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주의자 문학동네 시인선 167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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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언급한 ‘지금의 나’란 바로 ‘공시생’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도 이 공시생 생활이 힘들 거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직접 겪어보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신체적인 피로보다도 심리적인 괴로움이 엄청났다. 공부가 잘 안되는 날이면 죄책감에 휩싸이고, 잘되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 저만치 앞서나가는데 나혼자만 제자리 걸음하며 실시간으로 뒤처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또 금세 우울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책을 꽤 많이 읽었다. 책 내용에 몰입한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온전히 책 속에 빠져들 수 있으니까.) 그러던 중에 만난 이 시집 속 ‘길고 좁은 방’이라는 시는 마치 이 공부를 끝낼 수 있을 거라고 내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그 시를 소개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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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고 좁은 방> 부분


무슨 냄새일까


무언가 덜 읽은 냄새와 물러터진 과육의 냄새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나는 냄새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냄새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공기 속에서 몸을 섞는 냄새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습기와 곰팡내가 스며 있다는 것을


길고 좁은 방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길고 좁은 방들이 있지만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

기침 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기척을 느낄 뿐


이 방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페인트칠로 덮인 못자국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중략)


삶은 조금씩 얇아져가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은

사라짐의 기술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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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좁은 방’이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일반적인 주거 공간에서는 쉬이 보지 못할 모습의 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난’을 말하려는 시인가 짐작하며 시를 읽기 시작하였다. 1연과 2연에서는 ‘냄새’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 같았고, 그 냄새를 설명하는 부분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난다고 하는거나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섞인 듯한 거라 말하는 문장을 보며, ‘설마 내 얘기인가?’싶었다. (비록 나는 고시원이 아닌 독서실을 다니긴 했지만)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 또한 고시원의 특성에 들어맞았고, 그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짐처럼 짊어지고 있을 마음이 바로 ‘피로와 불안’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많이 하면 그것대로의 신체적 피로가 느껴지고, 공부가 잘 안되거나 공부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면 지금 이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으리라는 불안이 주는 스트레스가 정말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짐작은 ‘책상에서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3연의 문장으로 비로소 확정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 습기와 곰팡내가 스며 있다는 것을’이라는 문장 역시 뭔가 내 처지를 말하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달까… 더군다나 뒤이은 연에서는 ‘기침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기척을 느낄 뿐’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며 고시원의 황량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으니 더더욱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나의 기분은 반전되었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이 바로 ‘사라짐의 기술’이라는 것은, 합격이든 취업이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서 그곳(고시원)에서 사라지라는 말로 내게 들렸던 것이다. 그 말이 왜이리 위로가 되던지… (울컥) 마지막 연의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은 조금 모호할 수 있지만 나의 상황과 마음을 대입하여 해석해보자면, 사실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전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게 되다보니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 같아서 심리적인 외로움이 극심했었는데, 이 시구는 그런 내게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겉으로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속마음은 아마 펑펑 오열했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그 끝없는 불안도 결국 끝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시였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준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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