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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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집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황홀경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좋았다. ‘시’라는 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수성이 메말라있던 나의 현상태에 너무도 시의적절한 독서였던 탓일까,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 와닿는 시의 감성을 여실히 감각할 수 있었다. ‘황인찬’하면 현재 한국 시인 계의 아이돌(?)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기가 아주 높은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과연 그 인기의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황인찬 시집 도장깨기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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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곡> 전문


나는 꿈속에서 부자가 되었다

높은 집에서 창 아래를 내려다본다


친구가 아래를 지나가며 내게 묻는다


“이거 너희 집이야?”


나는 대답한다

“응. 근데 꿈일 수도 있어”


친구는 말한다


“그럼 일단 깨지 말고 있어봐”


그후로 너무도 긴 시간이 지났다 아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도무지 깰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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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곡’은 이 시집의 초반에 실린 시인데, 읽자마자 황인찬 시인의 감수성이 내 취향과 꽤 잘 맞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너희 집이냐고 묻는 친구에게 ‘꿈일 수도 있’다고 대답하는 데에서 1차로 감탄을 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센스있는 말이랄까. 근데 뒤이은 친구의 ‘그럼 일단 깨지 말고 있어’보라는 말은 두 배의 센스로 받아치는 듯하다. 어떻게 저렇게 티키타카를 할 수 있지…? 거기다 ‘아마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도무지 깰 방법이 없다’는 말은, 어쩌면 이 모든 게 자각몽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 걸 넘어서 깨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너무도 공감이 갔다. 나였어도 저런 꿈이면 쉬이 깨고 싶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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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 부분


똠은 끓인다는 뜻, 얌은 새콤하다는 뜻

꿍은 새우


레몬그라스는 똠얌꿍의 재료


혼자서 먹었어요,

망원동의 골목에서요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너였고, 무한하게 펼쳐진, 나랑은 무관한 별들이었고,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쑥갓을 닮은 고수


이 시는 겨울에 생각하는 여름밤에 대한 시,

출출한 밤이 오면 생각나는 시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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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을 ‘은은한 색채가 느껴지는 시집’이라고 한 것은 이 시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시를 관통하는 주제나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 속에 쓰인 여러가지 감각들에 대한 표현들, 이를테면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혹은 ‘새콤한 게 더운 날에는 딱이니까’, ‘향긋한 파 같은 레몬그라스’ 등의 시구들이 아주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의 상쾌함을 만끽하며 시를 읽는 기분이 들었고, 향긋한 레몬그라스가 든 새콤한 똠얌꿍이 갑자기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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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생력> 부분


다 함께 모여서 방학숙제를 했지

무슨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여름 내내 여러 마음이 엇갈리고, 지구의 위기까진 아니어도 마을의 위기쯤은 되는 사건을 해결한 뒤의 일


아이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이 장면은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물론 중간에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 탓에 결국 숙제는 끝내지 못할 테지만


뭐 어때, 숙제는 언제나 남아 있는 거잖아(웃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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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라는 시가 여름밤을 감각했던 시였다면, ‘재생력이라는 시는 제목처럼 파릇파릇한 한여름 낮의 생명력을 십분 느낄 있었다. 나도 방학숙제가 있던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동네 아파트의 평상같은 곳에 한데 모여 같이 방학숙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놀기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 감성에 젖는 기분… ‘추억 주는 행복의 힘은 생각보다, 아니 생각만큼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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