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학문 부역 서사만큼 깊고 방대한 이야기는 다시 없다. 그 이야기를 다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내 인생사와 엮어 말할 수 있을 만큼 하고 멈추겠다. 내가 처음 대학에서 공부한 학문은 법학이었다.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5년은 박정희 유신헌법, 아니 유신헌법이 보장하는 긴급조치 체제가 서슬푸르게 작동하던 시기였다. 유신이란 말 자체가 일본 제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서 나왔다는 상징적 사실 넘어 그 시대 풍경 전체가 일제 식민지와 다름없었다, 신입생 시절부터 내가 불가피하게 들어선 영역은 이른바 수험 법학”, 그러니까 사법고시를 위한 정답 찾기 법학(?)이었다.

 

공부가 진행될수록 크게는 법 이념에서 작게는 법조문 문장 표현 방법에 이르기까지 두텁게 맡아지는 일본 냄새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판례 대부분은 일제 메이지(明治·1867~1912), 다이쇼(大正·1912~1926), 쇼와(韶和·1926~1989) 연간 쌓인 제국 법리로서 필수 불가결한 기억 대상이었다.

 

학자로서 법대 교수와 실무자로서 법조인 사이에 갈등이나 알력이 존재할망정 법학 근저와 근간에 놓인 식민지적 모순을 통렬하게 자각한 사람은 거의 전혀 없었다. 이미 견고한 전제로 자리 잡은 부역 정서는 독일, 프랑스, 미국 유학파에게서도 단일하게 나타났다. 거기 이론, 특히 새로운 이론을 번역해 팔아먹기 바빴을 뿐,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여기 정서에 맞는 창조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법 교수 한 사람이 정직하게 털어놓았던 이야기가 지금까지 귓전을 맴돈다. “독일에서 새 책이 나오면 한국 다른 교수가 사기 전에 아도(あと)’ . 잽싸게 번역해서 내 이름 내건 뒤 책을 풀어 놓지.”

 

나는 지금 거의 반세기 전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 흐르면 변화가 일어나는가. 30년 가까이 지난 뒤 다른 차원 이야기를 해본다. 2003년 한국법제연구원장이 법제처장에게 제출한 연구 보고서 <일본의 법령체계와 입법절차상 법령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1장 서론 제1절 연구의 목적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역사적인 이유가 주된 요인이겠지만 우리의 법령이 일본의 법령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그 잔재가 현행법령 속에 아직 적잖이 남아 있으며, 현재에 있어서도 법제업무와 관련해서 외국 입법례를 참조함에 있어서는 일본의 경우를 거의 예외 없이 살펴보고 있는 것이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일본의 입법제도 내지 법제업무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작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면, 필요한 작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중립적이고 점잖으며 모호한, 그리고 일본식 어법에 절어 있는 세 문장을 조금 수정, 아니 다시 번역해본다.

 

과거에 일본 제국 식민지였던 이유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 법령은 일본 법령에 절대적 영향을 받아왔고, 현재도 식민지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실재가 현행법령 속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법제 업무와 관련해 외국 입법례를 참조할 때도 일본 사례를 거의 빠짐없이 살펴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고려할 때, 일본 입법제도 또는 법제업무를 살펴보는 일은 유익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면, 필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은폐된 의도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 눈으로 20년 지난 오늘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자들이 과연 어디를 향하는지 볼 수 있다. 사회 온 분야가 식민지로 퇴행하고 있는 이때 하필 법학 분야만 다르다고 추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부역 검찰이 나라를 장악하고 노골적으로 일본과 미국 앞에 엎드린 상황은 우리 기대를 배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도 학문하는 교수들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법학전문대학원이 왜 생겼는지, 뭐 하는 곳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법학도였던 시절, 법학은 사회과학의 수학이라 믿었던 치기가 그립다. 그리운 만큼 슬프다. 슬픈 만큼 망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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