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어느 비건이 한 이 말을 <시사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2초 정도 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이 모르거나 가닿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 알거나 가닿을 때 짓는 표정과 자신이 모르는 줄 모르면서 남이 아는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은 아마도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지 싶다.
저 말은 얼굴이 대체 뭘까를 화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에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육식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비범해 보이는 저 말도 피상적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통속한 상식만으로 비범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을까? 동물이 지니는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딱 잘라 그렇다고 대답하는 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대체로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상식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연 어려워진다.
동물과 식물은 각각 다른 원리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동물은 기관 중심 시스템이다. 이동하는 생명체로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에 비교 우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은 모듈 분산 시스템이다. 이동하기 힘든 생명체로서 모든 조건을 견디며 생명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얼굴 유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동물 중심주의, 그러니까 종 편견에 해당한다. 얼핏 들어도, 정색하고 들어도 얼굴 없는 생명체를 낮게 평가하는 배음이 들려온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무지 상태다. 전방위·전천후 생존 솔루션을 구축한 식물이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다. 모든 곳이 얼굴이니까.
여기에 반대할 수 있는 관용을 베푼다. 반박을 기대한다. 일단 다음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얼굴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굴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전문가가 일제히 놓치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얼굴이 생식기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놓친 실패 또한 종 편견에서 발원한다. 좁은 의미 생식기가 얼굴에서 멀찌막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물 생식기는 이와 다르다. 꽃은 인간 미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식을 위해 아름답게 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꽃이라 부르는 부위는 꽃잎, 암술, 수술, 꽃가루, (변형된) 꽃받침 모두를 포함한다. 이 통칭하는 꽃은 생식기와 얼굴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은 좁은 의미 얼굴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곰팡이 얼굴 버섯에서 왔다.
버섯이라면 인간은 우선 식품으로 표상할 뿐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봐야 항암 효과 운운, 그리고 송로버섯 운운.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다.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를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설계한 창조자다. 이 창조자에게서 버섯이 왔고, 식물 꽃이 왔고, 동물 얼굴과 성기가 왔다. 인간은 버섯이 인간 성기를 닮았다며 무식하게 킥킥댄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간다. 비건은 버섯을 먹는가? 버섯을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없이 먹고 있음이 틀림없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곰팡이가 식물이 아니니 당연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버섯은 본성에서 동물 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김새와 질감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동물 본성이 여기서 발원한 진실에 무지해서 인간은 뒤집힌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고 있는 태도를 전복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자체로서 먹이가 되는 생명과 소통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제의란 인간 본성에 가닿는 행위다.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신난다. 얼굴 있네, 없네, 논의 따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야 한다.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는 주제에 감히 동물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우월감은 참으로 가소롭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아서 뭐라는 거 아니다. 식물과 식물 이전 생명을 “함부로” 먹기 때문에 시비한다. 동물권을 말하려면 “식물권”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툰다. 동물 존중하는 일과 식물 성찰 없이 먹는 일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톺는다. 부분 지식은 오류다. 관통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 스러지는 순간까지 관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얼굴이 있다. 얼굴은 생식기니까. 생식은 생명 궁극 본성이니까. 궁극 본성을 펼쳐내는 지성소를 두고 동물 중심주의가 자랑스레 지절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화급하다. 이렇게나마 외친다면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을 위해 우리 동물 먹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