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다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말이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446)

 

이 말은 내 폐부 깊숙한 곳을 뒤흔든다. 그동안, 차마 가 닿을 수 없었던 진실이다. 70년이 다 되어가는 생애 기조가 익명성이었기 때문이다. 익명으로서 내 삶은 시원적 방치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강권을 거쳐 마침내 자발적 중독으로까지 나아갔다.

 

있으나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누적은 나를 익명성 밑바닥에 납작하니 개켜 넣었다. 부피를 상실한 내 이름은 어디에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 이름은 거의 질문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크게 외칠 때는 듣는 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이름 부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명성은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흐름에 맡기면 언제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어쩌다 중심으로 흘러들면 익명은 돌연 요구가 된다. 그 요구에 속절없어진 나는 이름을 가리고 선사(膳賜)에 배어든다. 선사에 배어든 나는 무색투명해진다. 무색투명한 자가 건넨 선물이 연대 고리가 될 리 없다. 연대 바깥에 선 자는 공동체 일원이 아니다. 나는 초월자 연하는 국외자였다. 거대신 헛된 그림자를 여전히 밟고 있었다. 나는 오만을 흉내 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색에 빠져 있었다. 인색은 자기 착취다. 자기 착취는 이내 그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너머 남에게도 내게도 이름 자체가 선물이며 사랑이라는 진실을 느지막이 깨닫는다. 그렇다. 사랑하는 일은 이름을 거는 일이다. (이상 내용은 201815일에 쓴<익명의 시대를 건너다>를 조금 고쳐 가져음.)

 

이름을 짐짓 가린 채 초월적으로 시혜하는 일은 제국 백색문명 분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폐해며 허상이다. 나는 식민지 피해자임과 동시에 부역자였다. 이제 여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천명은 내 이름을 당당히 넉넉히 걸고 분리 벽을 넘어가는 일이다. 내 이름을 걸고 분리 벽을 넘어가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존재도 익명성에서 벗어난다. 무고히 살해당한 사람이며, 여성이며, 유색인이며, 아이며, 성소수자며, 장애인이며, 노동자며, 난민이며, 북극곰이며, 푸른 이구아나며, 도롱뇽이며, 해마며, 이끼며, 돌꽃이며, 말이며, 곰팡이며,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인 익명 존재가 부활한다. 그들 작디작은 이름 하나하나를 건 사랑이 팡이실이로 제국 은산 철벽을 무너뜨린다. 무너뜨리고야 치유다.

 

제국주의를 치유하는 주체가 녹색의학이라면 녹색의학은 이렇듯 모든 낱 생명이 짓는 온 사랑이다. 온 사랑은 작디작은 이름들이 낱낱이 선물로서(膳名) 서로에게 배어들고 배어나게 하는 사건이다. 온 사랑은 온전한 앎이다. 온전한 앎은 인간 언어를 넘어선다. 말하지 않고야 전해지는 온 사랑은 작디작은 이름들로 꽃핀다. 그 화원으로 가는 길을 우리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라 부른다.

 

Aimer, c’est savoir dire je t’aime sans parler. _Victor Hu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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