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기 문학동네 시인선 181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집은 전체 다섯 개의 부로 나누어져있는데, 그중 4부와 5부에 와닿는 시들이 특히 많았다. 4부에서는 ‘제주 4.3사건’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시들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보다 쉬웠고, 5부에는 그런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인간의 내면을 믿고 말하고 싶어하는 느낌의 시들이 내 마음과 잘 맞았다. 




📖 <순례자> 부분


나는 보았다. 그들. 총을 든 검은 개 누렁 개

닮은 얼굴을 향한 적의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검은 부리가 물고 날아가는

눈동자들을


나는 생각한다.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꼬리도 없는. 거짓을 감추기 위해 꼬리마저 지운 족속들은

인간. 동족을 사냥하는 생물. 제 종족을 살육하는 종




이 시에서 등장하는 ‘검은 개’와 ‘누렁 개’라는 시어는 4.3 사건 당시의 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은어로, ‘검은 개’는 경찰을 ‘누렁 개’는 토벌대를 뜻한다고 한다. 이 점을 알기 전에 시를 읽을 때와 알고 난 후에 읽을 때의 감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닮은 얼굴을 향한 적의’는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죽고 죽이는 행동들을 비꼬기 위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인간’을 ‘동족을 사냥하는 생물, 제 종족을 살육하는 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의 입장을 다루는 시 또한 있는데, 바로 아래 인용할 ‘설움이 나를 먹인다’라는 시이다.




📖 <설움이 나를 먹인다> 부분


설움에게 잘도 얻어먹고 다녔구나

울음의 연대라고 생각했던 것

실은 당신 것으로 연명해온 일

셔울 광화문 보리차도

곱은 손 녹이던 핫팩도


경찰 버스 아래

언 아스팔트에 누웠던 유가족

맨몸의 바리케이드도

슬픔이 시민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허은실 시인은 인간의 잔혹한 측면을 고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선 한줄평에서 언급한 시구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따뜻한 본성 내지는 이타적인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위로 또한 덧붙인다. 그 지점이 내게 큰 감동을 주었고 위로가 되었다. 인류애 없이 그저 삭막하고 각박한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세상은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이지 않은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내면 또한 존재하기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 느껴졌던 시구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 <첫눈> 부분


아— 해봐요 응?

마른 입술에

떠넣어주던 

흰죽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좋아하는 대학 동기 두 명과 언제 한번 만나 진득하게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 그 친구들은 국문과를 복수전공하는 친구들이어서 ‘시’에 대해 매우 빠삭(?)하게 알고 있는 반면, 나는 그저 시라는 장르에 막 입문한 시린이(??)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그 친구들은 ‘시’라는 주제를 두고 나와 아주 심도 깊고 생산적인(???) 토론을 나누었다. 내가 정호승 시인님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라는 시집을 읽고 시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하니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너무도 당연한 건지) 둘 다 정호승 시인님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 친구는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집을 추천해주었고 다른 친구는 ‘수선화에게’라는 시를 가장 좋아한다며 그 시가 수록된 시집을 꼭 읽어보라고 말해주었다. (놀랍게도 시집 제목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현듯 알라딘 중고서점이 눈에 띄었다. 세상 그 어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겠는가. 곧장 들어가 시집 코너를 살펴보니 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집이 있었고, 책장을 열어 목차를 살펴보니 그 친구가 말했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실려있던 것이다?! 이건 도무지 운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짤로만 보던 ‘어머 이건 사야해’가 내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경험을 했고, 그렇게 나는 이 시집을 그대로 구매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알고 보니 이 시집은 일반적으로 발간되는 시집이 아니라, 그동안 정호승 시인께서 쓰신 시들 중 일부를 엄선하여 하나의 선집으로 묶은 ‘시선집’이었다. 그래서 ‘수선화에게’라는 메가히트작(?) 말고도 ‘풍경 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 또다른 유명한 시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근데 뭐랄까… 시 하나하나를 뜯어놓고 보았을 땐 정말 좋은 시인 것은 분명한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한편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보통 일반적인 ‘시인선’ 시리즈로 출간되는 시집은 보통 몇 개의 ‘부’로 나누어져있고, 그 안에서 시인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나름의 통일성을 가지고 묶여 있어서 그 흐름을 느끼는 감각이 시집을 읽는 매력이기도 한데, 이 시집에서는 그런 점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호승 시인의 시를 완전히 처음 읽어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집을 강력하게 추천하지만, 어느정도 시에 대한 내공이 쌓인 사람들에게는 그냥 정호승 시인의 다른 시집 한 권을 통으로 읽는 것을 더 추천하고 싶다. 그래도 이 시에서 좋게 느껴졌던 시 구절 일부를 옮기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 <엽서> 전문


은행잎 떨어지는 가을밤에

은행나무 가지에 걸린 별 하나 따서

만지작거리다가 

편지봉투에 넣어 너에게 보냈는데

받아보았는지 궁금하다




📖 <수선화에게> 부분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절벽에 대한 몇가지 충고> 부분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 <풍경 달다> 전문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알아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시인선 167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서 언급한 ‘지금의 나’란 바로 ‘공시생’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도 이 공시생 생활이 힘들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직접 겪어보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신체적인 피로보다도 심리적인 괴로움이 엄청났다. 공부가 잘 안되는 날이면 죄책감에 휩싸이고, 잘되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 저만치 앞서나가는데 나혼자만 제자리 걸음하며 실시간으로 뒤처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또 금세 우울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책을 꽤 많이 읽었다. 책 내용에 몰입한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온전히 책 속에 빠져들 수 있으니까.) 그러던 중에 만난 이 시집 속 ‘길고 좁은 방’이라는 시는 마치 이 공부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내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그 시를 소개할까 한다.

.

.

📖 <길고 좁은 방> 부분


무슨 냄새일까


무언가 덜 읽은 냄새와 물러터진 과육의 냄새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나는 냄새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냄새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공기 속에서 몸을 섞는 냄새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습기와 곰팡내가 스며 있다는 것을


길고 좁은 방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길고 좁은 방들이 있지만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

기침 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기척을 느낄 뿐


이 방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페인트칠로 덮인 못자국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중략)


삶은 조금씩 얇아져가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은

사라짐의 기술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

.

‘길고 좁은 방’이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일반적인 주거 공간에서는 쉬이 보지 못할 모습의 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난’을 말하려는 시인가 짐작하며 시를 읽기 시작하였다. 1연과 2연에서는 ‘냄새’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 같았고, 그 냄새를 설명하는 부분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난다고 하는거나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섞인 듯한 거라 말하는 문장을 보며, ‘설마 내 얘기인가?’싶었다. (비록 나는 고시원이 아닌 독서실을 다니긴 했지만)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 또한 고시원의 특성에 들어맞았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짐처럼 짊어지고 있을 마음이 바로 ‘피로와 불안’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많이 하면 그것대로의 신체적 피로가 느껴지고, 공부가 잘 안되거나 공부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면 지금 이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으리라는 불안이 주는 스트레스가 정말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짐작은 ‘책상에서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3연의 문장으로 비로소 확정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 습기와 곰팡내가 스며 있다는 것을’이라는 문장 역시 뭔가 내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달까… 더군다나 뒤이은 연에서는 ‘기침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기척을 느낄 뿐’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며 고시원의 황량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으니 더더욱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나의 기분은 반전되었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이 바로 ‘사라짐의 기술’이라는 것은, 합격이든 취업이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서 그곳(고시원)에서 사라지라는 말로 내게 들렸던 것이다. 그 말이 왜이리 위로가 되던지… (울컥) 마지막 연의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은 조금 모호할 수 있지만 나의 상황과 마음을 대입하여 해석해보자면, 사실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전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게 되다보니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 같아서 심리적인 외로움이 극심했었는데, 이 시구는 그런 내게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겉으로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속마음은 아마 펑펑 오열했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그 끝없는 불안도 결국 끝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시였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준 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문학동네 시인선 184
고명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우리는 기온이 낮을수록 용감해진다> 부분


가끔은 연인들이 벌거벗은 채

전나무 숲을 함부로 쏘다니다가

가지에 쌓인 눈을 퍽 맞기도 한다

그건 백설, 하면 설탕!처럼 뻔하고 달지만

매번의 눈폭탄은 환하고 시리고

그렇게 우리는 안개 속에서 땀을 섞는다

눈보라가 온 세상을 덮어버릴 때

우리는 어떻게 외로움에 맞서나

흰 뱀으로 엉킨 뇌를 하나씩 풀어서

설원을 가르며 누군가 여기로 오고 있다고

.

.

시집 제목에서부터 대놓고 사랑을 말할 거라고 선언하는 듯한 느낌의 이 시집은, 역시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시를 많이 품고 있었다. 다만 내가 ‘사랑’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그저 고명재 시인의 시적 표현들이 내 감성과 맞지 않았던 것뿐인지, 어찌되었든 그렇게 공감이 간다거나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좋았던 구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에 대한 내 감상을 조금 적어볼까 한다.

.

.

📖 <선> 부분


첫눈은 기상청의 정의를 따르는 것 같지만 각각의 눈에서 시작되는 것 한 내시는 새벽에 홀로 궁을 걷다가 단풍 사이로 내리는 걸 분명히 봤다고 중요한 건 첫눈이 소식을 만든다는 것 눈 오네 팔월에 나는 너에게 썼다 사랑은 육상처럼 앞지르는 운동이 아닌데

.

.

일단 내가 이 시집이 조금 어려웠던 이유를 위의 구절을 통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시집에는 ‘산문’인 듯한 시가 많다. 위에 인용한 구절을 보면, 놀랍게도 저 구절이 하나의 ‘연’이자 하나의 ‘행’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시’를 읽는 방법과 ‘소설’을 읽는 방법이 다른데, 저런 구절을 읽을 때면 ‘시’를 읽는 방법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방법으로 읽게 되어 시의 구절이 온전히 내게 와닿지 않는 듯하다. (‘시’는 한 구절을 두 세번 반복해서 곱씹으며 읽는 편이고, ‘소설’을 읽을 때는 이해 안되는 부분은 쿨하게 던져버린다.) 다만 위의 인용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첫눈이 소식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육상처럼 앞지르는 운동이 아닌데’ 등의 구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소중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부분


어느 나라에서는 남의 말을 시라고 한다 누가 혼잣말로 추워,라고 말해도 온갖 비평가들이 담요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모닥불을 피우고 귀를 기울여준다고 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잘 익을 것이다 해질녘은 이민자들로 넘쳐날 테고 온갖 종류의 빵냄새와 인사말이 섞이는 그런 아름답고 시끌벅적한 강변을 생각해

.

.

읽는 순간 너무도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게 구절이었다. 상상해보라. 그저혼잣말로 추워,라고말했을 뿐임에도온갖 비평가들이 담요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모닥불을 피우고 귀를 기울여주는 세상을. 단지 상상만 했을 뿐임에도 이런 세상에 산다면 너무도 따뜻하고 행복할 같다. 시인은 이런 느낌을그런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익을 것이라는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이거야 말로시적 표현이지 않은가. 그저따뜻하다’, ‘행복하다 밖에 모르는, 부족한 어휘력을 가진 내가 시를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문장을 만난다니 다시금행복해진다’. 이런 젠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황홀경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좋았다. ‘시’라는 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수성이 메말라있던 나의 현상태에 너무도 시의적절한 독서였던 탓일까,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 와닿는 시의 감성을 여실히 감각할 수 있었다. ‘황인찬’하면 현재 한국 시인 계의 아이돌(?)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기가 아주 높은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과연 그 인기의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황인찬 시집 도장깨기 도전…?)

.

.

📖 <구곡> 전문


나는 꿈속에서 부자가 되었다

높은 집에서 창 아래를 내려다본다


친구가 아래를 지나가며 내게 묻는다


“이거 너희 집이야?”


나는 대답한다

“응. 근데 꿈일 수도 있어”


친구는 말한다


“그럼 일단 깨지 말고 있어봐”


그후로 너무도 긴 시간이 지났다 아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도무지 깰 방법이 없다

.

.

‘구곡’은 이 시집의 초반에 실린 시인데, 읽자마자 황인찬 시인의 감수성이 내 취향과 꽤 잘 맞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너희 집이냐고 묻는 친구에게 ‘꿈일 수도 있’다고 대답하는 데에서 1차로 감탄을 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센스있는 말이랄까. 근데 뒤이은 친구의 ‘그럼 일단 깨지 말고 있어’보라는 말은 두 배의 센스로 받아치는 듯하다. 어떻게 저렇게 티키타카를 할 수 있지…? 거기다 ‘아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도무지 깰 방법이 없다’는 말은, 어쩌면 이 모든 게 자각몽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 걸 넘어서 깨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너무도 공감이 갔다. 나였어도 저런 꿈이면 쉬이 깨고 싶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

.

📖 <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부분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얌꿍의 재료


혼자서 먹었어요,

망원동의 골목에서요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너였고, 무한하게 펼쳐진, 나랑은 무관한 별들이었고,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쑥갓을 닮은 고수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후략)

.

.

한줄평을 ‘은은한 색채가 느껴지는 시집’이라고 한 것은 이 시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시를 관통하는 주제나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 속에 쓰인 여러가지 감각들에 대한 표현들, 이를테면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혹은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등의 시구들이 아주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의 상쾌함을 만끽하며 시를 읽는 기분이 들었고, 향긋한 레몬그라스가 든 새콤한 똠얌꿍이 갑자기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

.

📖 <재생력> 부분


다 함께 모여서 방학숙제를 했지

무슨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여름 내내 여러 마음이 엇갈리고, 지구의 위기까진 아니어도 마을의 위기쯤은 되는 사건을 해결한 뒤의 일


아이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이 장면은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물론 중간에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 탓에 결국 숙제는 끝내지 못할 테지만


뭐 어때, 숙제는 언제나 남아 있는 거잖아(웃음)


(후략)

.

.

앞선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라는 시가 여름밤을 감각했던 시였다면, ‘재생력이라는 시는 제목처럼 파릇파릇한 한여름 낮의 생명력을 십분 느낄 있었다. 나도 방학숙제가 있던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동네 아파트의 평상같은 곳에 한데 모여 같이 방학숙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놀기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 감성에 젖는 기분… ‘추억 주는 행복의 힘은 생각보다, 아니 생각만큼 강력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