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67

˝내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건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위해서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고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네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인 <솔로몬왕의 고뇌>는 그의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가 꿈꿨던 노년의 삶, 그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 로맹가리는 이 책을 통해 나이는 단지 숫자일뿐 감정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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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Amour (회화) 풀이 잘 묻을 수 있도록 새 캔버스에 일으키는 보풀

사랑 Amour (석고 작업) 석고를 만지고 난 다음 손가락에 남는 미끈거림 같은 것

사랑Amour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

사랑Amour 어떤 가치에 대한 사심 없고 깊은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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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25살의 택시기사이자 수리공인 화자 ˝장˝의 택시에 84살의 기성복 바지 사장(진짜로 입는 바지이다)인 ˝솔로몬˝이 타게 되고, ˝장˝의 얼굴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발견한 ˝솔로몬˝은 ˝장˝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그가 제안한 일은 ‘우정의 구조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일로, ˝솔로몬˝은 ‘우정의 구조회‘ 회장이었다. ˝솔로몬˝은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신을 대신하여 그들을 돕는다. 구조회의 주요 임무는 절망에 찬 사람들의 도움전화를 받는 일이었지만, ˝솔로몬˝은 ˝장˝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는 일을 맡긴다.

[그가 보기에 솔로몬 왕은 신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신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를 대행하고 있었다. 솔로몬 씨의 관점에서 그런 일은 당연히 신이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력이 있는 자신이 대신해 그 일을 한다는 것이다.]  P.51



여기에 추가해서 ˝솔로몬˝은 ˝장˝에게 자신과 오래전에 아는 사이였던 샹숑가수 출신인 65살의 ˝마드무아젤 코라˝의 집을 방문하기를 부탁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솔로몬˝과 ˝코라˝ 사이에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까?

[˝젊고 아름다웠던 때의 습관, 상대의 마음에 들려는 습관 같은거 말이야.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지만 그것만큼은 놓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P.64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이 비껴나가지 못했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의 감성과 행동을 가지고 있었던 ˝코라˝에게 ˝장˝은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장˝이 느낀 감정은  남여간의 사랑이 아닌 보편적인 사랑이었고, 이 사랑을 통해 ˝코라˝는 행복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무려 40살의 나이차이가 나는 관계였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은 ˝코라˝의 기쁨을 위해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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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여자에게 데이트하자고 했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누군가는 그럴 필요가 있잖아.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북극 같을 테니까.˝
˝북극?˝
˝그런 게 없다면 세상은 빙산과 공허뿐인, 영하 백 도의 얼음땅이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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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은 ˝솔로몬˝이 일부러 자신을 ˝코라˝에게 접근시킨 사실을 알게 된다. 젊은 시절 ˝솔로몬˝은 ˝코라˝와 연인관계 였으나 ˝솔로몬˝은 독일 통치시절 당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샹젤리제 거리의 지하실에서 4년 동안이나 숨어 지냈어야 했고, ˝코라˝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그를 떠났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젠 너무 늦었다는 자각, 삶이 결코 우 리의 빚을 갚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오는거야. 마드무아젤 코라의 경우처럼 말이야. 그래서 고뇌가 시작되지.]  P.236



하지만 ˝솔로몬˝은 그녀를 잊을 수 없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화장실 마담으로 일하던 ˝코라˝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녀를 물질적으로 돕게 된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전할 수 없었던 ˝솔로몬˝은 그저 멀리 서서 그녀를 도와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대리인인양 ˝장˝을 그녀의 곁에 두게 했다.

[˝그 여자의 천진함과 서민적인 쉰 목소리, 백치 같아 보이는 작은 얼굴을 사랑했소. 그 여자는 줄곧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 구해주고 보호해주고 싶은 본능을 자극했소. 그 여자처럼 자기 삶을 망치는 걸 겁내지 않는 사람도 없소. 하지만…… 난 때때로 그 여자가 감탄스럽다오. 연인을 위해 자기 삶을 망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오.˝]  P.377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 ˝코라˝는 ˝장˝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코라˝는 ˝솔로몬˝의 물질적 도움이 과거에 그를 버린 자신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코라˝는 누구와 사랑을 하게 될까? 보편적인 사랑의 ˝장˝일까, 아니면 과거의 사랑이자 미안함이 남아있는 ˝솔로몬˝ 일까?

[그들이 떠난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두 번 니스에 갔다. 지금 내 귀에는 내 아들이 소리를 지르고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 그 아이에게 솔로몬 왕 이야기를 해주리라 기성복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큰 키로 당당하게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의 웃음 소리에 대해 말해주리라.]  P.399





<솔로몬 왕의 고뇌>는 1979년에 발표되었고, 1년 뒤인 1980년에 로맹가리는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책에서 로맹가리는 노년의 꿈같은 사랑을 이야기 했는데 현실에서는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 마지막을 선택했던걸까? 그가 써내려간 솔로몬의 이야기는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걸 깨달아서 였던 걸까? 아니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방법만이 불멸이라고 생각했던걸까?

[˝불멸, 이 단어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그 말이 거기, 사전 안에 있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놓인다.˝]  P.76



이야기 자체도 좋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로맹 가리식 위트 역시 유머러스했지만,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으니 그렇게 재미있게만 읽을수는 없었다. 그래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알지 못한 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올 수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녀 곁을 떠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정도로 그녀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사랑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에, 모든 이들이 그로 인해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사랑 덕분에 죽을 지경에서 벗어나 삶을 살기 시작했다.]  P.230




Ps. 에밀 아자르의 네 작품을 다 완독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순위는 아래와 같다.

1. 자기앞의 생
2. 솔로몬 왕의 고뇌
3. 그로칼랭
4. 가면의 생 (개인적으로는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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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5-11 09: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에밀 아자르 하면 역시 <자기앞의 생>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일까요? 떠나고 나서 그녀의 모습이 더 커졌다는 표현이 와닿습니다.

새파랑 2022-05-11 09:34   좋아요 4 | URL
<자기앞의 생> 모모가 커서 겪는 이야기가 이 작품인거 같아요 ㅋ <자기앞의 생> 성인버젼? ㅋ 이 책도 추천합니다~!!

페넬로페 2022-05-11 0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에밀 아자르의 작품을 다 완독하셨네요, 역시~~
자기 앞의 생도 좋지만 새파랑님의 리뷰로 본 이 책도 좋네요.
소설속 요소가 많은 것 같아요.
아모르에 대해 여러 해석이 좋아요^^

새파랑 2022-05-11 09:36   좋아요 4 | URL
이 책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아요~! 페넬로페님은 이 책 좋아하실거 같습니다 ^^

미미 2022-05-11 10: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꼭 읽어야겠네요 발췌문들이 진한 에스프레소같아요.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라하셔서 자전적 삶의 요소를
여기저기서 느꼈어요.아마도 코라는 진 세버그?
https://blog.naver.com/zeilism/221096849990 로맹가리의 드라마틱한 삶을
잘 정리한 포스팅 놓고 갑니다.^^*

새파랑 2022-05-11 10:38   좋아요 3 | URL
에스프레소 맞는거 같아요~! 이책 이미 미미님 서재에 있을테니 언젠가 읽어보세요 ㅋ
저 포스팅 들어가보겠습니다 ^^

얄라알라 2022-05-11 12: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최근 ˝파친코˝(책이 아니라 우선은 드라마로) 접하면서, 주인공 한수가 선자를 꼭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더 큰 의미의 사랑 대상 삼았다는 리뷰 글을 읽었어요 한수 역시 선자가 나이 들었어도 소녀처럼 보았다는 묘사, 멀리서 물질적으로 도왔다는 대목, 등등

[솔로몬 왕의 고뇌]에서 소개해주시는 관계와 짝패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바지사장이 아닌) 진짜 ˝바지사장˝은 알겟는데, ˝화장실 마담˝은 무슨 일인지 처음 들어봤어요. 부끄...모르는 게 참 많네요 저는

새파랑 2022-05-11 13:55   좋아요 4 | URL
아 <파친코>가 이 책이랑 좀 비슷한 내용이 있나보네요 ㅋ 갑자기 급 궁금해집니다~!! 바지는 진짜 pant입니다 ㅋ
저도 ‘화장실 마담‘은 잘 모르겠습니다 😅 책에 그렇게 써있더라구요 ㅋ

얄라알라 2022-05-12 11:30   좋아요 1 | URL
오늘 새벽부터, 드디어 ˝드라마˝가 아닌 ˝원작 소설˝로 파친고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파친코 전용 단어장이 필요하더라고요.

몇 장 안 읽었는데, 완전 좋아요!!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지만 즐독하려고요
새파랑님께서라면 금방 읽으실 듯요

새파랑 2022-05-12 12:09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중고책 검색해보겠습니다~! 전 중고책이 정이 가더라구요 ^^

mini74 2022-05-11 18: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지 사장ㅎㅎ 새파랑님 설명 넘 재미있어요 ~~ 두번째로 좋은 작품이시라니 솔깃합니다 새파랑님 *^^*

새파랑 2022-05-12 07:09   좋아요 1 | URL
바지사장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해서요 ㅋ 저는 이 작품이 상당히 마음에 들더라구요 ^^

얄라알라 2022-05-12 11:32   좋아요 2 | URL
mini74님께서는 ‘화장실 마담‘ 아실까요? 몸통, 줄기는 말고 잎사귀 하나 두고 계속 질문하는 제가 부끄럽지만 궁금하네요...^^:;

mini74 2022-05-12 15:48   좋아요 1 | URL
저는 화장실 앞에서 돈 받는 여자? 아님 청소하시는 분?

그레이스 2022-05-11 2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솔로몬왕의 고뇌가 2위네요
책 한권 또 추가요 ^^

새파랑 2022-05-12 07:10   좋아요 3 | URL
어차피 네권중에 2위이지만 ㅋ 자기앞의 생과 비슷한 감동이였어요 ^^ 꼭 읽어보세요 ~!!

희선 2022-05-12 02: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밀 아자르 하면 《자기 앞의 생》밖에 몰랐어요 네 작품이나 있었군요 로맹 가리 소설도 못 읽었지만... 바지 사장 설명 보고 저도 좀 웃었습니다 아무도 그 바지 사장 생각하지 않을 텐데...


희선

새파랑 2022-05-12 07:12   좋아요 3 | URL
신기하게 로맹가리가 노린건지 진짜 바지 사장이었습니다 ㅋ 이 작품도 괜찮아요~! 한번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