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87

˝사랑이 눈먼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너한테는 눈먼 상태가 어쩌면 세상을 보는 한 방식인지도 모르겠구나.˝


사링에 빠지는 건 한순간이다. 거기에 어떤 합리적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일단 마음에 들어왔다면, 연이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마지막 작품인 <노르망디의 연>은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이 집결된 사랑의 서사시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핵심은 남여간의 사랑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노르망디이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부모님을 여윈 소년 ˝뤼도 플뢰리˝는 삼촌인 ˝앙브루아즈 플뢰리˝와 함께 사는데, 삼촌의 직업은 우체부이지만, 그 지역에서는 연(Kite)의 장인(또는 미치광이)으로 알려져 있다. 삼촌은 각양각색의 연을 만들어 하늘에 날린다. 삼촌이 연을 통해 날리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미친사람으로 여겼다는 거냐. 생각해보거라. 그 멋진 신사들과 아름다운 숙녀들이 옳아. 한 평생을 연에 바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광기가 있는 게 분명해. 다만 해석이 문제 될 뿐이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숭고한 불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그 둘을 구분 하기가 때론 어렵지. 하지만 네가 정말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너의 전부를 바치거라. 그리고 그 나머지엔 마음 쓰지 마라.]  P.18



그러던 어느날 숲에서 한적하게 낮잠을 자고 있던 ˝뤼도 플뢰리˝는 금발의 한 소녀를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릴리˝로, 폴란드 귀족의 딸이었다. 단 한순간에 사랑에 빠진 ˝뤼도˝, 하지만 첫 만남 이후 ˝릴리˝는 폴란드로 돌아가고, 몇년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다.

[6월 중순에 배가 잔뜩 불러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샛노란 금발의 소녀가 보였다. 그 아이는 나를 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뭇가지 아래엔 응달과 양달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내 눈엔 이 명암의 유희가 릴라 주위에서 한 번도 그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이유도 본질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감동적인 순간에 나는 어떻게 보면 예고를 받은 셈이었다. 본능적으로, 어떤 내적 힘인지 약점인지 모를 뭔가에 이끌려 행동을 했는데, 그것이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이 되리라는 건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였다. 그 엄격한 금발의 환영에게 딸기 한 줌을 내밀었던 것이다.]  P.25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데, 주인공의 혈통인 ˝플뢰리˝ 집안은  대대로 기억력이 엄청 좋아서 과거의 일을 현재처럼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릴리˝를 볼 수 없었지만 ˝뤼도˝는 그녀를 마치 옆에 있는것처럼 느낀다. 매일매일 그의 앞에 찾아오는 그녀, 하지만 실체는 아니다.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그녀. 이것도 병인걸까? 하지만 그런 좋았던 기억을 박제할 수 있다는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나는 공부를 했고, 작업실에서 나의 후견인을 도왔다. 하지만 흰옷 차림으로 손에 밀짚모자를 든 금발의 소녀가 내 곁에 찾아오지 않는 날은 드물었다. 에르비에 선생님이 아주 정확히 말했듯이 이건 분명히 ˝기억력 과잉˝이었다.]  P.27

[내가 ˝나의 귀여운 폴란드 여자˝라고 부르던 그 애를 보지 못한지 거의 4년이나 되었지만 내 기억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그 애는 손을 대보고 싶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아주 섬세했고, 움직일 때마다 조화로운 생동감이 느껴졌다.]  P.32



4년이 지났지만 ˝뤼도˝는 여전히 그리워하며,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숲으로 간다. 그리고 눈을 감고 환상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실제의 ˝릴리˝가 있었다. 믿어지지 않은 일, 하지만 매일매일 그녀를 기억속에서 봤기 때문인지 지금의 재화가 마치 어제 일처럼 낯설지 않았다.

[4년 전부터 나를 기다린 것 같네………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설탕도 잊지 않았네!  /  난 절대 아무것도 잊지 않아. /  나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잊는데 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  P.33



이후 ˝뤼도˝와 ˝릴리˝는 연인이 된다. 꿈 많고 경쾌한 귀족집안의 ˝릴리˝에 반해, 부모 없이 가난하게 자란 ˝뤼도˝는 그녀에게 썩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번 시작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집착에 가까운 ˝뤼도˝에 비해 ˝릴리˝의 사랑은 강도는 약했지만, 그녀 역시 ˝뤼도˝를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의 불균형은 한쪽을 애타게만 할 뿐이다.

[널 사랑해. 하지만 사랑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야. 나는 너의 절반이 되고 싶지 않아. 너, 이 끔찍한 표현 알아? ˝나의 반쪽은 어디에 있나?˝ ˝나의 반쪽을 못 보셨나요?˝. 5년, 10년 뒤 너를 다시 만나게 될 때 나는 심장에 강렬한 충격을 받고 싶어.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너를 보면 심장에 충격을 받을 일은 없을 거야. 벨소리밖에 못 듣겠지….]  P.152



그러던 중 마침내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한다. ˝릴리˝의 집안은 전쟁의 포화속에서 소식이 끊기게 되고, ˝뤼도˝는 그녀의 소식을 여기저기 찾아 해맨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잘 버텨내야만 했고, 릴라도 내게 그러길 요구했다. 내가 포기한다면 절망에 빠질 게 분명했고, 그건 그녀를 잃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P.180



노르망디 역시 독일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되고, ˝뤼도˝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한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는 신성한 일에 몰두하면서도 언젠가는 그녀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과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났을 때는 그시절의 모습과 감정이 남아있을까?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용서하지.]  P.162

[-네가 계속 나를 잊는다면 끝이 될 거야, 뤼도, 끝이라고, 네가 나를 잊을수록 나는 점점 더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고 말 거야.
-난 너를 잊지 않아. 너를 감추는 것뿐이야. 너도, 타드도, 브뤼노도 난 잊지 않아. 너도 알잖아. 독일 군인들에게 자기 삶의 이유를 들킬 때가 아니라는 것. 저들은 그런 걸로 사람들을 총살하고 있어
- 아주 자신만만하고 아주 평온해졌구나. 자주 웃네. 마치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듯이 말이야.
-내가 자신만만하고 평온한 한 너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거야.
- 네가 뭘 알아? 그리고 내가 죽었다면 어쩔 거야?]  P.270





로맹 가리의 <노르망디의 연>은 2차세계대전 이라는 암울한 비극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희망을 꿈꾸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요리를 통해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는 프랑스인도 나오고, 전직 포주이지만 귀부인으로 변신하여 독일군의 첩보를 빼내는 프랑스인도 나오며, 히틀러의 악행을 두고볼 수만은 없어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실행하는 독일인까지 그들은 저마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나아간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는 너무나 비극적이고 모든 걸 파괴하지만, 그럼에도 추락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정의, 자존심, 연민, 그리고 사랑... 로맹 가리가 ‘노르망디의 연‘을 통해 하늘로 띄우고자 했던건 바로 이런게 아니었을까? 전쟁은 참혹하지만 인간은 절대 참혹하지 않다. 그리고 로맹가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놓지 않았다.


[희망이 종종 우리에게 장난을 치곤 하는데, 어쨌든 우리는 그런 장난 덕에 산다. ]  P.277





Ps 1. <노르망디의 연>은 크게 ‘뤼도와 릴리의 만남과 이별‘,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 ‘독일군의 몰락‘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실제 책에서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상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뤼도와 릴리‘ 이야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리뷰도 이걸 위주로 써봤다.


Ps 2. 이 책은 여러모로 로맹 가리의 첫번째 장편소설인 <유럽의 교육>과 닮아 있다. 두 작품 모두 전쟁속에서 피어나는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노르망디의 연>이 좀 더 사랑에 치우쳐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노르망디의 연>이 더 좋았다. 로맹 가리의 작품에서 사랑은 절대 뺄 수 없는 소재인것 같다.


Ps 3. 지금까지 읽은 나만의 로맹가리 Top 3
1. 노르망디의 연
2. 새벽의 약속
3.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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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05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군요.
새벽의 약속 새파랑님 강추로 사놨는데 이 책도 보이면 사야겠습니다. 근데 저는 사랑은 별로라...😅😅

새파랑 2022-07-05 08:05   좋아요 1 | URL
다행히 이 책은 품절이라고 합니다~!!! 전 중고로 구매 ㅋ
사랑이야기보다는 레지스탕스(?) 이야기가 주류고 더 재미있습니다 ㅋㅋ 새벽의 약속은 좀 감동이고 이 책은 좀 애틋함?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중고에서 보이면 냉큼 구매하세요 ^^

미미 2022-07-05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프사 바뀌셨네요? ^^
p.277도 그렇고 멋진 말들이
많이 담긴 소설이군요?! 품절이라니 미리 사두길 잘했습니다ㅋㅋㅋ

새파랑 2022-07-05 11:35   좋아요 1 | URL
역시 책부자 미미님은 가지고 이미 가지고 있으시군요 ㅋ 프사는 너무 더워서 바꿔봤습니다 ^^ 좋은 문장이 많더라구요 ㅋ

바람돌이 2022-07-05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 때마다 최애작이 갱신되다니 역시 로맹가리가 대단한거겠죠?
노르망디의 연도 킵해놓습니다. ^^

새파랑 2022-07-05 16:51   좋아요 0 | URL
제 스타일은 에밀 졸라보다는 로맹 가리 인거 같습니다 ^^

그레이스 2022-07-05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도 많이 읽으셨죠?
새로 읽은 책이 계속 1위 탈환을 하는군요^^
저는 collection 인 상태 그대로예요.

2022-07-05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6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2-07-06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 작품 중 1번, 당연 읽어야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불행하기는 하지만 또 그런 시절에도 사람들이 살아내는 걸 보면 인간의 힘이 위대한 것 같아요^^

새파랑 2022-07-07 08:37   좋아요 1 | URL
로맹가리 본인이 2차세계대전에서 드라마틱하게 활약해서인지 이야기가 더 진실되게 느껴지더라구요. 역시 로맹가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

희선 2022-07-07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본 걸 잊지 않는다니 부럽네요 책읽기에 아주 좋은 재주군요 한번 보고 기억하고 다시 만났는데 전쟁이 일어나서 슬펐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사람은 살아가기도 하는군요 사랑이 있기에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새파랑 2022-07-07 08:38   좋아요 0 | URL
사랑 하나만 믿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 기억력이 너무 좋은것도 안좋은거 같아요. 잊어야 할건 좀 잊어야 하는데 ㅎㅎ

페크pek0501 2022-07-07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희망이 종종 우리에게 장난을 치곤 하는데, 어쨌든 우리는 그런 장난 덕에 산다. ] P.277
-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고 봅니다. 희망이 있는 동안은 살만 하거든요. 어젠가 실망할지라도...

277쪽의 표현이 좋네요.^^

새파랑 2022-07-07 18:14   좋아요 2 | URL
전 로맹가리의 저런 감성적인 문장이 너무 좋더라구요 ㅋ 가능성은 낮더라도 미약하나마 희망이 있는게 좋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