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역사에서는 법학, 신학, 의학을 3대 신성 학문이라 일컫는다. 법관·사제·의사는 공적 업무를 행할 때, 가운을 입는다. 가운을 입고서 보수적이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3대 신성 학문은 자연스럽게 보수가 된다. 아니다. 태생 생태 자체가 보수 본성을 지닌다. 이런 보수 영지를 모두 지나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현상적으로는 내가 그 지성소 진입에 실패한 과정이다. 현상 이면에는 웅숭깊어 선명하지 않은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 나를 성공 지향 인생에서 쫓아내 성취 지향 인간으로 떠돌도록 내몰았다; 찢긴 내 영혼 멱살을 움켜잡고 메타적 직관으로 끌고 가 내동댕이쳤다. 나동그라져 바닥에서 보니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진실이 보인다.

 

구태여 따지고 보면 법학은 사회과학, 신학은 인문(), 의학은 자연과학 범주 안에 있으니 내 경험 영역은 전 학문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나머지 학문에 대해 자세하게 논급할 지구력이 갑자기 툭 떨어진 개인적 곡절이 여기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개인을 넘어선다. 더군다나 악마는 디테일이라는 훨씬 정겨운 이름으로 역사한다. 각성한 사람들이 각각 자기 관심 분야에서 디테일 진실을 찾아내야 악마, 그러니까 부역 집단이 파묻은 우리 공동체 생명 네트워킹을 복원할 수 있다. 가령 이렇게 기습당해 옆구리에 비수가 꽂혀야 정신이 화들짝 되돌아온다.

 

부역 국어국문학자 이희승은 그렇다 치고, 최현배가 어떻게 골수 부역자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한글을 지킨 대단한 스승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선총독부 관비 장학생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나왔으며 훈민정음 합용병서 원칙을 파괴하려 조선총독부가 기획한 <언문철자법> 만들기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도무지 믿을 무엇이 있기는 한지,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에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이 아니었다. 바로 이어서 나는 그와 어울려 학계를 석권했던, 이 땅에서 고등학교만 나왔으면 이름 석 자 다 아는, 뜨르르한 스승들 대부분이 부역 패거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마저 알아버렸다. 갑자기 생각이 멈추고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에 사로잡혀 아무 짓도 할 수 없었다.

 

말 나온 김에 아예 이야기 하나 보탠다. 진보 사학계 거두 강만길은 노무현 정부 시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부역자 명단에서 이병도는 물론 그와 함께 부역 사학자로 이미 잘 알려진 신석호를 제외했다. 신석호가 그의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도라면 대한민국 학문, 그 주체인 학자가 지닌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의심, 아니 정조준해야 한다. 부역자를 다 때려잡자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부역 사실로 그 인간 전체를 매도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도 애써 할 필요가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비판과 단죄받을 부분은 받게 해 역사를 바로 세우면 된다. 나머지는 오늘 이후 살아갈 공동체 구성원 몫이다. 돌로 칠 죄 없는 자 없으니, 살아 있는 부역자라면 스스로 결곡히 자백하고, 벌을 달게 받고, 진실로 참회하고, 그 참회를 학문 내용으로 증명하는 네트워킹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실현 가능 여부는 이미 우리가 예상하는 바대로다.

 

끝으로, 이 또한 가 닿을 가능성 희박한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유학하고 돌아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 또는 좌파 지식인, 학자들에게 다시 한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들 거의 모두가 스스로 식민지 부역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 분명히 해두자. 그들은 부역자다. 그들이 제국에서 배운 대로 이 땅 문제를 해석하고 변혁하려 하는 한, 이 땅에 두껍게 깔린 식민지 실재를 범주로 삼지 않는 한, 불가피하다. 진보 또는 좌파라는 굴레를 쓰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아예 입에 담을 가치도 없다. 흔히 말한다: 일본,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다 부역자는 아니다. 이런 부정 어법은 합리성을 훔치는 대표적 수사다. 이런 말에게 나는 질문한다: 아니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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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국주의 신학 공부에서 떠났다. 학위 논문 쓰기를 포기한 사건이 객관적 분기점이었다. 제국 학문으로 사는 식민지 인간인 내가 싫어 내 생태 품은 전승 줄기를 찾고자 세운 목표가 주관적 분기점이었다. 교수서껀 동학도 모두가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표표히 돌아섰다.

 

어디로 갈까? 다시 인생 전복하는 일을 이제껏 걸어온 길이 또 내게 맞지 않다는 반복적 소극적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되었다. 내 인생 이끌어갈 마지막 적극적 동인을 찾아야 했다. 돌이켜보면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내게는 다른 동학도들과 반대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눈이 활짝 열렸다. 나와 생태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오늘 여기 사람에게 오늘 여기 눈으로 주의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불현듯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초군초군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 제국 학문에 넘어가고 남은 딱 하나가 그때 내 눈에는 한의학뿐이었다. 한의학으로 가는 길도 딱 하나 수능시험을 다시 치고 한의대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아내서껀 제자들까지 무모하다고 했지만 나는 표표히 그 길로 들어섰다.

 

40대 중반에 들어가 마주한 한의학 첫인상은 사뭇 좋지 않았다. 시대착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전(황제내경) 숭배, 사전(동의보감) 중독, 신비주의(우주 변화의 원리), 그리고 이들과 유연하게 섞이지 않은 채 한쪽 경계를 무너뜨리고 막무가내 들어앉아 생경한 제 말만 쏟아내는 서구의학이 나뒹굴며 어수선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식민지 학문 판 전형이었다.

 

한의대 학생은 양의대 편제와 똑같은 6(예과 2, 본과 4) 동안, 한의학과 더불어 이른바 기초과학, 기초양의학, 양의학을 공부해야 한다. 각과 교과서는 한의학과 양의학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양의대 학생은 한의학 ㅎ자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한의학을 의학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의학, 그러니까 제국 의학을 보편 의학이라고 굳게 믿는 식민지 부역 집단에서 일어나는 난치성 도착증이다. 국가가 이를 묵인, 아니 공인하고 있다. 조선이 망해갈 무렵부터 시작돼 식민지 시대, 군정, 역대 부역 정권을 거치면서 미국 체제로 굳어진 의학, 국민 보건·의료체계상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의학이 지구를 점령했다고 해서 보편 의학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제국주의 통치 이념 앞에 머리 조아린 의학이라면 그 내용이 지닌 편파·편협성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다. 물론 편향성은 어떤 의학에도 존재한다. 그 진실을 외면하면 전향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식민지 한의학도로 살면서 나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부역하고 있는지 처절하게 직시한다. 그런 만큼 철저하게 제국 의학을 들여다보고, 한의학을 들여다본다. 매일 아침 제국 의학 동향을 살피는 일로 하루를 연다. 그 일이 한의사인 내게 무엇인지 물으며 하루를 닫는다. 나는 제국 의학이 깡그리 망하는 날을 고대하지 않는다. 실낱같은 기대 하나 한다면 저들이 한의학에 정중히 대화를 청하는 일이다. 예상되는 결과는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여기 알라딘 서재 녹색의학 이야기(2017.8.22.~2018.6.7.)에 제국 의학 실상을 밝히고 그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했다. 지금은 더 확장된 관지에서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 쓰고 있는 이 글 전체가 끝나서 단행본 형태를 띠게 될 경우, 녹색의학 이야기내용을 이 문단 바로 다음에 전재할 생각이다. 물론 현재 이 문단 내용을 아래와 같이 바꾼 다음에 말이다.

 

한의사로서 환자한테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어. 소용없더라고. 그래서 침이나 한번 맞아볼까 해서···.’ 안 해본 게 없는 이것저것이란 결국 제국 의학 온갖 요법이다. 한번 맞아볼까 하는 침은 그러면 마지막 희망일까, 밑져야 본전일까? 이렇게 오는 사람은 두어 번 침 맞으면 반드시 으르댄다. ‘왜 차도가 없어?’ 이런 풍경은 누구에게든 익숙하다. 나는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경우 해명은 변명으로 매도된다. 단도직입 온갖 요법본성을 현백하고, 그러면 진짜 대안이 뭔지 명백히 한다. 이제 그 세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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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험 법() 공부에서 떠났다. 사법고시 일차 시험 합격하고 이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실이 객관적 이유였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다시 했겠지만 나는 단칼에 그만두었다. ‘민주적기본질서를 끌어안은 채 일주일 동안 식음 전폐 고민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고시하면 인생 망치겠구나 하고 깨달은 사실이 주관적 이유였다. 가족서껀 주위 사람 모두가 아까워했지만 나는 표표히 돌아섰다.

 

어디로 갈까? 인생 전복하는 일을 이제껏 걸어온 길이 내게 맞지 않다는 소극적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되었다. 내 인생을 이끌어갈 적극적 동인을 찾아야 했다. 길지는 않았지만 파란 많았던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어렵지 않게 패턴 하나를 찾아냈다. 결정적인 고비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외부 힘이 작용해 내 희망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객관적 풍경은 거듭되는 실패였다. 주관적으로 내 인상에 남은 바는 웅숭깊어 선명하지 않은 어떤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나를 이끌고 신학으로 데려갔다. 가족서껀 주위 사람 모두가 아까워했지만 나는 표표히 그 길로 들어섰다.

 

신학은 나를 새로운 사유 세계로 이끌었다. 고대 히브리어 본문 비평 시간에 내가 느꼈던 놀라움과 부끄러움은 향후 내 공부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공부가 무르익고 그래서 진지해질수록 알 수 없는 공허가 자리 잡아갔다. 공허가 발원한 곳은 신학적 사유 체계 밑바탕에 자리 잡은 서구 형식논리 프레임이었다. 동아시아 논리 실재 기본을 알고 있던 나는 매우 빠르게 호흡 곤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 여성 신학, 생태 신학 같은 성찰이 일어나 각기 열린 영역을 구축하기 전에 나는 이미 신학이 지닌 제국주의 본성을 간파했다. 인도유럽어족이 정치경제학 맥락에서 세운 형식논리를 기반으로 한 일극 집중구조, 인격신 체제,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주의···한국 기독교가 이 모양인 까닭에는 핵심 부역 집단 중 하나인 사람 탓도 있지만 제국주의 후원자 노릇을 한 서구신학 자체 탓이 근본적이다.

 

서구신학이 본성으로 지닌 제국주의는 무엇인가. 제국주의 특히 정착형 식민주의가 지닌 본성은 절멸 전쟁이다. 토착민을 모두 죽이고 정착민을 심는 바로 그 제노사이드다. 제노사이드에는 반드시 테오사이드(theocide), 그러니까 토착민이 섬기는 신을 살해하는 일이 동반된다. 자기 신 말고는 모두 우상이고, 자기 신앙 말고는 모두 미신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신학은 유일·거대·인격·창조신만을 인정한다. 그 신은 네트워킹을 거절한다. 지구상 거의 모든 토착민은 네트워킹으로서 신을 섬기므로, 아니 살아가므로 서구 제국주의 신학은 네트워킹 신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테오사이드는 성공했을까?

 

무슨. 반대로 제국주의 신학이 떠받친 유일·거대·인격·창조신이 사실상 살해당했다. 제국주의 신학이 그동안 펼쳐온 유신론은 사실 처음부터 환유에 불과했고, 결국 도달한 실재는 무신론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도킨스 같은 과학자가 만든 이론이 아니라 서구신학 자체 안에 내포된 실재다. 무신론은 제국주의를 위하여 계속 환유 신학을 병기로 활용한다. 이 신학적 배반과 도착은 예정된 운명을 따른다. 결말은 휴거가 아니다.

 

부역 신학은 태생적으로 비대칭 대칭 세계를 모른다. 비대칭 대칭 역설만이 부역을 끝장낼 수 있다. 부역을 끝장내기 위해 우리는 유신론 신학과 무신론 신학(!)을 가로지른다.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금을 타고 부활하는 신이 바로 네트워킹 신이다. 네트워킹 신은 초월(창조주)과 내재(피조물),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동물과 식물, 식물과 지의류, 지의류와 말류, 말류와 균류, 균류와 세균, 세균과 바이러스를 넘나든다. 자유, 평등, 평화, 창발로 호혜 공생하는 비대칭 대칭 사건이자 구조다. 각성한 눈으로 보면 보이는 이 신을 우리는 오랜 옛날부터 바리라고 불러왔다. 반제국주의 바리신학을 원효는 화쟁이라 불렀다. 우리는 이 참된 신학을 살해하고 제국주의 사이비 신학에 부역하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대로 그냥 살아가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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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풀을 염두에 두고 숲이라 표현해도 산은 산이고, 산은 마을 뒷산일망정 숨 몰아쉬며 올라야 할 곳이 있게 마련이다. 관악은 어디서든 쉽지 않다. 주말이면 늦은 저녁 라이트를 켠 구조 헬리콥터가 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관악에 들려 하면 일단 기본 긴장감으로 준비해야 한다.

 

오늘은 과천 관문천 계곡에서 들어가 서울대 저수지가 있는 계곡으로 나올 계획이다. 과천역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와보니 아파트가 모두 고층으로 바뀌어 있다. 길이야 바꿀 수 없었을 테니 내 발걸음은 편안했다. 과천 향교에 이르러서는 지도를 보며 계곡 길로 들어섰다.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입구에는 벌써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로 왁자할 만큼 도심처럼 붐비고 있었다.

 

언제나 풍경은 새롭고 경이롭다. 연신 걸음 멈추고 보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들어간다. 마침내 그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지점에 이르렀다. 지도에 점선으로 나타나는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 참 좋다.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 네 사람 만났을 뿐이다. 그중 둘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다소 겁먹은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오고 있었다. “잘못 온 거 아니야? 길이 맞기는 해?” 가까이 다가와 눈이 마주치길래 내가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지만 길 맞습니다. 안심하고 가세요. 곧 큰길과 만납니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연거푸 하면서 표정을 환하게 풀었다. 산에서 주고받는 이런 선물은 아연 유쾌하다.

 

능선을 넘어 내려갈 길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계곡 길이다. 진입로를 쉽게 찾지 못해 다른 길로 가다가 아무래도 지나왔지 싶어 되돌아가는데 마침 가고자 하는 방향에 빽빽한 수풀 사이로 얼핏 사람 모습이 보였다. 길은 거기 있었다. 초입이 거의 가려져 있고 경사가 가팔라 대부분 길이 아닌가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조심스레 내려가니 지난주 갔던 관악산 속 지리산이라던 그 계곡이 떠올랐다. 이런 길, 참 좋다. 드문드문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반갑게 인사 나눌 만했다.



반쯤 내려와 계곡 물가 넓적한 바위에 앉아 어제 간호사가 사다 준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이 끼었지만 파래만 보였다. 도시 소음이 멀리서 잉잉거리며 들려오는 곳에 이르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가에 앉아 눈을 감았다. 물소리에 실려 상념이 사라진다. 그 많은 숲에서 오늘처럼 이렇게 오래도록 멈춰 있기는 처음이다. 숲이 내게 하는 말을 듣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망연히 머무른다. 숲과 나 사이 간극이 흐릿해질 즈음 조용히 일어나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 숲을 나왔다.

 

서울대 교정 안팎에 숨은 숲길이 많다. 학생도 교수도 그리 다닐 일 없는지 모르지만 걷는 재미가 쫄깃하다. 학생 생활관 옆으로 갸름하게 난 작은 숲길을 걸어 큰길에 이르면 건너편, 그러니까 관악로와 낙성대길 사이에 관악 마지막 줄기로 보이는 숲이 봉긋 솟아 있다. 포장된 큰 도로를 피할 단순한 목적으로 쑥 들어간 숲인데 한참이나 옹글게 걸었다. 언제나 숲은 생각보다 크다. 언제나 인간은 숲에 폭 둘러싸인다. 가차 없이 파고들어 없애가지만 결국 숲이 없어지면 인간도 없어진다. 거대 자살극으로 질주하는 제국주의 부역 거리와 다시 마주하면서 나는 순식간에 길을 잃는다. 어디로 갈까? 결국 나는 대취한 사람처럼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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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학문 부역 서사만큼 깊고 방대한 이야기는 다시 없다. 그 이야기를 다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내 인생사와 엮어 말할 수 있을 만큼 하고 멈추겠다. 내가 처음 대학에서 공부한 학문은 법학이었다.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5년은 박정희 유신헌법, 아니 유신헌법이 보장하는 긴급조치 체제가 서슬푸르게 작동하던 시기였다. 유신이란 말 자체가 일본 제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서 나왔다는 상징적 사실 넘어 그 시대 풍경 전체가 일제 식민지와 다름없었다, 신입생 시절부터 내가 불가피하게 들어선 영역은 이른바 수험 법학”, 그러니까 사법고시를 위한 정답 찾기 법학(?)이었다.

 

공부가 진행될수록 크게는 법 이념에서 작게는 법조문 문장 표현 방법에 이르기까지 두텁게 맡아지는 일본 냄새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판례 대부분은 일제 메이지(明治·1867~1912), 다이쇼(大正·1912~1926), 쇼와(韶和·1926~1989) 연간 쌓인 제국 법리로서 필수 불가결한 기억 대상이었다.

 

학자로서 법대 교수와 실무자로서 법조인 사이에 갈등이나 알력이 존재할망정 법학 근저와 근간에 놓인 식민지적 모순을 통렬하게 자각한 사람은 거의 전혀 없었다. 이미 견고한 전제로 자리 잡은 부역 정서는 독일, 프랑스, 미국 유학파에게서도 단일하게 나타났다. 거기 이론, 특히 새로운 이론을 번역해 팔아먹기 바빴을 뿐,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여기 정서에 맞는 창조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법 교수 한 사람이 정직하게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귓전을 맴돈다. “독일에서 새 책이 나오면 한국 다른 교수가 사기 전에 아도(あと)’ . 잽싸게 번역해서 내 이름 내건 뒤 책을 풀어 놓지.”

 

나는 지금 거의 반세기 전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 흐르면 변화가 일어나는가. 30년 가까이 지난 뒤 다른 차원 이야기를 해본다. 2003년 한국법제연구원장이 법제처장에게 제출한 연구 보고서 <일본의 법령체계와 입법절차상 법령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1장 서론 제1절 연구의 목적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역사적인 이유가 주된 요인이겠지만 우리의 법령이 일본의 법령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그 잔재가 현행법령 속에 아직 적잖이 남아 있으며, 현재에 있어서도 법제업무와 관련해서 외국 입법례를 참조함에 있어서는 일본의 경우를 거의 예외 없이 살펴보고 있는 것이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일본의 입법제도 내지 법제업무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작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면, 필요한 작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중립적이고 점잖으며 모호한, 그리고 일본식 어법에 절어 있는 세 문장을 조금 수정, 아니 다시 번역해본다.

 

과거에 일본 제국 식민지였던 이유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 법령은 일본 법령에 절대적 영향을 받아왔고, 현재도 식민지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실재가 현행법령 속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법제 업무와 관련해 외국 입법례를 참조할 때도 일본 사례를 거의 빠짐없이 살펴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고려할 때, 일본 입법제도 또는 법제업무를 살펴보는 일은 유익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면, 필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은폐된 의도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 눈으로 20년 지난 오늘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자들이 과연 어디를 향하는지 볼 수 있다. 사회 온 분야가 식민지로 퇴행하고 있는 이때 하필 법학 분야만 다르다고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부역 검찰이 나라를 장악하고 노골적으로 일본과 미국 앞에 엎드린 상황은 우리 기대를 배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학문하는 교수들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법학전문대학원이 왜 생겼는지, 뭐 하는 곳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법학도였던 시절, 법학은 사회과학의 수학이라 믿었던 치기가 그립다. 그리운 만큼 슬프다. 슬픈 만큼 망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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