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국주의 신학 공부에서 떠났다. 학위 논문 쓰기를 포기한 사건이 객관적 분기점이었다. 제국 학문으로 사는 식민지 인간인 내가 싫어 내 생태 품은 전승 줄기를 찾고자 세운 목표가 주관적 분기점이었다. 교수서껀 동학도 모두가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표표히 돌아섰다.

 

어디로 갈까? 다시 인생 전복하는 일을 이제껏 걸어온 길이 또 내게 맞지 않다는 반복적 소극적 판단에만 맡겨서는 안 되었다. 내 인생 이끌어갈 마지막 적극적 동인을 찾아야 했다. 돌이켜보면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내게는 다른 동학도들과 반대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눈이 활짝 열렸다. 나와 생태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오늘 여기 사람에게 오늘 여기 눈으로 주의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불현듯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초군초군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 제국 학문에 넘어가고 남은 딱 하나가 그때 내 눈에는 한의학뿐이었다. 한의학으로 가는 길도 딱 하나 수능시험을 다시 치고 한의대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아내서껀 제자들까지 무모하다고 했지만 나는 표표히 그 길로 들어섰다.

 

40대 중반에 들어가 마주한 한의학 첫인상은 사뭇 좋지 않았다. 시대착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전(황제내경) 숭배, 사전(동의보감) 중독, 신비주의(우주 변화의 원리), 그리고 이들과 유연하게 섞이지 않은 채 한쪽 경계를 무너뜨리고 막무가내 들어앉아 생경한 제 말만 쏟아내는 서구의학이 나뒹굴며 어수선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식민지 학문 판 전형이었다.

 

한의대 학생은 양의대 편제와 똑같은 6(예과 2, 본과 4) 동안, 한의학과 더불어 이른바 기초과학, 기초양의학, 양의학을 공부해야 한다. 각과 교과서는 한의학과 양의학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양의대 학생은 한의학 ㅎ자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한의학을 의학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의학, 그러니까 제국 의학을 보편 의학이라고 굳게 믿는 식민지 부역 집단에서 일어나는 난치성 도착증이다. 국가가 이를 묵인, 아니 공인하고 있다. 조선이 망해갈 무렵부터 시작돼 식민지 시대, 군정, 역대 부역 정권을 거치면서 미국 체제로 굳어진 의학, 국민 보건·의료체계상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의학이 지구를 점령했다고 해서 보편 의학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제국주의 통치 이념 앞에 머리 조아린 의학이라면 그 내용이 지닌 편파·편협성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다. 물론 편향성은 어떤 의학에도 존재한다. 그 진실을 외면하면 전향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식민지 한의학도로 살면서 나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부역하고 있는지 처절하게 직시한다. 그런 만큼 철저하게 제국 의학을 들여다보고, 한의학을 들여다본다. 매일 아침 제국 의학 동향을 살피는 일로 하루를 연다. 그 일이 한의사인 내게 무엇인지 물으며 하루를 닫는다. 나는 제국 의학이 깡그리 망하는 날을 고대하지 않는다. 실낱같은 기대 하나 한다면 저들이 한의학에 정중히 대화를 청하는 일이다. 예상되는 결과는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여기 알라딘 서재 녹색의학 이야기(2017.8.22.~2018.6.7.)에 제국 의학 실상을 밝히고 그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했다. 지금은 더 확장된 관지에서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 쓰고 있는 이 글 전체가 끝나서 단행본 형태를 띠게 될 경우, 녹색의학 이야기내용을 이 문단 바로 다음에 전재할 생각이다. 물론 현재 이 문단 내용을 아래와 같이 바꾼 다음에 말이다.

 

한의사로서 환자한테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어. 소용없더라고. 그래서 침이나 한번 맞아볼까 해서···.’ 안 해본 게 없는 이것저것이란 결국 제국 의학 온갖 요법이다. 한번 맞아볼까 하는 침은 그러면 마지막 희망일까, 밑져야 본전일까? 이렇게 오는 사람은 두어 번 침 맞으면 반드시 으르댄다. ‘왜 차도가 없어?’ 이런 풍경은 누구에게든 익숙하다. 나는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경우 해명은 변명으로 매도된다. 단도직입 온갖 요법본성을 현백하고, 그러면 진짜 대안이 뭔지 명백히 한다. 이제 그 세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