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근원과 연대하는 일은 연대 자체로 극복 운동이다. 극복 운동은 미래를 끌어당겨 세계 연속성에 이어주는 일이다. 연속은 불연속, 그러니까 분리 악을 관통한다. 분리 악을 제국은 백색문명으로 체제화했다. 제국 백색문명을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the Fall)-자아 폭발(ego explosion)-이라 묘사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 이데올로기/흐름이라 표현한다. 제국 백색문명을 거대 음모로 각색하고, 그 가짜 음모에 부역하며 거들먹거리는 세력이 지닌 야심을 염두에 두어, 나는 이를 이간(離間) 문명이라 이름 짓는다.
이간질은 악의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는 짓으로 유구한 제국주의 통치 전략이다. 이간 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팡이실이를 거세한다. 역동적 팡이실이 대신 가짜 초월, 사이비 보편을 옹립한다. 그렇게 옹립되어 마침내 완성된 초 일극 집중구조 유일신이 바로 돈이다. 돈 지배체제인 제국 백색문명, 그 하부단위인 백색의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름 아닌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돈 노예로 살기를 거절하는 결단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삶을 선물(찰스 아이젠스타인)이게 하는 운동이다.
선물을 쌓아 올려 공동체를 지어낸다(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102쪽).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녹색출산, 녹색장례, 녹색농업과 연대하여 이런 열린 공동체를 향해 간다.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아라한 집단을 꿈꾸지 않는다. 아라한 집단은 자기들만 깨달았고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기만하는 병든 게토다. 병든 게토는 공동체를 입자로만 생각한다. 파동으로서 공동체도 있다. 입자와 파동을 가로지르며 중재하는 존재가 의(醫)다. 의는 만신이자 술이다. 나는 만신이자 술로 산다.
2.
의(醫)는 앓는 소리를 뜻하는 예(殹)에다 술 단지를 뜻하는 유(酉)를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고대에는 술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서양 과학적 지식으로 판단한다면, 에탄올 작용을 핵심으로 이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은 증류주든 발효주든 순수 에탄올 너머 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동북아시아 고대 의학에서 주로 사용한 탕약은 대부분 물로 달이지만 술을 넣어 달이도록 한 처방도 있다. 이는 에탄올 추출이 더 나은 경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술과 더불어 복용하도록 한 처방도 있다.
자연스럽게 醫는, 우리가 아는 의사나 치료라는 기본 뜻 말고, 술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술이 지닌 최초 위상은 신성한 무엇이었다. 종교 지도자가 신을 만나는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술 치료 기능은 아마도 그 신성이 확장,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음 직하다. 이렇게 종교 지도자는 의사이기도 했으므로 醫에 만신이라는 뜻이 담기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지도자가 종교 지도자이자 의사였다. 醫에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까지 담긴 점은 이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醫에 담긴 이런 다중 의미를 오늘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간 문명이 가르고 또 갈라놓아 모든 존재가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요법 포르노 기술자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디 의사는 영적 사람이었다. 세상을 보살피고 돌보는 공적 사람이었다. 녹색 의술을 시행하는 치유적 사람이었다. 본디 위상을 복원해야 한다. 사제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영성과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법 포르노를 떠나서 전인 치유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자연과 자연 사이를 흐르는 파동 공동체 매개변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만신이자 술인 사람이 빚어낼 옹근 삶이다.
3.
<반제국주의 의학 서사>를 꾸준히 읽는다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파동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아, 나 또한 이간 문명 흔적을 지닌 채 글을 쓰고 있구나. 자그마하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으로 이야기해야 마무리가 되겠구나.
파동 공동체는 입자 정체성을 지닌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찰스 아이젠스타인)’를 염두에 둔 대안 용어로 내가 고안해낸 말이다.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는 공동체를 양(가시적 조직)으로, 영역으로만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종교(성을 띤) 공동체, 명망가 중심으로 특정한 목적·방식을 가지고 꾸린 공동체가 바로 그런 예다. 어떤 정체성 안에서만 연속될 뿐이어서 이간 문명 속성 또는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다.
파동 공동체는 질(상호교류)로, 팡이실이로 생각하는 공동체 개념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 가령 통일 문제를 말할 때, 보통 반사적으로 남북 영토적 통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남북한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을 팡이실이로 연결한 유연한 공동체 형성을 통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미주, 일본 등에 적지 않은 한인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데, 이들을 영토적으로 묶는 일은 불가능하다. 남북한 영토적 단일성 문제도 절대적인 사항은 아니다. 이따금 벌어지는 충돌에서 보듯 휴전선은 그 어느 국경선보다 살벌하고 견고한 분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상과 삶을 공유한다면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에 사는 사람과 LA 한인 마을에 사는 사람을 공동체 구성원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한 줌 무리 이끌고 어느 섬으로 들어가 울타리 두른 다음, 녹색의료·녹색출산·녹색장례·녹색농업 일구어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율도국’ 공동체 만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율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해 지구를 율도국 분점으로 덮는 꿈은 더욱 꾸지 않는다. 비밀리에 율도 특전사를 양성해 전 세계를 율도 제국 통치 아래 두는 꿈은 더더욱 꾸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인연에 따라 고유한 율도국을 만들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 고유한 율도국을 이루도록 소통하는 ‘계기’ 공동체를 꿈꾼다. 계기 이상(의 권력)이 되면 스스로 거점을 지워 나아가는 공동체를 꿈꾼다. 이런 공동체가 다름 아닌 파동 공동체다.
파동은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구조를 세우지 않는다. 파동은 자그마하게 소식(news)을 주고받는다. 자그마하게 주고받은 소식은 각자에게 복음(the Good News)이 되어 인연에 맞는 에너지와 구조를 스스로 일구도록 조절한다. n개 녹색공동체는 n가지 스펙트럼 녹색 빛을 낸다. 이간 문명 극복은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롭게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