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험 법() 공부에서 떠났다. 사법고시 일차 시험 합격하고 이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실이 객관적 이유였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다시 했겠지만 나는 단칼에 그만두었다. ‘민주적기본질서를 끌어안은 채 일주일 동안 식음 전폐 고민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고시하면 인생 망치겠구나 하고 깨달은 사실이 주관적 이유였다. 가족서껀 주위 사람 모두가 아까워했지만 나는 표표히 돌아섰다.

 

어디로 갈까? 인생 전복하는 일을 이제껏 걸어온 길이 내게 맞지 않다는 소극적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되었다. 내 인생을 이끌어갈 적극적 동인을 찾아야 했다. 길지는 않았지만 파란 많았던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어렵지 않게 패턴 하나를 찾아냈다. 결정적인 고비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외부 힘이 작용해 내 희망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객관적 풍경은 거듭되는 실패였다. 주관적으로 내 인상에 남은 바는 웅숭깊어 선명하지 않은 어떤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나를 이끌고 신학으로 데려갔다. 가족서껀 주위 사람 모두가 아까워했지만 나는 표표히 그 길로 들어섰다.

 

신학은 나를 새로운 사유 세계로 이끌었다. 고대 히브리어 본문 비평 시간에 내가 느꼈던 놀라움과 부끄러움은 향후 내 공부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공부가 무르익고 그래서 진지해질수록 알 수 없는 공허가 자리 잡아갔다. 공허가 발원한 곳은 신학적 사유 체계 밑바탕에 자리 잡은 서구 형식논리 프레임이었다. 동아시아 논리 실재 기본을 알고 있던 나는 매우 빠르게 호흡 곤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 여성 신학, 생태 신학 같은 성찰이 일어나 각기 열린 영역을 구축하기 전에 나는 이미 신학이 지닌 제국주의 본성을 간파했다. 인도유럽어족이 정치경제학 맥락에서 세운 형식논리를 기반으로 한 일극 집중구조, 인격신 체제,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주의···한국 기독교가 이 모양인 까닭에는 핵심 부역 집단 중 하나인 사람 탓도 있지만 제국주의 후원자 노릇을 한 서구신학 자체 탓이 근본적이다.

 

서구신학이 본성으로 지닌 제국주의는 무엇인가. 제국주의 특히 정착형 식민주의가 지닌 본성은 절멸 전쟁이다. 토착민을 모두 죽이고 정착민을 심는 바로 그 제노사이드다. 제노사이드에는 반드시 테오사이드(theocide), 그러니까 토착민이 섬기는 신을 살해하는 일이 동반된다. 자기 신 말고는 모두 우상이고, 자기 신앙 말고는 모두 미신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신학은 유일·거대·인격·창조신만을 인정한다. 그 신은 네트워킹을 거절한다. 지구상 거의 모든 토착민은 네트워킹으로서 신을 섬기므로, 아니 살아가므로 서구 제국주의 신학은 네트워킹 신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테오사이드는 성공했을까?

 

무슨. 반대로 제국주의 신학이 떠받친 유일·거대·인격·창조신이 사실상 살해당했다. 제국주의 신학이 그동안 펼쳐온 유신론은 사실 처음부터 환유에 불과했고, 결국 도달한 실재는 무신론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도킨스 같은 과학자가 만든 이론이 아니라 서구신학 자체 안에 내포된 실재다. 무신론은 제국주의를 위하여 계속 환유 신학을 병기로 활용한다. 이 신학적 배반과 도착은 예정된 운명을 따른다. 결말은 휴거가 아니다.

 

부역 신학은 태생적으로 비대칭 대칭 세계를 모른다. 비대칭 대칭 역설만이 부역을 끝장낼 수 있다. 부역을 끝장내기 위해 우리는 유신론 신학과 무신론 신학(!)을 가로지른다.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금을 타고 부활하는 신이 바로 네트워킹 신이다. 네트워킹 신은 초월(창조주)과 내재(피조물),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동물과 식물, 식물과 지의류, 지의류와 말류, 말류와 균류, 균류와 세균, 세균과 바이러스를 넘나든다. 자유, 평등, 평화, 창발로 호혜 공생하는 비대칭 대칭 사건이자 구조다. 각성한 눈으로 보면 보이는 이 신을 우리는 오랜 옛날부터 바리라고 불러왔다. 반제국주의 바리신학을 원효는 화쟁이라 불렀다. 우리는 이 참된 신학을 살해하고 제국주의 사이비 신학에 부역하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대로 그냥 살아가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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