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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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불교에서 공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특정한 존재인 실체에 대한 부정이다.......너무 광범위하게 실체를 정의하면 허무주의가 따라오게 되고, 다음에는 무가 존재하게 된다. 반면에, 너무 좁게 정의하면 엘리트주의가 따라오게 되고, 그러면 무상 종지가 강하게 부정하는바 사람과 대상이 영원한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극단을 조심스럽게 피해야 한다. 중도는 양극단 혼합이 아니라 철저한 반박이다.(234)

 

저자는 귀류 논증 전통에 따르는 티베트 불교를 중도불교라 일컫는다. ‘중도라는 번역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중도는 불교 최상 범주 언어로서 곧 정도를 말한다. 정도는 삼법인 또는 삼특상으로 집약되는 불교 보편 종지이므로 특정 전통에 국한할 수 없다. 공을 일관되게 말하는 사실로 보아 이른바 북방 대승 가운데 한 흐름을 따르는 듯하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가,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내리는 최종 결론은 그 전승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 진경을 보기 전, 일단 여기 이 진술은 정확하다. 붓다는 인식론적 절대주의와 회의주의, 존재론적 영원론과 허무론 양극단을 반박한다. 이 반박이 중도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 패권을 쥔 정통사상과 맞서는 힘에 따라 요동하기 마련이다. 붓다는 아리안-힌두 전통이 지닌 유적 제압을 거부하는 무적 기조에 극진히 서 있다. 이 기조를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중도, 곧 정도를 지키는 일이다.

 

중도가 지니는 역동적 실상을 모른 채 도식적 논리만 좇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 극단에 치우치고 만다. 현실에서는 패권 정통사상에 휩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마치 결곡한 양비론이 권력 편을 들게 되는 이치와 같다. 자연과학, 심지어 물리학에서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해석 아닌 학문, 선택 아닌 진리는 없다. 내남없이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반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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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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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빛은 파동성이나 입자성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지 결정하기 전에 파동이다’ ‘입자다가정하는 일은 오류다.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현재에 이미 충분히, 상세하게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오류다.......우리는 우주를 정의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우리가 묻는 질문이 부분적으로 우리가 구하는 답을 결정한다. 우리는 자연을 자극해서 독백하게 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자연과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186~187)

 

 

사실, 인간은 정신-마음-성이나 신체-물질-성을 띠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측정할지 결정하기 전에 정신이다’ ‘신체다가정하는 일은 오류다.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과거가 현재에 이미 충분히, 상세하게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오류다.”

 

어떤가. 범주 오류인가. 여기 우리가 인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간 아닌 존재는 인간을 측정할 수 있는가. 그 여부를 인간이 무슨 수로 아는가.

 

If people would only talk about what they understood, Earth would be a very quiet place._Albert Einstein

 

인간이 인간 관지에서 다른 존재를 측정하고 정의하는 일은 인간 이해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이 오기 전 까마득한 옛날에 곰팡이는 네트워킹을 통해 발현했다. 측정 능력 없는 네트워킹이 가능한가. 이 네트워킹에서 인간, 당연히 그 정신도 발현했다. 이 인간 정신이 시간은 정신적이다.’라고 할 때, 바로 그 정신 맞나. 맞으면 틀린다.

 

융이나 맨스필드가 말하는 정신과 동시적·비국소적 생명 네트워킹은 다르다. 본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융이나 맨스필드가 달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한, 정신이 물질을 측정하고 정의하는 참여, 아니 창조는 허구다. 아니라면 그 실재는 인간 인식에 국한된다.

 

물질이 실체가 아니라는 진리는 당연한 귀결로 정신이 실체라는 진리를 낳는가. 무슨. 물질이 실체가 아니라면 정신도 실체가 아니다가 진리다. 물질과 정신은 상호 비인과 의존 과정[동사]에 잠정적으로 붙인 이름[명사]일 따름이다. 물질은 부단히 정신으로 파동화하고, 정신은 부단히 물질로 입자화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장이 우주다. 우주 이전·이후, 내부·외부는 당최 없다. 대극 합일 유심론은 신화 유제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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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잠깐, 일요일 오전·오후, 월요일 오후가 제주를 실제로 걸은 시간이었다. 40km 남짓하니 그야말로 소소한 일정이다. 소소해서 쏠쏠한 이 사흘 백릿길은 내 삶에 이미 농밀한 파동으로 작용하고 있다.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5시에 택시를 탔다. 기사에게 일부러 대화를 청했다. 외지인 유입, 중국 자본, 강정 해군기지, 제주 제2공항, 쌍둥이 빌딩, 궨당(권당) 정치 등 여러 주제에 대해 그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정치적 견해가 나와는 다소 다를 수 있겠지만, 그가 주민으로서 제주를 걱정하는 진심은 그 다르고 같음 문제를 넘어선다. 내 심사 때문인지 오늘따라 이륙 과정이 소란하다.

 

평소보다 긴 시간 먼 거리를 이동하고 온 터라 출근길은 아득하고 한의원은 적막하다. 그간 침 맞지 못했던 분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녹용 넣어 한약 짓겠다는 예약 전화가 있어서 제주 향해 꾸벅 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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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곶자왈이다. ()자왈(덤불)은 화산활동으로 분출된 용암류가 만들어낸 불규칙한 암석 덩어리들이 널린 곳에 이루어진 숲이다. 곶자왈도 언제 꼭 한 번 혼자 걸어보고 싶었던 곳이다. 왠지 알 수 없으나 배고픈 생각이 들지 않아 점심 식사를 거른 채 숲으로 들어간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아 내 분위기는 아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인 듯 흘러간다.

 

정말 난생처음 보는 숲이다. 운동하러 오지 않았으므로 연신 시선을 360도 돌리면서 천천히 걷는다. 뭍에서 볼 수 없었던 개가시나무 자태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는가 하면, 청아하게 지저귀는 섬휘파람새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사이사이 달팽이 눈으로 버섯을 찾는다. 돌꽃과 이끼는 뭍보다 훨씬 더 자주 나타나 같고 다름을 재빨리 구별하며 지나간다.

 

비교적 쉬운 테우리(몰이꾼)길을 지나 가장 걷기 힘든 가시낭(가시나무)길로 접어든다. 바닥에 무수히 깔린 돌덩어리 때문에, 수시로 발목이 꺾이며 미끄러진다. 이 험하고 깊은 숲 또한 4·3의 애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숨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 깊은 숲은 얼마나 얕은가; 죽음이 주는 강고한 공포에 비해 그들이 쌓은 돌담은 얼마나 허술한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가시낭길에 비해 농사를 지으려 주민이 만들었다는 한수기길은 한결 편하다. 그보다 더 평탄한 길이 바로 빌레(너럭바위)길이다. 용암대지 지역이라 제법 흙길도 있고 무엇보다 그래서 아름다운 버섯을 만끽할 수 있다. 처음 보는 버섯 군락지에서 많은 시간 머무르며 진지하게 살피고 질탕하게 논다. 밀도 높은 시공이 감사하다.

 

해가 확연히 기울 무렵 곶자왈을 나선다. 들어갈 때, 넓은 곳이니 안내 책자를 가져가라던 직원 말을 떠올린다. 결코, 넓지 않다. 사방이 포위된 작은 숲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제주마저 숲을 속수무책 잃어가고 있다. 나는 오늘 잠시 그 증인으로 왔다 간다. 증인이 방관자이기 십상인 이 흉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걱정한다. 남은 날이 하 많지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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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뫼산골 2022-05-21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글을 잘 쓴다. 같은 곳을 보고, 걸어도 이렇게 그 감상과 표현이 새로울 수 있구나 부러워 진다..
 



<모슬포> 정군칠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 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 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 몽돌들은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 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모슬포,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 이름이 왜 내 기억 깊은 자리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슴아슴 찾아가면 오래전 사라호 태풍과 관련된 라디오 드라마에 가 닿는다.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 무대가 제주도였고, 그 지명 가운데 모슬포가 있었던 듯하다. 드라마 제목을 포함한 내용 거의 모두가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기이하게 최백호가 부른 주제가 대부분이 남아 있다. 이마저 모슬포를 다녀온 뒤에 떠올랐으니 어떤 기억은 몸에 깃드는 모양이다.

 

운진항에서 내려, 올레 10길이 지나가는 하모 해변을 걸었다. 정군칠 시에서처럼 날 세운 바람이 불었다. 모든 길을 걷지 않아 그 굽은 내력을 실감하지는 못했다. 다시 돌아가 모슬포항으로 갔다. 콘크리트 잿빛 귀퉁이에 언뜻언뜻 바다 남빛이 보이는 부두 음식점에서 소주와 고등어회로 저녁 식사를 대신했다. 똑같은 메뉴인데 옆 음식점엔 줄이 길다. 얼마나 더 맛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음에 와도 이 집에서 먹겠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어디를 가도 제주는 4·3을 피해갈 수 없다.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는 표현만으로도 폐부를 찔러온다. 조선조에서도 일제 강점기에서도 대한민국 시대에서도 제주는 가혹한 착취와 살해 대상일 뿐이었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지극히 개인적 기억을 따라 그리움으로 왔으나, 모슬포 떠나는 발걸음은 공동체적 애통이 실려 철버덕거린다. 그렇게 오늘 60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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