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산은 한양도성 주산이고, 자하(창의)문 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은 조선왕조 수호 산으로 불교 금강신 이름을 붙였고, 무악재 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안산이 있다. 조선을 개국할 무렵 한때 이 안산을 주산으로 하여 도읍하려 했다고 한다. 그랬더라면 지금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에 궁궐이 들어서고 이를 중심으로 한양도성이 조성되었을 터이다. 풍수적으로 그만큼 좋다는 뜻일 텐데 풍수 잘 모르는 나로서는 걷기 좋은 숲이 확실하다는 말 정도만 할 수 있다. 다른 경로로 다섯 번 걸었는데 모두 좋았다. 산 무서워하는 아내와 함께 오면 딱 알맞겠다고 이번에도 생각했다.
안산은 생긴 모양이 말안장(鞍)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鞍을 파자하면 혁명과 안정이라는 뜻이 나온다. 혁명해서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지닌 패거리가 이 산을 끼고 돌며 더불어 놀았을 법하다. 마치 도봉천 계곡 일대에서 놀았던 기호 노론 패거리처럼 말이다. 시대 배경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한양도성 주산이 될 수도 있었던 산에 그런 야심을 새겨넣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서인이라면 말이다. 맞다. 서인이 그랬다.
이번에 안산으로 향한 까닭은 요즘 내가 계속해왔던 바로 그 제의 때문이다. 물론 현 부역 세력 뿌리인 서인과 안산에 얽힌 서사가 대상이다. 지도 보며 예정했던 바와 달리 미우관과 평화학사 사이 연대동문길을 따라 연세대학교 교정 동쪽에서 진입해 안산으로 향한다. 조금 가다 왼쪽으로 돌면서 왼쪽을 보니 제법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청송대라고 알아차린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연대에 강의하러 드나들면서 말로만 들었던 그 청송대를 30년 만에 뜻하지 않게 들어간다. 다양한 버섯들과 인사하며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주 조그만 도랑물을 발견한다. 호젓한 곳 택해서 정화 신목 버드나무 가지를 삼가 심는다. 간절하게 기도한다. 안산과 그 앞 벌판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이 학교 숲이 정화 네트워킹을 고요한 함성으로 펼쳐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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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은 연대 교정에서 안산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처음 얼마간 계속되는 소나무 숲이 참 아름다웠다. 내가 택한 길이 안산 서북 사면 쪽이기도 하지만 장마철이어서 촉촉한 분위기가 알맞게 배어 있었다. 주로 작디작은 버섯들이 곳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천천히 가장 긴 경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수시로 길을 놓쳤지만 작은 산에 워낙 많은 길을 낸 터라 금세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길이 막혔다 포기한 순간 나타난 쪽문을 통해 다시 연세대학교 교정으로 돌아왔다.
백양로를 그리며 길 따라 걷다 보니 하나둘 기억이 살아났다. 물론 백양로는 위치만 같을 뿐 대부분 생경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학교 측에서 교수·학생 의견을 무시하고 역사와 생태를 뒷전 한 채 ‘재창조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백양로라는 이름이 발원한 백양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다고 하겠지만 은행나무가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불청객처럼 엉거주춤하다는 내 느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천억 원이란 돈이 어디서 나와 이런 토목을 벌였을까. 140년 전통 영역을 싸구려 영화 세트장처럼 테라포밍한 이 살풍경이 식민지 공학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단골 음식점에 앉아 국수를 시킨다. 먼저 막걸리부터 달래 한 잔 그득 따른다. 벌컥벌컥 소리 내어 마신다. 영혼이 발하는 신음을 목이 내는 소리로 바꾸니 답답함이 조금은 풀린다. 중첩 식민지 쌍것으로 태어나 똑 이와 같은 그림을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내가 뜬금없이 무섭다. 찰나마다 더 새로워지고 순간마다 더 즐거워지는 중독 제국에서 나는 좀비로 살고 있지 않은지 와락 겁난다. 가족과 약속한 장소로 향하는데 자꾸 목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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