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풀을 염두에 두고 숲이라 표현해도 산은 산이고, 산은 마을 뒷산일망정 숨 몰아쉬며 올라야 할 곳이 있게 마련이다. 관악은 어디서든 쉽지 않다. 주말이면 늦은 저녁 라이트를 켠 구조 헬리콥터가 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관악에 들려 하면 일단 기본 긴장감으로 준비해야 한다.

 

오늘은 과천 관문천 계곡에서 들어가 서울대 저수지가 있는 계곡으로 나올 계획이다. 과천역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와보니 아파트가 모두 고층으로 바뀌어 있다. 길이야 바꿀 수 없었을 테니 내 발걸음은 편안했다. 과천 향교에 이르러서는 지도를 보며 계곡 길로 들어섰다.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입구에는 벌써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로 왁자할 만큼 도심처럼 붐비고 있었다.

 

언제나 풍경은 새롭고 경이롭다. 연신 걸음 멈추고 보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들어간다. 마침내 그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지점에 이르렀다. 지도에 점선으로 나타나는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 참 좋다.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 네 사람 만났을 뿐이다. 그중 둘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다소 겁먹은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오고 있었다. “잘못 온 거 아니야? 길이 맞기는 해?” 가까이 다가와 눈이 마주치길래 내가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길이지만 길 맞습니다. 안심하고 가세요. 곧 큰길과 만납니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연거푸 하면서 표정을 환하게 풀었다. 산에서 주고받는 이런 선물은 아연 유쾌하다.

 

능선을 넘어 내려갈 길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계곡 길이다. 진입로를 쉽게 찾지 못해 다른 길로 가다가 아무래도 지나왔지 싶어 되돌아가는데 마침 가고자 하는 방향에 빽빽한 수풀 사이로 얼핏 사람 모습이 보였다. 길은 거기 있었다. 초입이 거의 가려져 있고 경사가 가팔라 대부분 길이 아닌가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조심스레 내려가니 지난주 갔던 관악산 속 지리산이라던 그 계곡이 떠올랐다. 이런 길, 참 좋다. 드문드문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반갑게 인사 나눌 만했다.



반쯤 내려와 계곡 물가 넓적한 바위에 앉아 어제 간호사가 사다 준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이 끼었지만 파래만 보였다. 도시 소음이 멀리서 잉잉거리며 들려오는 곳에 이르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가에 앉아 눈을 감았다. 물소리에 실려 상념이 사라진다. 그 많은 숲에서 오늘처럼 이렇게 오래도록 멈춰 있기는 처음이다. 숲이 내게 하는 말을 듣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망연히 머무른다. 숲과 나 사이 간극이 흐릿해질 즈음 조용히 일어나 손과 얼굴을 씻은 다음 숲을 나왔다.

 

서울대 교정 안팎에 숨은 숲길이 많다. 학생도 교수도 그리 다닐 일 없는지 모르지만 걷는 재미가 쫄깃하다. 학생 생활관 옆으로 갸름하게 난 작은 숲길을 걸어 큰길에 이르면 건너편, 그러니까 관악로와 낙성대길 사이에 관악 마지막 줄기로 보이는 숲이 봉긋 솟아 있다. 포장된 큰 도로를 피할 단순한 목적으로 쑥 들어간 숲인데 한참이나 옹글게 걸었다. 언제나 숲은 생각보다 크다. 언제나 인간은 숲에 폭 둘러싸인다. 가차 없이 파고들어 없애가지만 결국 숲이 없어지면 인간도 없어진다. 거대 자살극으로 질주하는 제국주의 부역 거리와 다시 마주하면서 나는 순식간에 길을 잃는다. 어디로 갈까? 결국 나는 대취한 사람처럼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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