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어남과 죽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서, 인간은 태어남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죽음의 순간으로 미리 달려갈 수 없다. 오로지 섹스만이 인간의 소관이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섹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596-597)

 

제국주의 가부장이 지배해온 역사는 전복(顚覆) 역사다. 위대함과 사소함을, 거룩함과 속됨을 홀랑 뒤집어버린 과정이 우리가 겪은 인간 역사다.

 

참 위대함·거룩함을 감추기 위해 사소함·속됨을 위대함·거룩함으로 둔갑시킨 짓이 바로 창조와 심판 능력을 부여해 신이라 이름 지은 허깨비다. 인간 소관이 아니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사 문제를 지배하려고 지어낸 허무맹랑한 서사가 남성 이미지로 칠갑한 신화와 종교 경전이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실재는 다름 아닌 섹스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많은 이 위대하고 거룩한 사건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허접한 가십류 담론을 배설해왔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적은 저 사소하고 속된 신에 관한, 그러니까 생사 문제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급 담론을 빚어왔다.

 

섹스가 이렇듯 사소하고 속된 무엇으로 전락한 까닭은 바로 섹스에 대해 남성이 지닌 열등감 때문이다. 열등한 주제에 지배하려니 진실을 비튼 구라를 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섹스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생명 창조, 그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으며 심지어 전 과정에 걸친 섹스 감각마저도 여성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긍정하기는 싫고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으므로 남성은 전천후로 섹스 문제를 왜곡했다.

 

섹스라는 어휘를 쓰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딱하다. 섹스라는 영어 어휘에 해당하는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순우리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 말을 공식적으로 점잖은글에 쓸 수 없는 뉘앙스를 장구한 세월 동안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저기 몰락의 에티카에도, 여기 내 글에도 쓰지 못한다. 이중 억압, 그러니까 중압(重壓)이다.

 

억압을 풀고 전복을 다시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섹스가 왜 위대하고 거룩한가를 근본에서 밝히는 일이다. 정치와 도덕 그늘을 벗어나 진실 빛 아래서 섹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디테일은 뒤로 미루고 간단명료한 이치 하나만 밝혀본다.

 

섹스는 비대칭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계 진실 요체에 해당한다. 관통과 흡수를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모든 거래(去來) 시원에 다름 아닌 섹스가 있다.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먹기와 싸기, 잠자기와 깨어 있기, 일과 쉼, 이 모든 대칭 거래 사건, 그러니까 거룩한 생명 운동 시리즈는 섹스에서 비롯한다. 이에 대한 통찰을 건너뛴 이른바 큰 지혜들이 공허한 까닭은 결코 다른 데 있지 않다. 진실에서 벗어나 제국 가부장이 견지하는 야동관점을 고수하는 한 깨달음과 슬기로움은 미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국가가 159명 국민을 고의로 죽이고도 사고로 처리하는 몰염치 또한 결국은 야동관점으로 정치를 희화화하는 제국주의 부역 패거리 탐욕에 기인한다. 근본을 말아먹고 진위를 전복한 사악한 자들 손아귀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적나라한 진실 정곡을 단도직입으로 찔러 들어가 모든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결기가 필요하다. 고급 지성이든 통속 저널리즘이든 에두르는 얄팍한 타협을 지속하는 만큼, 생명은 지금처럼 속절없이 죽어가리라.

 

2. “문제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달리 없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불가능을 반복하는 일은 고통이기 때문에···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597-마지막 두 문장 순서 바꿈은 필자)

 

결합을 위한 유일 유력한 길인 줄 알고 들어서서 가보니 도리어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연을 목도하고 마는 섹스 고통. 고통인 섹스를 직시해야만 알아차려지는 진실. ‘진실은 늘 고통과 더불어 오고,’ 그 고통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에게 섹스는 진실을 은폐할 다시없는 수단이 된다. 진실을 외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보상, 그러니까 생명 창조-그렇지 않은 섹스가 물론 있다-와 쾌락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합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천하 마약인 셈이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진실을 맞이하려면 결곡 곡진한 질문이 필요하다.

 

결합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결합이란 사태가 가능하기는 한가? 결합이 가능하지 않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운가?

 

섹스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룩한 행위다. 좀 더 진실에 육박한 기술(記述)아름다운 둘이 되는 일이 바로 결합하는 일이다”(593). 이 말을 두고 형용모순이니 이율배반이니 떠들기 전에 대뜸 알아차려야 할 진실이 있다. , 우리가 결합을 오해하고 있다는 진실. 우리가 여태껏 속아온 결합은 제국주의적,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진실. 제국주의적, 변증법적 결합은 반드시 폭력을 전제한다는 진실. 폭력을 전제한 결합은 없어야 한다는 진실. 아니. 당최 없다는 진실. 그 결합을 결합이라 한다면 극한 분열을 결합이라 우기는 짓이라는 진실. 우기는 섹스로는 참된 결합,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다는 진실.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는 진실.

 

이제 진경으로 썩 들어서 본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둘. 아름답다는 말이 핵심 중 핵심이다. 칼릴 지브란 절창 일부를 듣는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그렇다. 저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아름답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597)심연”(597) 때문에 아름답다. 그 바다를, 그러니까 몰락”(5)선택”(5)하였기 때문에 참혹하게”(5) 아름답다. 아파서 아름다운 그 표정 둘은 숭고”(5)하다. 아프()되 괴롭지() 않다. 고통이라는 잘못 교배된 키메라 허깨비는 사라진다. 허깨비를 피하려고 외면하는 일도 사라진다. 직면하면 말할 수 있다. 그 말을 우리는 섹스하는’” 인간이라 한다.

 

혼과 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아름다운 둘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바다를 메우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거짓 결합을 설파하는 자는 미상불 사탄의 주구, 그러니까 제국 백색문명 부역자일 테다. 부역자가 패거리로 몰려들어 아름다운 둘, 그 숭고함을 때려 부수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한 심연, 그러니까 아프디아픈 진실을 덮어야 제 곳간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생명과 안정이라는 미소를 흘리며 치명적 섹스로 홀리고 있다. 제국 백색 문명에 짓밟힌 사람이여, 오늘이야말로 녹색 섹스 하는삶을 살 때가 아닌가.

 

3. “‘에게 먹임으로써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이 봉헌의 기적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593)

 

칼릴 지브란 절창 전부를 듣는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연 재구성은 필자)

 

결혼식에 가면 주례가 흔히, 아니 빼놓지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사랑을 강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며느리 아니고 딸이라며 시아버지더러 안아주라 하고, 사위 아니라 아들이라며 장모더러 안아주라 한다. 이런 언행들이 모두 호들갑 떠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주례를 설 때, 반대로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호들갑은 도리어 현실 인식을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켜 진실을 흐트러뜨릴 따름이다. 부부는 정녕 일심동체일까? 그래야 할까? 이미 칼릴 지브란이 답을 주었다.

 

저명인사 부부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자기들은 한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회자와 방청객이 함께 감탄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실은 감탄이 아니라 탄식해야 마땅하다. 한평생 부부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은 딱 두 가지다. 서로 싸울만한 거리 밖에 있었거나, 어느 한쪽이 늘 죽어지냈거나. 후자 경우, 가부장적 우리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여성 배우자 쪽일 터이다. 둘 다 정상적인 부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는 일이 난센스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아를 버리지 않는, 그러니까 봉헌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문제는 그 봉헌이 쌍방향이냐 아니냐다. 쌍방향성이 확보되어야 타자성의 긍정과 자기 상실의 긍정이라는 이중 긍정’(593)이 가능하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행위가 마주 이루어짐으로써 자타와 생사 모순이 공존 역설로 달여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일방적 희생 자기 해체도, 일방적 수탈 자기 구축도 세상을 죽음으로 내몬다. 주는 사랑이 희생이 아니고 받는 사랑이 수탈이 아닐 때 비로소 이중 긍정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이중부정 힘에 맹렬하게 이끌리고 있다. 제국 백색문명에 부역하는 특권층 패거리한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타자성 부정, 자기 상실 부정 말이다. 특권층 부역 패거리는 파렴치한 자기 구축을 위해 절대다수 타자성을 잔혹하게 부정한다. 그 파렴치와 잔혹은 대놓고 함부로, 전방위·전천후로 드러난다. 놀라운 점은 드러날수록 파렴치와 잔혹이 더해간다는 사실이다. 누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까. 어찌해야 아름다운 둘이 될까. 분노가 쌓이는 이상으로 공포·불안이 깊어진다.

 

깊고도 푸른 공포·불안을 극복할 아름다운 둘에서 아름다운은 그저 정서적 수사가 아니다. 신비주의와 기계론을 동시에 관통하는 질량이며 에너지며 소식이다. “은 그저 하나 아닌 둘아니다. 하나, 둘에서 둘 아닌 둘이다. 이는 청원 유신 마지막 문장 山是山 水是水”, 바로 그 산인 산, 물인 물 실재다. 아름답지 않으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 아름답지 않다. 이 아름다운 둘에서 팡이실이로서 사랑이 창발한다.

 

4. 앞 세 이야기는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주해(알라딘 서재: 싸리·버들 글숲)에 쓴 내용과 순서를 고쳐 다시 썼다. 이 수정에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진전된 공부가 일정 정도 반영돼 있다. 여기에 다음을 부가한다.

 

 

마지막 글 인용문에 나오는 먹임봉헌이라는 말에 좀 더 내밀하게 배어들어 본다. 나를 너에게 먹인다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성과 그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먹이는 일이다. 봉헌이라는 표현 또한 관념이 아니다. 성과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먹임과 봉헌이라는 표현에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액면가가 매겨져 있다.

 

성교 사건은 식사 사건이며 제의 사건이다. 제국 백색문명은 이 모두를 도구화했다. 도구화는 오락화다. 오락화는 희화화다. 희화화는 종말론적 증후다. 오늘 우리 사회 풍경이 웅변으로 증언한다. 감각적으로 가장 손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TV 채널을 차례로 돌리는 일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이 희화화된 장면을 곧바로 마주할 수 있다. TV만이 아니다. 대중매체 거의 전부가 그렇다. 이는 정치 희화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국가수반과 그 아내가 스스로 희화화하는 풍경을 시시각각 마주하니 모방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상황에서 놓여나려고 통속한 지성과 저널리즘으로 비판하는 일은 겨 묻은 손으로 똥 묻은 손을 씻는 짓이다.

 

나그네가 병들었을 때 고치려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 존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본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를 먹는/먹이는 태초 사건에서 다세포 생명체가 탄생했다. 먹다/먹이다, 이 표현은 오늘날 인간이 지니는 이해 능력에 비추어 사건 전체를 담아낼 수 없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와 성적으로 결합해서 다세포 생명체, 그러니까 다른 존재”, 다시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되었다는 표현이 더해져야 한다. 하나가 더 필요하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에게 봉헌하여/되어 창발적 제의, 그러니까 네트워킹 사건이 일어났다는 표현까지 더해져야 한다. 이 진실 전경 앞에서 낄낄대는 순간 저 봉헌의 기적거룩한 계보에서 이탈한다.

 

거룩한 계보는 다른 이름을 지닌다: 공생. 린 마굴리스가 밝힌 우리 시대 최고 진실, 인간은 정확히 질량으로, 에너지로, 소식으로 이 세포내공생 계보를 따른다. 공생으로서 인간 심신 생명 구성 자체가 이미 다른 생명과 성교하고 식사하고 봉헌한/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성교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다른 생명체를 먹는 일, 죽어서 다른 생명체 먹이가 되는 일과 본성이 같으며, 이 두 일 모두 신성하고도 질탕한 제의 본성을 지닌다.

 

성교와 식사와 제의는 서로 가로질러 감으로써 아름다운 둘이 소통하는 전경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이 지니는 성적 지향, 또는 성정체성이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숲과 성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식사하는 행위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내가 숲을 먹는 일이기도 하고 숲이 나를 먹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행하는 제의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서 길을 잃는 일은 숲에 빙의되는 일이다. 내가 숲에서 버섯에게 몰입하는 일은 버섯에게서 신성을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녹색 성, 그 사랑은 인간, 그 너머 모든 생명이 평등한 공동 주체로 제국 백색문명에 맞서 통일전선을 이루도록 하는 거룩하고 질탕한 팡이실이 사건이다. 무심코, 함부로, 더군다나 낄낄거리며 대해서는 망한다. 망조는 벌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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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다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말이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446)

 

이 말은 내 폐부 깊숙한 곳을 뒤흔든다. 그동안, 차마 가 닿을 수 없었던 진실이다. 70년이 다 되어가는 생애 기조가 익명성이었기 때문이다. 익명으로서 내 삶은 시원적 방치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강권을 거쳐 마침내 자발적 중독으로까지 나아갔다.

 

있으나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누적은 나를 익명성 밑바닥에 납작하니 개켜 넣었다. 부피를 상실한 내 이름은 어디에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 이름은 거의 질문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크게 외칠 때는 듣는 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이름 부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명성은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흐름에 맡기면 언제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어쩌다 중심으로 흘러들면 익명은 돌연 요구가 된다. 그 요구에 속절없어진 나는 이름을 가리고 선사(膳賜)에 배어든다. 선사에 배어든 나는 무색투명해진다. 무색투명한 자가 건넨 선물이 연대 고리가 될 리 없다. 연대 바깥에 선 자는 공동체 일원이 아니다. 나는 초월자 연하는 국외자였다. 거대신 헛된 그림자를 여전히 밟고 있었다. 나는 오만을 흉내 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색에 빠져 있었다. 인색은 자기 착취다. 자기 착취는 이내 그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너머 남에게도 내게도 이름 자체가 선물이며 사랑이라는 진실을 느지막이 깨닫는다. 그렇다. 사랑하는 일은 이름을 거는 일이다. (이상 내용은 201815일에 쓴<익명의 시대를 건너다>를 조금 고쳐 가져음.)

 

이름을 짐짓 가린 채 초월적으로 시혜하는 일은 제국 백색문명 분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폐해며 허상이다. 나는 식민지 피해자임과 동시에 부역자였다. 이제 여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천명은 내 이름을 당당히 넉넉히 걸고 분리 벽을 넘어가는 일이다. 내 이름을 걸고 분리 벽을 넘어가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존재도 익명성에서 벗어난다. 무고히 살해당한 사람이며, 여성이며, 유색인이며, 아이며, 성소수자며, 장애인이며, 노동자며, 난민이며, 북극곰이며, 푸른 이구아나며, 도롱뇽이며, 해마며, 이끼며, 돌꽃이며, 말이며, 곰팡이며,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인 익명 존재가 부활한다. 그들 작디작은 이름 하나하나를 건 사랑이 팡이실이로 제국 은산 철벽을 무너뜨린다. 무너뜨리고야 치유다.

 

제국주의를 치유하는 주체가 녹색의학이라면 녹색의학은 이렇듯 모든 낱 생명이 짓는 온 사랑이다. 온 사랑은 작디작은 이름들이 낱낱이 선물로서(膳名) 서로에게 배어들고 배어나게 하는 사건이다. 온 사랑은 온전한 앎이다. 온전한 앎은 인간 언어를 넘어선다. 말하지 않고야 전해지는 온 사랑은 작디작은 이름들로 꽃핀다. 그 화원으로 가는 길을 우리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라 부른다.

 

Aimer, c’est savoir dire je t’aime sans parler. _Victor Hu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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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라는 책에서 통합사상가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 제거·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 내부화, 경제·통화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신성한 경제가 분리 문명, 그러니까 제국 백색문명을 극복하고 재통합 세계를 여는 중요한 요소라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허황한 낙관론 같지만, 근원적인 문명비판이면서도 당장 개인적 실천까지 가능한 톡톡한 담론이다.

 

저자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의학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이미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경제적 기치>에서 개론 수준 이야기는 했다. 분리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분리 의학은 몸 병과 마음 병, 병과 병 있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치료자를 포함한 병 없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사회정치, 병과 자연, 병 있는 사람과 자연을 철저히 갈라놓았다. 진단 기준과 치료(?) 약물 보편성을 통해 병 있는 사람이 지닌 고유함과 관계적 존재성을 제거했다. 이렇게 병과 병 있는 사람을 클론으로 찍어낸 다음, 값을 매김으로써 불멸 화폐가 다스리는 영원한 수탈제국에 의료 봉토를 헌정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내용 전반을 관류하며 이야기하는 바는 선물 개념이다. 선물 경제 복원 문제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21선물 속에서 일하기가운데 <신성한 직업>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선물 모델은 무형인 가치를 전달하려는 직업에 특히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음악인, 화가, 성판매자(매춘부로 번역되어 있으나 인용자가 바꿈), 치유자, 상담자, 교사. 이 모두가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바가 신성하다면, 명예롭게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물로 주는 일뿐이다. 아무리 높은 가격도 무한한 무엇이 지닌 신성함을 반영할 수는 없다. 내가 구체적인 강연료를 요구한다면, 내 선물 가치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위 직업 중 하나에 종사한다면 선물 모델을 한 번 실험해보아도 좋다.

 

한의사지만 하는 일 내용으로 따지면 나는 치유자, 상담자, 교사다. 나아가 인터뷰 전설 오리아나 팔라치가 한 인터뷰는 사랑 이야기다. 섹스다. 너를 홀딱 벗기고 나를 홀랑 들이붓는 싸움이다.’라는 말에 인터뷰 대신 숙의치료를 집어넣어 바꾸고, 숙의 또한 예술인 측면을 고려하면, 나는 위 모든 직업에 해당한다. 나는 그동안 숙의치료에서 선물 모델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물론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여태까지는(!), 생각하고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결과는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관습으로 정착되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의사가 숙의로 마음 병을 치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숙의 1회에 90-120, 심지어는 식사까지 해가며 5~6시간 넘게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른바 상담 치료비문제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고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지난주에도 상담 치료비에 부담을 느낀 어떤 사람이 예약을 취소했다. 좀 더 세밀하게 선물 모델을 연구해서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선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숙의를 진행하고 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만큼 사례하고 가도록 했다. 그냥 가는 사람, 5천 원 내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그까짓 대화하고 나서 무슨 돈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감사를 느끼며 성의껏 내는 경우도 대개 5만 원을 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색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설명을 붙였다. 상담 치료 본질과 가치, 상담 치료 일반적인 풍경, 역술인 예, 의료인 아닌 상담사 예, 정신과 양의사 예, 외국 예, 상담 시간 비교 들을 간략하게 했다. 공감하고 수긍하면서 내고 가는 돈은 대략 5~10만 원 선이었다. 희귀한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30만 원 선뜻 낸 사람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 100만 원을 내며 이런 상담은 처음 받아본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상담해보지도 않고 먼저 값을 물어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화로 예약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상담 치료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지 못한 채, 많은 사람이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반대로 돈깨나 있는 강남 사람들 가운데는 한 번에 몇백만 원씩 카드로 긁고 가는 패키지 상품을 원했다.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홈페이지에 상담 치료비 문제로 공개 글을 써 올리기까지 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적절한 금액을 원칙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경제적인 상황을 포함한 조정 요건을 설명해주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지금도 이 문제는 표류 중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도 현실적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남들도 다 같이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며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다. 다만···당신 마음이 이성 너머 무언가에 이끌리는 순간을 알아차리기만 바랄 뿐이다. 이성, 현실성, 안전성 추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지금 결과를 보라. 이제는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인지도 모른다.

 

고백건대 선물 모델 실패 의식에는 저평가된 내 선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수천만 원대에 이르는 치료비를 받지 못한 기억이 작용하고 있다. 기존 분리 모델에서 온전히 놓여나지 못 한 자아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거다. 문제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나는 내 선물을 눈물겨운 포옹으로, 자기 삶을 전복함으로 받아준 사람에게 새삼 정색하고 감사한다. 나는 내가 받은 고귀한 선물을 감동과 함께 기억한다. 무엇보다 내가 참으로 막다른 길로 몰렸다는 섬뜩한 느낌에 시달릴 때, 기적으로 찾아온 선물 앞에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선다. 이성 너머로 나를 이끄는, 그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인다. 신성한 경제학 시대를 열어가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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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째 한의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녹보수 생명력이 경이롭다. 7~8년 동안 아예 잎을 피우지 못하고 사실상 죽었던 가장 작은 줄기가 올여름 끄트머리에서 연두 한 점을 밀어 올렸다. 그 연두 점은 빠르게 번지고 자랐다. 이제 제법 초록으로 짙어져 간다. 나는 마치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얼마나 더 자랐는지 확인하고는 한다. 나무 생명이 이런 부활 풍경을 빚어낼 때 인간은 다만 수구 살풍경을 조작질하고 있다.

 

속이 불편할 때 찾아와 멸치국수로 점심을 먹는 식당이다. 개신교 신자 여럿이 식사 후 차 마시면서 정치 얘기를 한다. 이승만 기념관, 이영애, 좌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먹는 얘기 아님 부동산 얘기나 하던 종자들 입에서 문재인 간첩 얘기가 튀어나온다. 김미화는 본래부터 좌파고 효리는 돌아왔다나 뭐라나 암튼 어이 상실 무인지경이다. 대체 개신교는 어디까지 망가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뭐 이런 개

 

리베카 솔닛을 음미하며 잠잠히 나를 돌아보다가 우당탕 내던지고 네가 중첩 식민지 삶을 알아?’ 하고 냅다 소리칠···뻔 한다. ··이 패거리가 하는 짓이 온통 암흑이어도 한 줄기 빛을 찾아 나서야 하고, 천 길 벽이어도 문 있는 곳을 감지해야 하지만, ‘이념 전쟁이 두 번째 경술 늑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꼬락서니가 무섭고도 우습다. 이영애 칭찬하는 개독쯤이야 얼마나 귀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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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근원과 연대하는 일은 연대 자체로 극복 운동이다. 극복 운동은 미래를 끌어당겨 세계 연속성에 이어주는 일이다. 연속은 불연속, 그러니까 분리 악을 관통한다. 분리 악을 제국은 백색문명으로 체제화했다. 제국 백색문명을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the Fall)-자아 폭발(ego explosion)-이라 묘사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 이데올로기/흐름이라 표현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거대 음모로 각색하고, 그 가짜 음모에 부역하며 거들먹거리는 세력이 지닌 야심을 염두에 두어, 나는 이를 이간(離間) 문명이라 이름 짓는다.

 

이간질은 악의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는 짓으로 유구한 제국주의 통치 전략이다. 이간 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팡이실이를 거세한다. 역동적 팡이실이 대신 가짜 초월, 사이비 보편을 옹립한다. 그렇게 옹립되어 마침내 완성된 초 일극 집중구조 유일신이 바로 돈이다. 돈 지배체제인 제국 백색문명, 그 하부단위인 백색의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름 아닌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돈 노예로 살기를 거절하는 결단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삶을 선물(찰스 아이젠스타인)이게 하는 운동이다.

 

선물을 쌓아 올려 공동체를 지어낸다(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102).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녹색출산, 녹색장례, 녹색농업과 연대하여 이런 열린 공동체를 향해 간다.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아라한 집단을 꿈꾸지 않는다. 아라한 집단은 자기들만 깨달았고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기만하는 병든 게토다. 병든 게토는 공동체를 입자로만 생각한다. 파동으로서 공동체도 있다. 입자와 파동을 가로지르며 중재하는 존재가 의(). 의는 만신이자 술이다. 나는 만신이자 술로 산다.

 

2.

 

()는 앓는 소리를 뜻하는 예()에다 술 단지를 뜻하는 유()를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고대에는 술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서양 과학적 지식으로 판단한다면, 에탄올 작용을 핵심으로 이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은 증류주든 발효주든 순수 에탄올 너머 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동북아시아 고대 의학에서 주로 사용한 탕약은 대부분 물로 달이지만 술을 넣어 달이도록 한 처방도 있다. 이는 에탄올 추출이 더 나은 경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술과 더불어 복용하도록 한 처방도 있다.

 

자연스럽게 , 우리가 아는 의사나 치료라는 기본 뜻 말고, 술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술이 지닌 최초 위상은 신성한 무엇이었다. 종교 지도자가 신을 만나는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술 치료 기능은 아마도 그 신성이 확장,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음 직하다. 이렇게 종교 지도자는 의사이기도 했으므로 에 만신이라는 뜻이 담기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지도자가 종교 지도자이자 의사였다. 에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까지 담긴 점은 이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에 담긴 이런 다중 의미를 오늘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간 문명이 가르고 또 갈라놓아 모든 존재가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요법 포르노 기술자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디 의사는 영적 사람이었다. 세상을 보살피고 돌보는 공적 사람이었다. 녹색 의술을 시행하는 치유적 사람이었다. 본디 위상을 복원해야 한다. 사제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영성과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법 포르노를 떠나서 전인 치유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자연과 자연 사이를 흐르는 파동 공동체 매개변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만신이자 술인 사람이 빚어낼 옹근 삶이다.

 

3.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를 꾸준히 읽는다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파동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 나 또한 이간 문명 흔적을 지닌 채 글을 쓰고 있구나. 자그마하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으로 이야기해야 마무리가 되겠구나.

 

파동 공동체는 입자 정체성을 지닌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찰스 아이젠스타인)’를 염두에 둔 대안 용어로 내가 고안해낸 말이다.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는 공동체를 양(가시적 조직)으로, 영역으로만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종교(성을 띤) 공동체, 명망가 중심으로 특정한 목적·방식을 가지고 꾸린 공동체가 바로 그런 예다. 어떤 정체성 안에서만 연속될 뿐이어서 이간 문명 속성 또는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다.

 

파동 공동체는 질(상호교류), 팡이실이로 생각하는 공동체 개념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 가령 통일 문제를 말할 때, 보통 반사적으로 남북 영토적 통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남북한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을 팡이실이로 연결한 유연한 공동체 형성을 통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미주, 일본 등에 적지 않은 한인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데, 이들을 영토적으로 묶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북한 영토적 단일성 문제도 절대적인 사항은 아니다. 이따금 벌어지는 충돌에서 보듯 휴전선은 그 어느 국경선보다 살벌하고 견고한 분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상과 삶을 공유한다면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에 사는 사람과 LA 한인 마을에 사는 사람을 공동체 구성원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한 줌 무리 이끌고 어느 섬으로 들어가 울타리 두른 다음, 녹색의료·녹색출산·녹색장례·녹색농업 일구어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율도국공동체 만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율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해 지구를 율도국 분점으로 덮는 꿈은 더욱 꾸지 않는다. 비밀리에 율도 특전사를 양성해 전 세계를 율도 제국 통치 아래 두는 꿈은 더더욱 꾸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인연에 따라 고유한 율도국을 만들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 고유한 율도국을 이루도록 소통하는 계기공동체를 꿈꾼다. 계기 이상(의 권력)이 되면 스스로 거점을 지워 나아가는 공동체를 꿈꾼다. 이런 공동체가 다름 아닌 파동 공동체다.

 

파동은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구조를 세우지 않는다. 파동은 자그마하게 소식(news)을 주고받는다. 자그마하게 주고받은 소식은 각자에게 복음(the Good News)이 되어 인연에 맞는 에너지와 구조를 스스로 일구도록 조절한다. n개 녹색공동체는 n가지 스펙트럼 녹색 빛을 낸다. 이간 문명 극복은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롭게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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