준이치로옹!
의 섬세함(약간은 변태적인 ㅎㅎㅎ)과 미문이 뛰어나서
영어로 번역되어 영미권 독자들 마음까지 사로 잡았죠 ^^

새파랑 2022-07-18 16:41   좋아요 2 | URL
이 책 재미는 보장인데, 약간 문학사적 가치? 이런건 좀 갸우뚱 하게 되더라구요 ㅋ 그래도 재미있으면 장땡~!!

서니데이 2022-07-18 17: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 그대로 썼다면 ˝치인˝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을 것 같은데, 번역하신 분이 제목을 잘 쓰신 것 같아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유명한 작가라서, 아마 하루키 선생도 다니자키 상을 받았을 거예요.
새파랑님, 더운 하루 시원하게 보내세요.^^

새파랑 2022-07-18 18:58   좋아요 4 | URL
원제가 치인의 사랑이던데, 이 제목도 딱 맞는거 같아요. 만약 제가 출판사였다면 ‘미친(놈)의 사랑‘ 이라 했을거 같아요 😆

미미 2022-07-18 2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저번에 재밌다고 하셔서 리뷰 고대하고 있습니다ㅎㅎ
몰입하셨다니 기대감 상승😄

새파랑 2022-07-19 06:02   좋아요 2 | URL
아 ㅋ 읽고 바로 썼어야 하는데 ~!! 오늘 써야겠어요~!! 어제 일이 있어서 휴업했습니다 😅

mini74 2022-07-19 1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궁금해요 새파랑님 ! 새파랑님의 마성의 100자평 *^^*

새파랑 2022-07-19 10:17   좋아요 2 | URL
오늘 어떻게든 리뷰를 써보겠습니다 ㅋ 안되면 100자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