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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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을 때는 너무 난해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 대단히 중요한 무엇이 써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몇 쪽씩 읽었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2주 정도 읽으니까 이상하게도 다음에 어떤 문장이 이어질지 알 수 있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그 예상이 딱 맞아떨어지면, “, 역시 그렇군!” 하며 감동하게 됩니다.......저자 사고회로에 순간적으로 동조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감이 잡힌다는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글쓴이와 호흡이 일치하고 심장 고동이 같이 울리며 다음 말이 자기 입에서 튀어나오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해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91~92)

 

훌륭한 문장은 그 속에 신체를 담그고 있으면 속으로 파고들어옵니다.

  그렇게 파고들어오는 실재는 의미가 아닙니다.......‘텍스트 신체입니다. 텍스트 신체에 내 신체가 반응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읽는 행위는 진실로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호흡, 리듬, 촉감 같은 텍스트 신체를 경유해 이윽고 의미에 다다릅니다.(94)


 

20대 후반 나는 처음으로 어떤 책을 읽다가 다음 내용을 예측해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유난히 그 글은 처음부터 문맥이탈digression이 심했다; 끝까지 그랬다. 그럼에도 모름지기 존재하는 어떤 파동이 감지되었다. 어딘가 길목을 돌다가, 다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이 책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내용이 우당탕 들이닥쳐서 감동했었다.

 

거의 4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번에는 노래를 들으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물론 그 노래를 그때 처음 들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다음 멜로디가 마치 이른바 ‘18처럼 친근하게 떠올랐다.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 결코 아니다. ABBA가 부른 <The Way Old Friends Do>라는 노래다. ABBA가 지구촌을 들었다 놨다 할 때도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도 유명해서 오며가며 귀에 들어와 있는 몇 곡 일부 멜로디를 기억할 뿐, 전곡을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단 한 곡도 없다. 그 중에서도 <The Way.......>는 아예 제목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 멜로디가 너무도 착착 감겨와 그 노래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색을 통해 가사를 알게 되었고, 서너 번 되풀이해서 부르자 그대로 기억 속으로 들어와 앉았다. 커닝하지 않고 온전히 부를 줄 아는 유일한 팝송이다.

 

더 감동적인 경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원효에 심취해 그와 관련된 허다한 글들을 읽으며 몇 년을 지냈다.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효 연구 수준이 형편없이 낮아서였다. 마침내 작심하고 그 어렵다는 금강삼매경본문을 백문으로 마주했다. 무엇보다 먼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자가 무차별로 쏟아져 나오는 데 앞이 캄캄했다. 그 다음은 글자 하나하나 찾아도 단어, 숙어, 문장, 나아가 문맥 전반을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불가피하게 그런 뇌 작업을 포기했다. 다시 정좌하고, 모른 채 그림(!)에 낱낱이 눈 도끼를 찍으며 막무가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절망이다 싶은 어느 순간, 갑자기 문단 전체를 한 눈으로 찍는 일이 일어났다. 정작 온몸에 소름 돋는 일은 바로 그 다음 순간 일어났다. 그 뜻이 몸속으로 술술 흘러들어온다!

 

지금 다시 금강삼매경본문을 백문으로 마주하면 처음 상황과 비슷할 터. 그러나 그때 내 속을 파고 들어온 텍스트 신체는 향후 내 인생 전체를 밝히고 지탱하고 성장하게 했다. 내게 새겨진 의미가 다른 해석·실천과 대비해 수준이 낮다거나 심지어 오류라는 근거는 아직 어디서도 찾지 못했으니 이만하면 내 독서는 뇌 독서가 아니고 신체 독서라 신뢰해도 되지 않을까. 자랑이 자만 턱밑까지 왔다 싶은 바로 이때 내 안와전두엽을 두드린다.

 

뇌로 읽으면 독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뇌 독서로도 새로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뇌 독서는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재확인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재확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뇌가 소화하는 진리는 형식논리고 형식논리는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동어반복도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에 빠진 상태가 바로 중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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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입으로 하는 말과 신체가 발신하는 메시지가 다른 경우를 종종 마주합니다. 그때 어느 쪽을 신뢰할까.......대부분 사람은 말을 좇아갑니다.(89~90)

 

이중구속을 언급한 <2. 작아서 높다>에서 미세한 징후가 지닌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 미세한 징후가 바로 여기 신체가 발신하는 메시지다. 신체가 발신하는 메시지는 왜 미세, 또는 미세하다 할까? 이 또한 비대칭대칭이다: ‘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소통해온 인습이 신체 메시지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문명·사회적 근거와 말은 중추신경 영역이므로 macro하고, 신체 메시지는 말에 직접 수반되는 변화를 제외하면 모두 자율신경과 장신경 영역이므로 micro하다.’라는 자연·생리적 근거 사이.


남성, 자아, 이성, 형식논리가 지배해온 인류 역사는 곧 말이 지배해온 역사다. 말이 거대하고 강력한 이유는 통치 집단이 말을 그런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이다; 문자를 전유하고 의미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도 본질은 불변이다. 이런 광풍에서 비껴난 소수 민족, 예컨대 북미대륙 선주민은 신체 메시지를 미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중추신경은 human-biont인간이 통어하므로 직접 지각이 쉽다. 자율신경과 장신경은 인간이 통어하지 못하고, 특히 장신경은 micro-biont인 곰팡이나 박테리아, 심지어 바이러스가 통어하므로 직접 지각이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심장 박동 정도는 훈련된 사람이 맥을 짚어야 어느 정도 다양한 신호를 감지하고, 나머지 경우는 크게 병들지 않으면 대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어쩌면 장구한 시간 동안 우리 무지로 방치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유념하고 극진히 두드려야 할 문이 아닐까.

 

입에서는 행복하다는 말이 흘러나오는데 신체가 숲으로 들어가 흙을 가만가만 만지고 있을 때, 거기서 우울증 읽어내는 감각이라면 연마하지 않아도 지녀야 할 시기가 박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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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수줍음 타는 아이를 자기표현 잘 하고 자기결정 할 수 있고, 자기의견 척척 말할 줄 아는 아이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자기의견을 말하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세요. 자유와 권리를 찾으세요.”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자기정체성, 자유, 욕망 따위는 모두 뇌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뇌는 어딘가에서 남 이야기를 가져와 다만 출력할 뿐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해보라 하면 지겨울 정도로 틀에 박힌 이야기만 합니다.......본인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자유를 구사하는 방식이 무서울 정도로 똑같습니다.......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림은 신체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체가 뇌 폭주를 저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86~87)


 

흔히 성격처럼 인식되지만 수줍음은 사회 감응이다. 경험에서 나왔다면 더욱 그렇다. 남 앞에서 말이나 행동하는 일은 물론, 남과 마주하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일은 바탕에 사회 공포·불안을 깔고 있다. 사회 공포·불안은 사회가 본성상 Anon-A 비대칭대칭이 전방위·전천후로 뒤엉키는 현장이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불가피한 공포·불안을 불가결한 삶의 요소로 받아들이고 가꾸면서 살아야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인간다울 때 비로소 풍요가 선물로 찾아든다. 풍요로운 인간은 지겨울 정도로 틀에 박힌 이야기, 무서울 정도로 똑같은 방식으로 구사하는 자유, 어딘가에서 남 이야기를 가져와 다만 출력할 뿐인 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뇌가 폭주하려 할 때, 신체를 활발히 작동시켜 저지한다. 신체가 활발히 작동하면 Anon-A 비대칭대칭이 전방위·전천후로 뒤엉키게 된다. 뒤엉킴이 일으키는 complex system networking에서는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뇌 독재를 불허하기 때문이다.

 

뇌 독재를 불허해서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리는 감응을 수줍음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현재로는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수줍음이라는 말 자체 좋은 어감과 달리 미덕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가 사라져버렸다. 왜곡 오염된 수줍음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몸이 배배 꼬이는 계집아이를 연상시키는 경계 안에 갇혀 있다.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지 않고, 수줍음으로써 이 경계를 넘어가려면 정의를 바꿔야 한다. 정의를 바꾸는 일은 사전 문제가 아니다. 언어공동체 공유 인식 문제다. 공유 인식은 공유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공유 경험은 뇌 독재를 벗어나 신체감성을 회복하는 사건이다. complex system networking이 일으키는 생명 연방 민주주의 사건을 겪으면 수줍음은 자연스럽게 미덕을 되찾으리라. 수줍음 미덕은 아름다운 인간학이지만 그 길은 낭·풀로 돌꽃으로 말로 곰팡이로 뻗어 있다. 섬세하고 강인하게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수줍음 신성으로 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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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7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18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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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은 신체 쾌락에 자신을 내맡긴 채 뇌를 전혀 쓰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신체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신체는 완전히 죽었고, 뇌만 살아 있습니다.(68~69) 저는 자기 신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습니다. 자기 신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은 지금 내 신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 메시지를 주의 깊게 듣는 일입니다.......뇌로 생각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신체에게 물어야 합니다.(72) 신체적으로 둔한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둔해집니다.......사회적으로 둔해지는 일은 인간에게 치명타입니다.(80)

 

뇌는 정신이다. 그 역은 아니다. 이 진리를 몰라 요즘 젊은이들은 신체적 쾌락에 자신을 내맡긴 채 두뇌를 전혀 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저들이 말하는 신체 쾌락은 신체를 숙주로 기생하는 뇌-정신 쾌락이다. 우치다 타츠루가 완전한 죽음을 천명한 신체는 엄밀히 말해 신체-정신이다. 신체와 정신이 둘이자 하나인 온전한 상태로 복귀하려면 신체-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이를 일러 자기 신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경의를 표하려면 경청해야 한다. 경청하려면 질문해야 한다. 신체에게 묻는 사람은 신체감성이 높다. 신체감성이 높은 사람은 사회감성이 높다. 사회감성 높은 사람이 참 사람이다.

 

이 이치가 빈틈없다는 사실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내 신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고 귀 기울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은 본디 하나였다. 지금은 둘이다. 물론 사람에게만 그렇다. 원인은 이미 다 아는 바다. 이를 자꾸 되뇌는 일도 뇌-정신 짓이다. 단도직입 신체에게 질문하는 일, 오직 여기로만 향해야 한다. 질문은 특정 의문문 문장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모든 감각 문을 열어, 맞이하고, 받아들이고, 흔들고, 바꾸고,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고, 느낌대로 움직이고, 고마워하는 길로 나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코 댄다. 혀 댄다. 살 댄다. 귀 댄다. 눈 댄다. 언어가 들이닥치기 직전 찰나, 활짝 펴서 한껏 실컷 맞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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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도에 추수推手라는 훈련법이 있습니다. 서로 손을 맞대고 을 보내기도 하고, 받아넘기기도 하는 수련법입니다. 무술에서는 힘을 표현할 때, ‘을 구분합니다. 역은 신체적인 힘, 근육이나 골격에서 나오는 힘으로, 우리는 그 힘을 써서 무엇을 치거나 잡거나 합니다. 경은 다릅니다. 경은 미세한 진동 같아서 상대방 신체 속으로 스며듭니다.(66)

 

경도 일종의 타격이어서 정면으로 맞으면 휙 날아갑니다. 미세하게 쪼개 부드럽게 들음聽勁으로써 자신이 입는 상해를 거의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경을 내보낼 때는 반대로 60조 개 세포로 분산됐던 힘을 한 점으로 모아 상대방 신체에 똑바로 보냅니다. 들을 때는 ‘1/60로 바꾸고, 내보낼 때는 다시 ‘1’로 되돌린 다는 말입니다. 자기 신체를 한없이 미세하게 쪼개고 다시 포개 하나로 되돌리는 일, 즉 분해와 통합을 반복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아주 기분 좋은 일입니다.(67)

 

아주 기분 좋은 일은 타격인 경을 1로 내보내 상대를 휙 날아가게 해 승리할 때만이 아니라, 1/60조로 받아 상해를 거의 받지 않고 패배할 때도 일어난다. 이 좋은 기분은 40년 동안 합기도 수련을 해온 우치다 타츠루 정도나 돼야 감지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평범한 사람은 꿈에서도 잘 느끼지 못한다. 경은 파동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이고 역은 입자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이해야 조금 더 잘 되겠지만, 경을 현실화해서 전달하는 일은 오히려 더 아득해진다. 미세한 진동 같아서 상대방 신체 속으로 스며드는 힘이 상대방 신체를 휙 날아가게 한다는 말에 신경 쓰면 감각은 마비무인지경 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아주 기분 좋기는 일사 글렀다. 무도 고수로서 사람과 대련하거나 싸울 수 없는 내게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나는 질병, 정확히는 질병에 걸린 신체와 정신을 마주하는데 거기에 다른경을 보낼 수 있다면, ‘다른식으로 아주 기분 좋은 일을 일으키리라. 우선, 침 이야기부터


침은 본성상 역이 아니고 경이다. 극미한 침습으로 커다란 치료 네트워킹을 유발한다. 물론 쪼개고 포개는 데 따라 전혀 다른 방식과 방향으로 신체 속으로 스며든다. 아픈 사람이 누운 상태에서 피부 표층에만 극히 약한 자극을 주면 효과는 국소적으로 나타나며 몸을 이완시키는 부교감신경 활성을 높여준다. 쪼개는 방식이다. 아픈 사람이 앉은 상태에서 근육으로까지 깊이 강한 자극을 주면 효과는 전신적으로 나타나며 몸을 긴장시키는 교감신경 활성을 높여준다. 포개는 방식이다. 모호한 또는 착종된 질병도 존재한다.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쪼개는 방식을 앞에, 포개는 방식을 뒤에 배치한다. 거꾸로는 안 된다. 자율신경과 관련한 부분만 언급한 이 현대 과학적 설명에 앞서 장구한 세월 동안 존재해온 경락 이야기가 있다. 경락은 신경, 혈액, 림프로 나뉘어 진화하기 이전 통신체계를 담은 조상 실재로 당연히 후손과 기본적인 본성 일치를 이룬다. 이런 이치를 섬세하게 따르면서 아픈 사람과 더불어 가는 일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이번에는 한약 이야기. 근본적으로 역일 수밖에 없는 인공 화학합성물질 양약과 대비해보면 한약 역시 기본적으로 경이다. 한약이 작동하는 원리 전반이 침과 같음은 자연스럽다. 식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닌 독을 극미량 이용함으로써 커다란 치료 네트워킹을 유발한다. 이는 한약이 동종의학 이치를 따른다는 말이다. 동종의학 이치는 본성상 파동(공명)이며 소식(소통)이다. 이런 이치를 섬세하게 따르면서 아픈 사람과 더불어 가는 일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마지막은 당연히 숙의(상담) 이야기. 한의사지만 숙의치유자인 내게는 이 이야기보다 귀한 다른 무엇은 있을 수 없다. 서구 상담은 숙의가 아니다. 그 본성은 역이며 기축은 일극집중이다. 일극집중 입자의 역에서 숙의는 존재 배반이다. 그 상담자가 아픈 사람 말을 듣는 이유는 자기 말을 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숙의자로서 내가 말하는 이유는 아픈 사람 말을 듣기 위해서다. 듣기 위해 하는 말은 역일 수 없다. 1인 경일 수도 없다. 1/60조인 경이다. 사람도 병도 한 방에 휙 날아가게 하면 안 된다. 마음병은 이야기며 역사기 때문에 한 방에 휙 날아갈 수 없는 본성을 지닌다. 내게 아픈 사람이 하는 말은 무엇인가. 대개 역이다. 많은 경우 1인 경이다. 나는 상해를 입는다. 상해 입을 각오를 하고 이 일을 한다. 상해를 견뎌내며 아픈 사람 말을 역에서 경으로, 1 경에서 1/60조 경으로 바꿔낸다. 숙의는 공생 길을 찾아가는 복잡한사람들이 벌이는 놀이며 제의다. 이런 이치를 섬세하게 따르면서 아픈 사람과 더불어 가는 일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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