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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게 아니었다. 이름은 좀 낯설지만 러시아에서는 천재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는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단편집 <왼손잡이>를 읽었다. 예전에 그가 쓴 <러시아의 맥벅스 부인>을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었는데, 날씨도 추워지고 하니 러시아가 떠올라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레스코프"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는 정말 러시아 서민의 삶을 잘 안다는게, 사랑한다는게 문장에서 느껴진다. 작품 주인공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 서민이고, 이야기 내내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으며, 기득권층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이를 조롱한다.
이 책에 실린 <왼손잡이>, <분장예술가>, <봉인된 천사> 세 작품 모두 이런 특징을 보인다.
<왼손잡이>에서는, 비록 유럽에 비해 과학은 덜발달했지만 러시아 장인들이 가진 기술과 정신은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유럽처럼 계산적으로 살아가는게 아니라 본연의 임무와 운명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장인 "왼손잡이"의 삶을 보여주면서 러시아 서민의 위대함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단지 여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장인인 "왼손잡이"를 무시하고 방치하여 죽게 만든 조국 러시아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풍자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인 "왼손잡이"는 자신에게 해준것도 없는 조국을 미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워한다.
["그건 아무 상관 없구먼유." 그가 대답했다. "어디서 죽든지 모든건 다 하느님의 뜻이니까유. 어쨌든 저는 하루빨리 고향으로 가고 싶네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구먼유."] P.67
<분장예술가>에서는, 러시아 서민은 왜 한이 많은지, 왜 보드카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인의 강압적인 횡포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류보피"를 겁탈하려는 주인의 만행을 피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도주하는 분장예술가 "아르카지"는 결국 도주에 실패하게 된다.
그나마 주인의 배려있는 처벌로 "아르카지"는 군에 입대하게 되고, 그곳에서 공을 세워 장교가 되며, "류보피"를 되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그는 그녀를 만나지도 못한 채 비극적인 사고로 죽게 된다.
사랑하는 "아르카지"를 그리워 한던 "류보피"는 결국 '망각의 독'인 보드카를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보드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그를 잃은 고통과 그리움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그 모습이 생생하다. 매일 밤,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이들면, 그녀가 자신의 앙상한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상이 걸린 가느다란 다리를 움직여 창문으로 다가가던 모습이. 그렇게 그녀는 잠깐 동안 서서 혹시 침실에서 어머니가 나오시지나 않을까 주위를 살펴보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러고는 자리를 잡고 조용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술을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그렇게 마음속 불을 끄면서 또한 아르카지를 추모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재빨리 이불을 덮으면, 곧바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평생 이보다 더 무섭고 가슴을 찢는 추도식은 본 적이 없다.] P.136
<봉인된 천사>에서는, 러시아 구교를 믿는 석공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던 '이콘(성상화)'이 관청에 의해 몰수당하게 되자 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러시아는 정교가 국교였고 구교는 이단의 성격이 강했으나, 그럼에도 석공들은 주위의 차별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전부인 '이콘'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러시아 서민들이 가지는 신에 대한 믿음의 순수성과 한가지에 빠지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맹목성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접하게 된 분위기란 것이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옛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선의나 경건함이 아닌, 오로지 독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두 사람이 그곳에서 본 것은 조용히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P.209
이 책을 읽고나서 러시아 서민들이 왜 보드카를 좋아하는지, 왜 이콘을 그렇게 소중히 하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은 날씨가 추워서 보드카를 마시는게 아니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한을 녹이기 위해 보드카를 마셨을거고,
아마 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니라 힘들지만 어렵게 버텨낸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기 위해 이콘을 소중히 했을 것이다.
<왼손잡이>에 수록된 세 단편은 모두 재미있고, 너무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러시아 서민의 삶과 한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그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상류층의 삶 보다는 오히려 서민의 삶을 들여다 보는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