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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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아와 개인 의지보다 우월한 지성, 곧 우리 발달을 인도하기 위해 무의식적 보상을 통해 작용하는 개인 실현은 내적 발달이 지닌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다.......우리 자아가 스스로 확장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큰 지혜가 베푸는 인도를 따른다는 일은 얼마나 경이롭고 영묘한가!(46) 개성화 과정을 실현하고 구현하는 일은 인생 최고 목표다. 자아는 그 원초적 지혜와 의미,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광채, 즉 자기와 대화를 발전시켜야 하고 의식적으로 일상 활동 속에서 전체성인 자기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47)

 

본론을 시작하면서 저자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개성화: 무의식적 보상>이다. 인생 최고 목표라 한 만큼 개성화가 선두에 서는 일은 당연하다. 개성화는 무의식적 보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큼 무의식적 보상에서 개성화를 풀어낸다. 문제는 무의식적 보상, 개성화란 말 자체가 독자들에게 쉽게 접수되지 않다는 데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그다지 친절을 발휘하지 않는다. 번역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건너뛴 친절을 스스로 챙겨 디디면서 시작한다.

 

무의식적 보상에서 어려운 말은 의외로 무의식이 아니라 보상이다. 보상은 남에게 끼친 손해를 갚거나補償 진 빚 또는 어떤 대가를 갚다報償는 인과적 의미가 우리 언어공동체에게 일차적으로 공유된 의미다. 융이 쓴 Kompensation과는 다른 말이다. 왜 보상이라는 번역어가 무비판적으로 답습되고 있을까? 최초로 오역한 사람이 지닌 권위 때문 아닐까 싶다. 의식이 일극으로 치우쳐 있을 때 무의식이 비인과적 대극 운동으로써 전체성을 기하는 일이므로 보정補正이 본디 의도에 가장 가까워보인다. 내 고유 용어로 하면 비대칭대칭운동이다.

 

저자는 의식에 대한 무의식적 보상을 현대우주론으로 은유한다. 가시적 우주에 비해 질량이 9배 이상인 비가시적 우주가 우주발달을 지배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은유 이상을 말한다. 인간 뇌에 비해 제공 정보 9배 이상인 장, 정확히는 장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미소생명이 인간 정신발달을 지배한다. 의식 종합터미널이 뇌고 무의식 종합터미널은 장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미소생명네트워크이므로 이는 은유가 아니라 인간실재다.

 

개성화도 번역이 어정뜨다. ‘개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우리 언어공동체 뜻과 감각이 융 자신이 의도하는 바에 매끄럽게 배어들지 않는다. 다른 용어로 번역하더라도 Individuation에 대한 인도유럽어 공동체가 구성하는 Individuum 내포를 치밀하게 톺아봐야 한다. 융이 지닌 본디 개성화라고 해서 개체와 전체 관계를 전혀 다른 관지로 접근하는 언어공동체에게 아무런 여과 없이 전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융 개성화 한계를 비판하고 그 너머 대극합일을 말하는 맨스필드도 이 부분에서 본질상 확연하게 다르지 않다.

 

융도 맨스필드도 인간 개체를 human-biont로 보는 낡은 패러다임 안에 있다. 개성화도 jivan mukta도 그렇다면 뇌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human-biont와 공생하는 억조 미소생명을 누락시킨 개인 실현자기 이상도 배타적 인간중심주의를 맹렬하게 드러낼 뿐이다. 우리 하나하나에 개인은 없다. 우리 낱낱에 자기는 없다. 이미 우리는 우주와 그 너머 세계 심이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진리로 사건하고 있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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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에 나는 서울둘레길 제1(수락산-불암산)구간을 걸었다. 시가지 통과하는 부분을 제외했음에도 22km가량으로 6시간 남짓 걸렸다. 버섯(곰팡이) 사진 찍고, 점심 먹은 시간 빼면 대략 4시간 반 정도를 걸은 셈이다. 둘레길 걷기 중에서는 가장 오래 숲에 머물렀다.


 

수락산(637m)은 서울, 의정부, 남양주에 걸쳐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천도하자 한양을 등지고 돌아앉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석산으로 숲이 울창하지 않은 풍경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잠시 그 허리를 돌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는 석산이든 토산이든 큰 차이가 없다. 버섯 ritual 행하는 내게라면 전반적으로 다소 메마른 상태가 감지되는 정도다. 채석장이 있었다는 곳을 지날 때는 인간에게 석산은 이런 거구나, 했다.






불암산(508m)은 서울, 남양주에 걸쳐 있다. 덕릉고개를 경계로 수락산과 남북을 이룬다. 중 모자를 쓴 부처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은 왕을 지키는 산이라 여겨 태릉, 광릉, 동구릉, 강릉 등이 주변에 퍼져 있다. 거대한 암벽과 기이한 바위가 많은데 거기다 이름을 붙이고 기도를 하고 불상을 놓았다. 산에서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느낌상 더는 오르막이 없지 싶은 지점부터 연유 모를 철망으로 양쪽을 막은 길이 늘어서기 시작한다지루함이 불쾌감으로 바뀔 쯤돌연 고층 아파트 회색이 숲 녹색을 찢고 들이닥친다도시 습격은 늘 이렇다둘레길 여정이 끝나 간다서울 숲들이 아연 가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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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형성하는 세계관, 곧 과학적 물질주의는 실재에 대해 죽은, 그리고 죽어가는 이상이다. 이런 세계관은 자연에서 영혼을 배격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축소해버린다. 과학과 기술공학은 여러 차원에서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가져온 변화는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이다. 물질주의 세계관이 물리적이고 심리적이며 영적인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다수가 동조한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간관, 자연관, 그리고 이 둘 사이 상호교류가 필요하다.(35)

 

저자인 Victor Mansfield는 명문 Cornell University에서 공부해 천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Liberal Arts College(LAC) 가운데 최상급으로 이른바 Little Ivies라 분류되는 Colgate University 물리학·천문학과 종신교수 직에 있다. 그러면서도 깊이 영성을 연구해 심지어 미국은 물론 인도에서까지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 출중한 성공은 그가 하는 말을 쉽게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공신력으로 작용한다.

 

저자가 서론에서 드러낸 문제의식은 인류가 당면한 중차대한 위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더군다나 자신이 물리학자면서 과학적 물질주의 요체를 내파하고 영성 문제를 거론한다. 당연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전선에 서 있기도 하다. 최전선에서 그가 제시한 큰 그림은 새로운 인간관, 자연관, 그리고 이 둘 사이 상호교류. 십분 지당하다. 쉽지 않은 이론과 쉽지 않은 실천을 예고하고 있다. 만사가 그러하듯 바로 이런 강점에는 그만한 아킬레스건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평범한 독자는 거기까지 읽어내야 한다.

 

저자는 독자 대부분과 달리 지구촌 중심, 거기서도 상위에 있는 비범한 사람이다. 국가, 학문, 직업, 인종 모두에서 그렇다. 가운데 있으면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위에 있으면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세계가 변하는 일은 늘 가장자리, 아래서 시작된다. 중심과 상위는 일극집중으로 흘러가기 쉬워 변화다운 변화, 그 진경을 상상하기 어렵다. 변방 하위가 지니는 상상적 특권에 유념해 읽으면 지식이 모자라도 넘치게 깨칠 수 있다.

 

변방 하위에서 곡진하게 물어본다.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가장자리 아래서 옹글게 물어본다. 자연은 과연 무엇인가? 동시성은 이 질문에 과연 대답할까, 한다면 어떻게 할까? 양자물리학과 불교, 그리고 철학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모든 의문을 결곡하게 하려 할 때 필요한 일은 지식 확충이 아니라 관지 확증이다. 누구도 보편이지 못하다. 개체 맥락을 끌어안고 질문하며 대답할 뿐이다. 다른 경우와 달리 내가 이 문제를 서론부터 꺼내는 이유는 모름지기 이 문제가 묵시록적 징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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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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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가 쓴 소통하는 신체를 읽다가 홀연히 마주한 동시성 문제에 좀 더 깊이 다가가려고 나는 미국 콜게이트 대학 물리학·천문학과 교수인 빅터 맨스필드가 쓴 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Synchronicity, Science, and Soul-making: Understanding Jungian Synchronicity Through Physics, Buddhism, and Philosophy를 읽었다. 두 번 읽고 나서 주해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도 저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다. 양자역학 부분이 힘에 부치겠지만 불교 부분이 힘에 부친 저자와 피장파장이니 품앗이다.

 

돌이켜보면 동시성은 내게 인지하지 못한 많은 순간 동시성적으로 다가왔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중하게 기억하는 일만으로도 나는 동시성이 온전한 과학이며 경험적 실재라는 진리 앞에 엎드린다. 비인과 인연을 타고 동시성은 다시 동시성적으로 내게 다가와 우치다 타츠루와 낭·풀과 4·16을 가로질러 소통 은총을 내리고 있다. 나는 분명히 길을 찾았으며, 그 길을 나섰으며, 그 길로 갈 터이고, 그 길에서 동시성적 반야에 깃든다.

 

동시성 맹아 한 낱을 붙들고 시작한 공부가 실로 근 50년 만에 마지막 꽃을 피우려 한다. 50년 동안 나는 대학과 대학원을 2군데씩 17년을 다녔으며, 그에 따라 직업을 바꾸었다. 50살 넘어 한의사가 된 이래 한의사 너머 상담치유자로 살아왔고, 지금 다시 산 자와 인간 경계까지 넘어가려 한다. 나는 이 곡절을 바리데기 여정이라 부른다. 천명이라 여기므로.

 

천명은 다만 내 개인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 생명 자체가 억조 생명 공동체고 그 사실은 지구생태계 전반은 물론 우주 저 끝까지 번진다. 천명에 충실한 삶은 당연히 항생제, 플라스틱, , 기후 재앙 물리칠 근원혁명을 추동하는 격이 된다. 격 아니면 인간 아니다.

 

격 인간으로 살기 위해 나는 한껏 야젓하고 실컷 앙칼지게 동시성 지성소로 들어간다. 다른 꿈은 살지 않는다. 다른 잠은 죽지 않는다. 내 존엄은 여기다. 내 기다림은 이제다.

 

물리학·천문학과 교수와 한의사 사이에 인과는 없다. 내 선물은 그에게 어찌 전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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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서울둘레길 증산-봉산-앵봉산 구간 13.5km(숲 없는 부분 제외)를 걸었다. 예상 밖에 지루하도록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는 거의 직선 구간이다. 3시간 40분 걸렸다. 다소 피곤하지만 시작부터 종료까지 깔끔했다. 서울둘레길, 이제 두 구간 남았다.

 

지하철 6호선 증산역에서 내려 큰길을 벗어나 조금 걸으니 모퉁이에 소박한 중국음식점이 있다. 불 맛이 상큼한 해물짬뽕 시켜 점심식사를 하고 천천히 걸어 증산甑山 입구에 들어선다. 산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길가 버려진 나무에 아름다운 버섯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반가이 인사를 나누는데 그런 나를 보고 동네 개가 컹컹 짖는다.


 

증산은 시루 모양이라 해서 이름붙인 언덕 높이 낮은 산이다. 증산교 창시자인 강일순 선생 호가 증산인데 한자까지 똑같아 재미있기는 하지만 아무 관련이 없다. 얼마간 오르니 길가에 버려진 무덤 몇 기가 흩어져 있다. 그 중 유난히 제비꽃으로 뒤덮인 무덤이 있다. 무덤 주인이 생전에 제비꽃을 무척 좋아했나보다 생각한 뒤 부질없는 인과론이다 싶어 웃는다. 무덤과 예닐곱 발자국 떨어진 곳에 문득 눈길이 멎는다. 사람 죽어 누운 무덤을 꽃이 덮듯 나무 죽고 남은 등걸을 버섯이 옹글게 덮고 있다. 여정은 달라도 생사 순환하는 이치는 다르지 않구나.



 

대부분 능선길인데 다른 데 비해서 단조로운 편이다. 걷다가 이따금씩 진행 상태를 확인해보면 가야 할 길이 제법 아득하다.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하며 봉산(207.8m)을 지나 한참 걷다가 조금 지친다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오던 어떤 사람이 저기, 앵봉산 정산 보이네!’ 한다. 이번 길에서는 가장 높은 235m 봉우리다. 북한산이나 관악산에 비하면 야산 수준이지만 머리 생각과 다리 생각은 다르다. 앵봉산에 올라 서쪽을 내려다보니 오돌토돌한 지평선 급 고양, 김포 땅이 펼쳐진다. 내려갈 길만 남았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과연 남은 길은 금방이었다. 마무리 느낌이 좋은 길을 따라오다 잠시 앉아 발먼지를 털어내고 옷차림을 정리했다. 구파발역에 도착하기 직전 공원에 서 있는 벚나무 줄기 위 어여쁜 돌꽃(지의류)을 만나 작별인사를 하고 보니, 가족과 약속한 시각 한 시간 전인 17:3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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