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에서 원효 사상을 논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경주김씨 신라가 일으켜, 삼국의 대립을 끝내고 민족의 대통합을 이룬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전승되고 기억되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저 삼국 전쟁은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내면 진실을 지닙니다. 648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밀약을 맺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데 성공하면 대동강 이북의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내용입니다. 민족사 전체를 왜곡한 매판의 길은 이렇게 열렸습니다. 그래 놓고 삼한통일로 상징조작을 한 것입니다. 광활한 고구려 영토 대부분과 그 백성은 물론 수많은 백제 백성까지 팔아넘기고 당의 연호 아래 그 체제를 국가 경영의 근간으로 삼은 일을 두고 어찌 삼한통일이라 할 것입니까. 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일까요.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은 흉노 수장으로 한건국에 공을 세워 투후가 된 김일제가 자기 조상이라 천명했습니다. 김일제 후손은 왕망의 난이 일어나 입지가 흔들리자 한반도 동남부로 이동해 왔습니다. 거기서 내세운 시조가 바로 김알지입니다사실이면 사실일수록 아니면 아닐수록 이 주장은 김일제 집단과 김춘추 집단의 매판적 본질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니 절묘할 따름입니다. 만일 흉노가 동이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라면 김춘추 집단의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모순입니다. 당과 야합해 동이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치면서 삼한통일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 경우,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매판 행위를 은폐하려는 술수일 따름입니다. 만일 흉노가 동이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민족이라면 김춘추 집단의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기만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와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은 민족통일이 아니라, 이민족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통일신라 내러티브는 침략전쟁을 은폐하려는 술수일 따름입니다.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網羅四方? 실로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덕업德業은 전쟁입니다. 일신日新은 당나라 좇는 것입니다. 한반도 허리 아래 땅에 웅크리고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방四方을 망라網羅하는 게 아닙니다. 사방을 망보는 것입니다. 거창한 이름 자체가 모순이고 기만입니다.

 

삼국 전쟁이 끝난 뒤 짧은 세월의 번영기를 빼고 신라는 급격히 쇠락과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잠재력을 흡수하지 못한 사이비 통일임을 증명하는 결과입니다. 흥융興戎의 피해가 흥륭興隆을 심각하게 잠식해버린 것입니다. 신라 그 매판의 역사는 동이 정체성을 지닌 왕건 집단, 고려의 건국으로 외막이 내려집니다. 왕건 집단은 동이의 가치, 고구려 재현을 기치로 세웁니다. 그러나 신라의 내막을 온존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김부식으로 상징되는 신라 집단이 도리어 흉노의 꿈을 재현합니다. 고려를 송에 조아리게 하고, 원에 무릎꿇림으로써 고구려를 당에 팔아넘긴 그 매판적 조상의 길로 회귀합니다. 고려는 얼마간의 회복국토와 KOREA 이름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고려 그 아쉬운 동이 재건의 역사는 이성계 집단, 조선의 건국으로 외막이 내려집니다. 이성계 집단은 동이의 가치, 고조선의 재현을 기치로 세웁니다. 그러나 고려와 같이, 신라의 내막을 뿌리 뽑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송시열로 상징되는 서인 노론 신라 집단이 도리어 흉노의 꿈을 재현합니다. 조선을 명에 조아리게 하고, 왜에 갖다 바침으로써 고구려를 당에 팔아넘긴 그 매판적 조상의 길로 회귀합니다. 조선은 압록·두만 경계와 한글을 남기고 사라집니다.”(75~77)

 

특권층 부역 집단을 통시적 축으로 삼아 구성해본 경주김씨 신라에서 조선까지 얼개 서사다. 동의할 사람은 드물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 신라 집단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인류-인류학을 만들면서 서구인이 말한 그 인류-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대뜸 공감할 일이다. 신라 집단 실재는 상상력 공동체 인류아닌 분석 집단 서구인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

 

이 대목을 읽었던 독자 가운데 김일제 후손 이야기에 관해 묻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실제 <문무왕릉비>에 위 내용이 실려 있으며, 같은 내용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있다. 제 가계를 신성하게 보이기 위해 날조했다 하더라도 그런 의식을 지녔으며 훗날을 위해 명문화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이 무의식으로 침윤되어 오늘날 영남인 정치적 정체성을 강고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서사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김춘추의 저주.

 

김춘추가 이세민(태자 시절 당 태종)과 맺은 늑약은 단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를 거듭하며 특권층 부역 집단은 송----미로 이어지는 제국과 유·무명 늑약을 수없이 맺어왔다. 마침내 가쓰라 태프트 늑약을 제물 삼아 을사년(1905) 보호 늑약, 경술년(1910) 합방 늑약으로 조선 숨통을 끊기까지 저주는 계속됐다. 국권 회복 이후에도 이승만이 국군통수권을 헌납한 대전 늑약(1950), 박정희가 일제를 면죄한 한일 늑약(1965), 박정희 딸 근혜와 뉴라이트 윤기중 아들 석열이 맺은 일군 성노예 늑약(2015, 2023)으로까지 이어지며 유구한 저주로 작동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지금 하는 짓은 이완용 집단이 경술년에 했던 짓을 떠올리게 한다. 김춘추의 저주는 힘이 이토록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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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과 반역에 대한 내 통절한 각성은 고백이 아니다. 내면을 성찰하고 표현하는 인간 정신 작용은 더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네트워킹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정치경제를 종식하고 공동체 선물 세계를 여는 존재론이자 윤리학이다.

 

그 세계 존재론은 살해당한 생명을 되불러내며, 그 윤리학은 수탈당한 풍경을 되돌려놓는다. 누가 어떻게 죽음으로 내몰렸는지, 무엇이 어떻게 소유물로 뒤바뀌었는지 알아야만 존재는 복원되고 윤리는 완성된다. 존재도 윤리도 각각 알맞은 고유 맥락을 구성한다.

 

우리는 우리 맥락에서 공동체 선물 세계를 열어간다. 조선 반도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그 마름 이야기를 옹골차게 해야만 그럴 수 있다. 이제 그 남다른 이야기를 구성해야만 한다. 남다른 이야기라서 남과 더불어 펼치면 모든 이야기가 한 이야기로 어우러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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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숲을 연속해서 두 번 들어가기는 처음이지 싶다. 검단 숲, 이번에는 서쪽 사면 계곡으로 들어가 능선 거쳐 옆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 아닌 길을 만들어서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 나왔다. 지난주 나올 때 남은 아쉬움을 덜기 위해서였으니 역시 소식을 전했고 돌귀를 남겼다.

 

산곡천을 거슬러 따라가며 남한산을 향한다. 천변 길은 물론 가재울 골짜기로 들어가 점점이 박힌 농가·전원주택·별장을 지나는 동안 사람은 거의 없고 풍경은 어수선했다. 생각 않고 버린 폐기물로 할퀴어진 물, 길섶, 자투리땅들을 보는 내내 아리고 쓰린 통증이 구시렁거린다.

 

모름지기 그 통증은 풍경이 내게 건네는 하소연과 신음에서 비롯했으리라. 심사가 편치 않으니 어쩌다 마주치는 농부에게도 눈길 보내지 못한 채, 남한산 동쪽 계곡으로 스며든다. 숲 깊이 들어가 500고지에 닿을 때까지 인적이 전혀 없다. 인적 없으니 그제야 마음이 눅는다.



고요한 숲에서 만난 작은 습지가 도롱뇽과 개구리알을 품고 있다. 낙엽이 덮여서 보이지 않는 작은 도랑물 소리가 들려온다. 연달래꽃 가족이 우꾼우꾼 마지막 천명을 피워올린다. 능선, 그리고 그 너머 인간 훤요만이 지나친 욕망, 넘치는 술수로 자신과 자연을 오염시킬 뿐이다.

 

산성에 올라 둘러본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522m), 위치상 특히 서울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일이 확인하다가 문득, 거대한 아파트 바다가 산들을 섬으로 가두고 있는 광경을 목도한다. 5천 년 역사를 지닌 나라, 6백 년 고도는 어디 가고 식민지 살풍경만 가득하다.



예정에 없던 청량산 길을 걸어 내려오다 청량한 약수로 목을 축인다. 맑은 기분으로 물길 따라 숲 밖으로 향하는데 느닷없는 굴착기 소리가 고요를 깨뜨린다. 무슨 터널 공사 같은 작업을 하는 모양이다. 식민지 토건은 영일 없구나. 6시간 산행한 다리보다 가슴이 더 무겁다.


지하철 안에서 생각한다. 왜 산 가장자리 마을은 모두 궁상맞고 너저분한 모습일까? 산처럼 푸근하지도 도심처럼 깔끔하지도 않고 어리숙한 욕망만 맨몸으로 나뒹굴까? 분명히 둘 다일 수도 있는데, 왜 둘 다가 아닐까? 스스로 내팽개치는 식민지 변방인 심성이 투영돼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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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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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1일 어느 특권층 부역자가 주인인 신문에 올라온 글 일부다.


20세가 되면서 대학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 몇 해 머무는 동안에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기에 게으른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살았구나, 하는 죄책감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너무 나태했다. 놀고먹는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고 노랫가락에도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는 흥겨움이 깔려있었다. 양반들은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이쑤시개는 물고 다녔다. 배불리 먹고 나서는 모습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내 아내 얘기도 그랬다. 어려서 친구들과 놀면서, 출가하게 되면 우편배달부한테 가야지 농사꾼에게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걱정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본인들과 같이 열심히 일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꿈이었다.”(<김형석의 100년 산책>)

 

참담하다. 104세 철학자 사유에서 나온 글이라니. 그가 평생 공부하고 가르친 철학이란 과연 무엇일까. 스무 살 이전 특권층 부역자 소년이 본 식민지 풍경에 100세가 넘은 지금도 변함없는 해석을 가하는 철학자, 그 정신적 neoteny가 너무나 애잔하다. 설혹 그 해석이 옳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국민은 게으른 민족을 지배하는 권리를 지닌다는 식으로 전형적 제국주의 발상을 하면서도 전혀 각성이 없다. 아니. 다 차치하고라도 전체적인 글 수준과 기본 어휘 선택조차 중고생 백일장과 방불한데 100년 관록 자랑할 지면을 내주다니. 심지어 그 신문 인기 검색어 1위란다. 누구는 노망 아니냐 한다. 아니다. 정확히 특권층 부역자 심리 상태를 반영한 글이다. 누구는 무슨 언론이 이러냐 한다. 아니다. 정확히 이런 짓 하는 집단이 바로 이 나라, 그러니까 중첩 식민지 부역 언론이다. 참담하다는 말도 물색없다.

 

예순여덟 나이에 제국주의를 공부하고 부역 서사를 쓰겠다고 나선 내 자신이 심히 늦되다 탄식했는데, 마흔 살 가까이나 더 많은 철학자, 아니 철학가 아직도, 아니 끝내 이런 말이나 한다니 적잖이 안심이다 싶어서 씁쓸하기 짝이 없다. 지식이든 지성이든 지혜든 패거리 우물에 빠지면 그야말로 한심한 bullshit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 철학처럼 오래 살 확률은 매우 낮을 터이므로 여생이 그리 길지 않다. 여태까지 살아온 삶 돌이키려 지금이라도 이 글을 쓰는 만큼 헛된 짓거리가 되지 않도록 각고해야겠다.


각고를 벼린다. 도봉 숲이 내게 들려준 말은 부역자 각성이었다.(2023.2.14. <부역 생태 서사>) 검단 숲이 내게 들려준 말은 반역자 각성이었다. 검단 숲을 다녀온 뒤 소식을 기다리던 그제(2023.4.19.) 새벽 홀연 잠에서 깨는 순간 내 삶에 똬리 튼 개체/미시 제국주의를 통렬히 깨달았다. human-biont로서 내가 나와 공생하고 있는 nonhuman-biom에게 말살 전쟁을 벌여왔다고 검단 숲이 말해주어서다. 메모하려 스마트폰을 열자 처음 내 눈으로 날아든 짱돌이 바로 앞에 인용한 그 글이다. 설마 타산지석일 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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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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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덕분에 제국주의 전경을 세밀하게 그릴 수 있었다. 제국주의가 얼마나 전천후·전방위적 힘인지 확인했다. 그 힘에서 완전히 벗어날 어떤 존재도 없다. 생을 부지하는 모든 사건이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반제 전선은 개인 양심이나 도덕 문제가 아니다. 앵글로아메리카가 구축한 세계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재편하는 정치혁명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인간에서 비롯한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고 공생하기 위해 비인간을 주체로 복원시키는 신성한 네트워킹 문제다.


신성한 네트워킹은 반드시 공동체 운동으로 빚어진다. 공동체 운동은 이치상 영적이다. 영성은 비인간 풍경 자체가 지니는 생명력에서 발원했다. 그 풍경은 숲으로 발현했다. 숲 본성에 다시 깃들려면 닫혀 있는 몸을 열어야 한다. 열쇠는 결곡한 부역자 각성이다.

 

부역자 각성은 단순히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을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구조적 부역으로 발현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해치는지 미시·거시 망라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만 거대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지배하는 지구를 디-테라포밍할 수 있다,

 

각성한 부역자는 trickster로서 천명을 영특하게 살아내야 한다. 한국 현실 정치는 이 trickster 부재로 실패를 거듭해왔다. 지금 민주당 실패도 여기에 속한다. 민주당보다 더 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른바 운동권 세력도 본질이 같다. 참으로 아둔한 결벽증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실로 결백한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죄다 제2류다. 2류로서 곡진히 천명 안에 서면 길이 보인다. 길 찾으러 부역자 전경 앞으로 간다. 거기서 자아 거점을 지우고 연속된 전체 생명으로 배어들라는 제1류 목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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