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 무엇보다 사회제도 개혁과 인식 전환이 선결문제 아닐까요?


우울증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의 우울증은 어른이, 그들이 주무르는 사회가, 제도가, 인식의 틀이 만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들 개인 문제로 치부합니다. 사회가, 제도가 얽어매는 족쇄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아이들을 기성 체제와 가치의 노예로 만들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을 전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 탓만 하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8일 어느 일간신문 보도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만 15살 학생들의 읽기·수학·과학 실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4위에 올라 학업성취도가 최상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읽기 학습’에 대한 흥미도가 낮고 혼자 읽고 공부하는 능력이 다른 회원국 학생 평균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이시디는 34개 회원국과 31개 비회원국의 만 15살 학생 약 47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 보고서를 7일 공개했다. 우리나라에선 137개 고등학교와 20개 중학교 학생 5123명이 참가했다.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읽기 1~2위, 수학 1~2위, 과학 2~4위로 모두 최상위권이었다. 피사 결과는 통계 오차 등을 고려해 순위를 1~2위처럼 범위로 표시한다. 읽기와 수학의 평균점수는 각각 539점, 546점으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는데, 특히 수학에선 ‘만년 1위’ 핀란드(541점)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과학(538점)은 핀란드(554점)·일본(539)에 뒤졌다.

평가에 참여한 65개국 전체를 비교한 결과에서도 우리 학생들은 읽기 2~4위, 수학 3~6위, 과학 4~7위를 기록해 최상위권이었다. 과학은 2006년 평가 때는 7~13위였으나 이번에 순위가 크게 올랐다. 전체 참여국 비교에서 순위가 약간씩 떨어진 것은 중국의 대도시인 상하이가 새로 평가에 참여해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피사는 오이시디 회원국 평가를 중심으로 하되, 비회원국은 경제협력 파트너 자격으로 도시 단위로 참여할 수 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습 흥미도는 여전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평가의 집중 분석 과목인 읽기 영역에서 흥미·즐거움 지수가 65개 나라 가운데 28위에 그쳤다. 또 읽기 성취도에 영향을 주는 학습전략 가운데 ‘암기 전략’은 오이시디 평균을 웃돌아 37위로 나타났지만, ‘통제 전략’(자기학습관리능력)은 최하위권인 58위를 기록해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집중 분석 과목이던 수학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흥미도와 학습동기에서 전체 41개 나라 가운데 각각 31위와 38위였고, 과학이 집중 분석 과목이었던 2006년 평가에서도 흥미도가 오이시디 평균을 밑돌아 단순 암기식 교육의 부정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후반 밑줄 그은 부분은 대개 생략된 채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보도 사실 자체가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여지없이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단순암기식, 주입식이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해야 할 만큼 부끄러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교육 제도,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지배집단의 전략, 그 전략의 노예로 살아가는 침묵하는 다수의 굴종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에서 생겨납니다.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은 인간을 경이로움에 열려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고귀하면서도 힘 있는 끌개는 바로 경이로움입니다. 이것을 박탈당한 사람은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게 다름 아닌 우울증입니다.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들을 경이로움의 세계에 풀어놓아야만 합니다. 교육, 입시 제도를 총체적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주입된 지식을 암기해서 성취하는 능력은 종당 자기 자신을 사악한 체계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걸 누가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누가 해야 할까요? 


정치인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가에 맡길까요? 어림없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맡길까요? 물색없습니다. 그 경계에 선 존재, 바로 엄마입니다. 엄마들이 뭉쳐야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엄마들이 어떻게 뭉칠 수 있을 까요? 이 또한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아이의 심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내 아이가 우울증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바야흐로 경천동지할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엄마들! 그들의 현주소는 어딜까요? 책의 들머리 초등학생 이야기에서 보셨듯이, 아이들의 현실과 고통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해야 할 엄마들이 사실은 문제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 또한 그 어머니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망치고 싶겠습니까. 그들 하나하나 물어보면 누군들 자기 자식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게 자식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성가부장적 경쟁 사회 속에서 자신들조차 그 희생양이 되어 아이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비극의 자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어머니를 깨워야 합니다. 모성을 복원해야 아이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우리 미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 됨을 사무치게 각인하고 떨쳐 일어나 이 포악한 세상을 뒤집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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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이란 게 있다면서요?


그 동안 적지 않게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상담하면서 겪었던 것 중 하나는 반드시 일대일로 만나 대화하는 것만이 힘 있는 상담치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상담하면서 틈틈이 강의를 나가 적게는 십 수 명, 많게는 몇 백 명과 소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대일 상담 이상으로 후련한 소통, 가슴 뭉클한 감동, 홀가분한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수공업적 일대일 상담으로 풀어나갈 상황을 넘어선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 아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강의를 통해 집단적 소통과 해방이 일어나게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종교적 강론/설법이나 단학, 기공 강의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종교지도자나 수행의 스승이 아니라고 해서 이런 효과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몰입하는 말하기와 듣기는 모두 고급한 실용 명상입니다. 강의자와 수강자, 그리고 수강자 상호간에 진심어린 교감이 일어난다면 강의요법은 예상 밖의 시너지로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강의 요법(Lecture Therapy)은 정신치료의 새로운 아침을 여는 빛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현실 여건상 그 많은 아이들이 일일이 상담전문가를 찾아가 개별상담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경제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요. 결국 이런 식의 해결 방안은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무엇보다, 부모 된 처지에서, 내 자식이 우울증이다, 생각하고 상담실 문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개된 강의 구조를 통해 현실적 난관을 일거에 해결한다면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6) 의학은 결국 양육의 문제 아닌가요?


마음의 문제를 가진 분들과 만나면서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의학적 도식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게 얼마나 안일한가, 아니 옳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지요. 의사라면 으레 무슨 병이라고 진단하고 약 처방하는 게 할 일이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한테는 그런 행태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을 병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를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란 본디 사람의 생명과 삶, 즉 생명현상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조력자이며, 나아가 안내자, 더 크게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따라 신성한 사제에서부터 싸구려 기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놓이지만, 인류가 갈수록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의사가 그 본분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의 저자 호시노 요시히코의 견해를 참조해 의학의 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발달장애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학습장애(LD)를 모두 담아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저자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또 하나의 병명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그게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 "발달"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합니다. 


발달이란 말은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장, 성숙이란 말로 바꿔 써도 무방하겠지요. (이 모든 한자말을 아우르는 순 우리말 "자람/자라남"을 필요에 따라 쓰겠습니다.) 발달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유독 인간이란 종(種)만이 긴 성장기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긴 성장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으면 발달의 균형이 깨지고, 바로 거기서부터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발달의 불균형은 전체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 할 것입니다. 즉,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알맞게 자람으로써, 두루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자란 부분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소홀히 되어 실제 삶이 기우뚱거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발달이 생각, 언어, 행동의 조화와 협동을 깨뜨림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지녀 온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성질머리가 더럽다, 성격이 까칠하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제 생각만 한다, 조신하지 못하다, 경망스럽다, 게으르다, 우유부단하다, 지저분하다, 예의바르지 못하다, 변덕스럽다, 정신력이 약하다, 못나빠졌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인격, 성격, 윤리적 감수성, 가치관, 따위의 틀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다그치는 태도입니다.


둘째, 앞의 태도와 전혀 다른, 거의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뭔가 남다른 사람의 개성, 즉 ‘기인(奇人) 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성편력이 심하다든가, 약물 의존 상태에 빠져 있다든가, 할 때, 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셋째,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나 병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나 신경체계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자가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장애라는 말에 덧씌워진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발달불균형증후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태도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발달불균형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발달의 문제로 바뀝니다. 발달은 결국 양육 문제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문제입니다. 윤리보다 깊고, 윤리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그의 인격적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치료보다 깊고, 치료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병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윤리도 의학도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을 말하는 표준담론(!)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피면 그 표준담론을 들이대는 장본인이 대부분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려면 자라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이지요. 


결국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대부분 발달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양육이라는 보살핌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아픈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공감/동조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보살피는 삶의 흐름에 맡기는 것만을 허합니다. 


그 동안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내면에 학대 받은, 그래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또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아이들! 그들은 지금 여기서 상처 받고 있는 아이,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아이들의 우울증 또한 내밀하게 살피면,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가치를 업신여김으로써 자라나는 것을 막고 있으니, 이는 다만 기분장애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발달 불균형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울증 치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어루만져 보살피는" 일입니다. 하여 사람을 자라(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지녀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성으로 감싸 안고 전인적 접근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어떤가요? 문제의 깊은 본질에서 너무나 아득히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부터, 지금, 당장, 시작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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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엇보다도 상담이 꼭 필요해요.


사람의 마음은 다만 뇌 활동이 아닙니다. 마음의 핵심에 뇌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마음=뇌, 아니죠. 마음>뇌, 맞습니다. 마음은 삶 전체 활동을 일으키고 이끄는 선도 운동이자 결과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뇌를 넘어선 마음의 치유에는 현실 삶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현실 삶이 개입되는 치유는 스토리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대화, 즉 심리 상담이 필수적입니다.


실제로 아이들, 할 말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어른들은 막무가내로 무시하지만 아이들, 이미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들어주고 정서적 지지를 보내주고, 이성적으로 수긍해주고, 의지적으로 동참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심리적 현실도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어른들이 제대로,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특유의 감수성으로 어른보다 빨리, 다양하게 이 변화무쌍한 세계를 따라잡고 적응, 변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만 뭔가 덜 자란 준비 단계의 예비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현재는 어른의 현재와 동일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부나 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경청하는 어른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경청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경청이란 자기 선입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진실에 주의를 온통 맡기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청하면 고통의 감염이 일어납니다. 감염이란 말이 서늘하다면 공유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때 그 고통의 무게는 쑥쑥 덜어지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참으로 경청하는 사람은 다만 내 고통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닙니다. 고통보다 더 큰 나를 알아차립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곧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 고통은 내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하면 그 투명한 힘은 이내 내게로 감염됩니다. 고통만 감염되는 게 아니고 치유와 깨달음도 감염됩니다.


그러면 고통보다 큰 내가 고통의 여백이 됩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홀연히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영원한 고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나 또한 영원히 고통에 신음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이, 그것을 경청하는 이, 그리고 고통이 함께 흘러감으로써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통섭(通躡)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이루어낼 수 있는 최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위대한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이 치유상담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4) 쉬고 싶거든요.......


아이들의 한결같은 소원이 잠 실컷 자 보는 거, 부담 없이 쉬어 보는 거, 그렇지요. 예. 그렇다마다요. 큰 휴식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운 짐, 거의 죄악 수준입니다. 그래 놓고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그 잘된다는 것이 가도 가도 멀어지는 수평선 같아서 아이들한테는 사실상 속임수처럼 느껴지는 무엇입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단한 여정, 여기에 무슨 애착이 있겠습니까. 하여 자꾸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길이 나버린 생각은 두고두고 남은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찌하면 쉬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 아이가 장차 무인도에서 살아갈 것이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의 처지에서 사회적 삶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 문제는 아이들 교육, 입시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중심축으로 하여 사회적 가치를 재구성하는 매우 커다란 국가적 과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환기하여 아이들의 관점과 정서에 맞는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나마 각 가정 또는 소규모 가정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공동체끼리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삶의 길을 합의, 조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여유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휴식이 꼭 양적 개념만은 아니므로 아이들에게 높은 행복감을 제공하면서도 압박감을 주지 않는 질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현재 우리사회 분위기상 그리 녹록치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이런 요구에 대한 갈망도 커질 것임을 감안한다면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아늑한 오솔길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어찌하든 우리 아이들에겐 지금 절대 개념의 휴식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왜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온 길을 문득 멈출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잠시 또는 일부의 여백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재정립하는 방향전환이 그 휴식을 낳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절박한 문제인데 그만큼 한없이 답답한 문제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힘 있는 사람은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 오직 참담할 따름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챙기는 것을 혼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아이의 삶, 특히 감정의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며 함께해주는 것입니다. 챙기는 것은 결과만을 염두에 두고 해결을 돕거나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이 자신에게 맡기고 기다리며 “그냥 내비 둬~”할 줄 아는 너그러움입니다. 챙기는 것은 한사코 손 대고 입 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악착스러움입니다. 이 혼동에서 벗어나야 아이의 휴식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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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1) 약물치료, 문제없나요?


흔히들 말합니다. 우울증, 약만으로도 쉽게 나을 수 있다고. 그런가요? 물론 가벼운 경우 약으로 증상만 완화시켜도 일상생활로 금세 돌아갈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우울증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평생을 폐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은 어쩌면 최소한의 치료법일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우울증 치료약을 먹으면 자살충동이 일어난다는 지적까지 있고 보면 만만치 않은 문제입니다.


미국의 어떤 임상심리학자가 쓴 <우울증 치료제(SSRI)가 청소년 자살 증가의 원인인가?>라는 글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미국 내 10대의 자살률이 최근 크게 증가한 것으로 밝혀져 의학계와 심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04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8%나 증가 했고 그전 15년간의 자살률 감소 추세를 크게 벗어났습니다. 10세에서 14세까지의 여자 어린이의 75.9%의 자살 증가율을 비롯해 모든 나이의 남녀 청소년들의 자살시도가 동시에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에는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급증하는 자살의 가장 유력한 이유 중 하나는 뜻밖에도 2004년 당시 미국 연방 정부기관인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대표적인 우울증 치료제인 SSRI에 부착한, 복약 후에 자살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는 내용의 경고문입니다. 이 경고문은 청소년의 우울증 치료제 사용을 즉각 20% 이상 감소시켰으며 치료제가 필요할 때 약의 사용을 기피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자리 잡히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의 치료제인 SSRI가 어떻게 해서 우울증의 가장 무서운 증상인 자살을 치료하기는커녕 증대시킨다고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경고문을 넣었을까요. 그것은 미국 식품의약국 자체에서 실행한 연구에서 이 약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자살시도 비율을 2%에서 13%까지 증가시켰다는 결과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연구 결과에 상응해 그런 경고문을 넣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간과된 것은 환자가 우울증을 경험할 때 정말 심한 경우엔 자살을 할 여력이나 자살을 생각할 여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울증 치료제의 투여 시 갑자기 생기는 여력과 기운은 전에는 시도조차 못했던 자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래서 많은 심리학계 권위자들은 우울증 치료제 투여 후의 많은 자살시도는 우울증 치료제의 본질적인 부작용이 아니라 환자에게 생기는 갑작스런 기운과 여유로 인한 현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SSRI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우울증에 많은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작(Prozac)은 어린이들에게 65%의 약효가 입증됐고, 졸로프트(Zoloft)는 75%의 약효가 입증되었습니다. 어린이가 심한 우울증을 경험해서 약을 처방해야 할 때 자살할 위험 때문에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경우, 아직 심하지 않았던 우울증이 점점 더 심해지면서 자살의 위험이 오히려 증가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번 갑작스러운 청소년 자살 증가는 필요한 치료제를 자살의 위험을 의식해 기피한 것이 오히려 큰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우울증의 경우 약의 치료보다는 심리적인 치료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증세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을 경우 근본적인 원인을 인식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그 증세가 언제나 재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을 이용하지 않고 치료가 가능하다면 절대로 약을 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약을 병행해야 치료가 가능할 때가 많습니다.(이하 생략)


무슨 의도에서 쓴 글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임상심리학자로서 지니고 있는 기본 철학에 동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관계와 논리에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약을 먹고 자살을 하는 것이 약의 부작용이 아니고 오히려 약 효과로 나타난 여력과 기운 때문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그 앞에서 경고문 때문에 약을 기피해서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해석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약을 안 먹어서 여력과 기운이 생기지 않았는데 무슨 힘으로 자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말일까요? 약을 먹어서 자살하는 사람과 약을 안 먹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같을 리 없는데 어떻게 이런 논리가 나왔을까요? 더군다나 바로 앞에서는 자살을 우울증에서 가장 무서운 증상이라고 했으면서도 약을 먹으면 증상이 완화되어 자살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한다고 하니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혼란이 생긴 걸까요?


다른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SSRI라는 약 하나의 작용 범주에 함몰되어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 재흡수를 억제하면 세로토닌 양이 늘어나 우울증 상태를 완화한다는 사실에만 집착했지 신경전달물질 상호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로토닌은 도파민계열 모노아민 억제 효과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사람일 경우 세로토닌이 늘어나서 자살한 게 아니고 도파민이 억제되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약의 효과와 부작용을 편리한 대로 분리하는 논리는 아무래도 제약회사의 입김 같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SSRI의 효과이자 부작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은 본디 SSRI로 치료해서는 안 되는 환자였던 것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낳은 비극입니다. 제가 먼저 쓴 책(<안녕, 우울증>)에서 말씀드렸듯 우울증은 현재 적어도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분류를 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치료를 달리해야 합니다. SSRI를 일단 줘 보는 식의 치료는 극히 위험합니다. 가령 도파민 부족으로 삶의 의미를 못 찾고 있는 사람에게 SSRI를 쓰면 자살을 권하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거기다 대고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로 에너지가 생겨 자살했다고 말하면 누가 듣더라도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쓰면 약에 분명히 완화 효과 있다는 거, 인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교과서적 의학 수준에서 과연 제대로 약을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 임상의들이 적절한 진단 방식을 통해 우울증의 유형을 분류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지식을 갖추고 거기에 맞추어 약을 체계적으로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다른 안전장치 없는 “아니면 말고” 식의 약물 치료는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공-화학적으로 조제된 약물로 뇌신경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의 병을 고치겠다는 발상 자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은 뇌가 조종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인간 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킬 의무가 있는데도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구체적인 폐해 사실을 더해두기로 합니다. 우선, 거의 모든 정신과 양약은 칼슘과 마그네슘 효능을 탈취합니다. 두 물질 모두 사람의 정신 안정에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정신과 양약을 오래 복용하면 정신 안정이 무너진다는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둘째,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SSRI는 소화관을 망가뜨리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로토닌은 뇌에 2% 미만, 소화관에 98% 이상이 분포하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 효과가 소화관에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결국 과량의 세로토닌이 소화관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필연입니다. 더군다나 소화관은 이른바 “제2의 뇌”라고 말해질 만큼 정신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문제 또한 앞의 폐해와 똑같이 모순을 낳고 마는 것이지요.


셋째, 이는 양약 일반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거의 모든 양약은 우리 몸을 차게 합니다. 몸이 차다는 것은 한의학적 견지에서 보면 매우 좋지 않은 사실입니다. 암을 비롯한 수많은 중병들이 낮은 체온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이런 일련의 문제를 놓고 생각한다면 양약 일변도로 우울증 치료에 접근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 아, 그럼, 한약은 어떤가요?


물론 한약도 약입니다. 약으로 마음의 병을 완벽하게 다스린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교만한 것이란 점에서는 양약과 다를 바 없이 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약은 양약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선 양약은 기본적으로 병이라는 적대적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그 기전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서양의학의 기본자세거든요. 우울증의 경우 앞에서 거론된 SSRI라는 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그대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입니다. 부족한 세로토닌을 공급한다거나 세로토닌 신경계를 활성화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한약은 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보충해주고 활성화한다는 개념입니다. 서양의학에는 없는 보(補) 개념을 통해 생명의 자체 치유능력을 돕는 방법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양약과 같은 극단적인 부작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약의 쌍방향조절 기능입니다. 양약과 달리 필요한 성분만 추출하거나 조작해서 쓰는 게 아니라 생명체인 식물 자체를 쓰기 때문에 식물의 생명 특성이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땅에 뿌리 내리면 죽을 때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쌍방향적 성품을 지니게 됩니다. 물론 정도 차이는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한약, 특히 여러 가지 약재를 조합해서 달이는 탕약은 사람의 생명 상태에 따라 유연하게 쌍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양의학에서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약은 SSRI처럼 재흡수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세로토닌 부족을 메우는 게 아니라 세로토닌 신경계를 활성화하고 세로토닌의 전구물질인 트립토판을 공급해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또한 일방적으로 이런 효과가 일어나 도파민 신경계를 과도하게 억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쌍방향 작용을 합니다. 결국 약만으로 따졌을 때 한약이 양약에 비해 훨씬 안전하고 종합적인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약만으로 우울증을 치료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우울증을 잘 모르거나, 약을 과신하거나, 최악의 경우 그 둘 다거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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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특별한 짝꿍 질환이 있어요.


아이들의 우울증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바로 발달장애입니다. 이 문제는 뒤에 가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지만 우선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의 저자 호시노 요시히코의 개념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발달장애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그리고 학습장애(LD)가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그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만병의 근원이라 하는 호시노 요시히코에 따른다면 이것이 우울증과 결합할 경우 우울증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됩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마도 엄밀한 인과관계로 놓기보다는 평등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어쩌면 파악하는 관점의 문제이지 본령은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규명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아이들이 실제로 어떻게 다양하게 고통 받고 있는가를 살피는 게 중요하겠지요.


2009년 여름에 나눈 대화입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전 중3 16살 여자고요. 요즘 너무 기운이 없어요. 과다수면 아니면 기면증에 걸린 게 아닐까 하고 두렵고요.


제가 우울증 대인공포 조울증, 이런 게 좀 심한 거 같아서 글을 남겨요. 요즘 스트레스에 정신적으로 힘들고요. 잠 때문에 또 몸이 너무 힘들어요. 학업, 가족, 메이크업 학원(진로 이쪽)이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진짜학교에서 밥 먹다가도 운다니까요? 그냥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하고 기분 안 좋을 때 돌발적인 행동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표정이 안 좋아지고 울죠.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않아요. 물론 학교에서 즐거운 시간도 조금은 있겠죠. 하지만 워낙 감정 기복이 심해서....... 전학 온 뒤로 더 심해진 거 같아요. 미칠 것 같아요.


제가 감정기복이 심하다고 했잖아요. 어제 학교에서 일기 쓸 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손목을 칼로 내려찍어서 죽여 버리고 싶다." 이렇게 썼다니까요? 이런 제가 지금 보니까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에요.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삶의 낙이 없어요. 취미도 없고요. 취미 찾아볼 생각도 없어요.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전 우울증 스트레스 조울증 이런 거 테스트할 때마다 다 점수가 높게 나와요. 낮게 나오는 딱 하나 자살 테스트뿐. 자살할 용기는 없어요. 인터넷 중독도 심각하게 나오는 편이구요.


마음이 복잡해요. 저도 이런 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너무 복잡해요. 미칠 것 같아요. 한의원이나 정신과 이런 곳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안정 취하고 싶은데 돈도 걱정이지만 엄마, 아빠가 그런데 왜 가냐고 할 것 같아요. 엄마아빠는 제가 이런 줄 몰라요.^^ 활발한 애로 알고 있어요. 분명히 한의원이나 정신과 가자고하면 미친년 취급하면서, 돈 아깝다고 공부나 해! 이럴걸요? 안 봐도 비디오죠. 이렇게 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제가 싫어요.


자가 테스트에서는 ADHD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특성불안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입니다, 자세한 평가 및 치료가 필요합니다, Hamilton 테스트하신 결과는 19점입니다, 당신은 중간 정도의 우울증 증상이 있습니다. 전문의와 상담하세요.......


[답변]


1. 부모님과도 소통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구체적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마음 상태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보냅니다.


2. 자신과 생활을 살피다가 자가진단까지 하게 되었겠지만 그 결과를 보고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참고 자료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현명합니다. 우울증이라는 병명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우울증 환자가 된다는 극단적인 말도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병명에 얽매이다 보면 정말 내가 이러다 미치는 게 아닐까 더럭 겁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시기 바랍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라면 열여섯 나이에 홀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현실인 것이 맞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 특히 의지만한 어른이 계시지 않다는 게 참으로 힘든 부분입니다. 사실 공부 문제든 진로 문제든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는데 어른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 뭐가 되는 줄 아는 이상한 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대화가 잘 안 되지요.


사춘기를 통과하면서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완고합니다. 사춘기 때 존재하지 않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유 능력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기 때문에 허무감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생각이 자라는 폭량과 실제 할 수 있는 일 사이가 너무 커서 절망감, 우울감에 빠져든다는 사실도 수용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 더 어이없는 편견이 있습니다. 어린 애가 무슨 우울증이냐, 네가 뭐 부족한 게 있어서 우울증이냐,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정신력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회풍조입니다. 이는 참으로 '완전' 무지입니다. 우울증의 90%는 청소년 초기에 발병합니다. 부모 없고 돈 없어서 우울증 걸리는 게 아닙니다. 우울증은 정신력으로 버틸만한 기분저하를 넘어선 뇌질환입니다.


3.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요? 일단 *** 님 자신부터 자신이 처한 시기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특수한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도 일어나는 보편적인 것이란 사실을 차분히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읽을 수 있어요. 그래야 무서움이 성큼 덜어지거든요.


다음에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부모님과 상의하셔야 합니다. 물론 안 봐도 비디오인 거 압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계속 말씀하셔야 해요. 필요하다면 이 상담 글을 보여드리세요. 그래도 안 되면 제가 부모님과 직접 통화하는 방법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개별적 연락 통로를 이용하지요.) 아무튼 이 문제는 중3 학생이 혼자 감당하고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4. 지금 상태를 그냥 내버려 둔 채 시간이 약이다, 하고 버티면 안 됩니다. 중3이면 앞으로 남은 몇 달의 시간이 질적으로 아주 소중합니다. 객관적으로 우울증이다, ADHD다, 이런 병명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생활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서둘러 부모님께 알리시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학습장애는 이미 우리사회의 주요 문화목록어가 된지 오래입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이 문제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이들의 성적이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의 인격의 고른 성장, 그에 다른 사회적 스킬의 균형 잡힌 발달 문제보다는 당장 급한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짝꿍인 우울증에는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아니 아이한테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보이는 행태가 전형적인 (어른) 우울증의 증상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발달장애가 우울증 뒤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발달장애는 감추어져 있는데 그로 말미암아 우울증이 잘 낫지 않게 되므로 상황이 꼬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광범성발달장애 가운데 전형적인 자폐증은 어려운 병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우울증을 문제 삼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스퍼거증후군이 문제겠지요. 아스퍼거증후군은 일상적 대화나 학습활동에는 거의 문제가 없습니다. 특별한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공감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맥락과 상관없는 일방적인 언행을 거침없이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잘 융합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고립이 일어나고 우울증과 결합됩니다. 아, 물론 반대의 수순을 밟기도 하겠지만요. 요즘 이런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낍니다. 아스퍼거증후군을 병이라고 볼 수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발달의 불균형과 우울증이 공존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결코 방치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크게 문제 되는 짝꿍이 불안장애입니다. 2009년 겨울에 나눈 대화입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 학생입니다.


제가 지금 공부를 해야 되는 시기인데, 마음이 너무 괴롭고 힘들고 너무 지쳐요. 중2때부터 불안한 증상이 시작되고, 중3때, 그리고 고1인 지금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우울증 검사를 해보니 심한 증상이라고 나오더군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제가 이제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마음속에 불안들이 자꾸 휘몰아쳐요. 첫 번째 불안은요 제 주위의 사람들이 죽을까봐, 저의 이러이러한 행동 때문에 사고를 당한다거나 죽고, 제 곁을 떠날까봐 자꾸 나쁜 상상이 되고, 불안해져요.


두 번째 불안은 성폭행, 성추행, 납치, 강제, 폭행, 폭력, 살인 이런 사회적으로 안 좋고 무서운 일들이 저한테 일어날까봐, 제 가족들, 제 친척, 저의 소중한 사람들이 당해서 제 곁을 떠날까봐 걱정이 되고, 마음속으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계속 생각을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나요.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동성애자라고 생각할까봐 그게 두려워요. 전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중3때 남자애처럼 생긴 공부 잘하는 어떤 여자애가 있었는데, 저는 '쟤는 어떻게 공부를 잘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빤히 쳐다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제가 동성애자로 보였을 까봐 그게 걱정이 되요. 지금으로선 많이 지난 일이지만요. 그때 그 여자애의 친구들이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저를 보면서 욕을 한 것 같고, 제 얘기를 하는 것 같고, 저를 오해해서 제 친구들한테 오해한 것을 말할 것 같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이글을 읽으시는 선생님께서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실까봐 겁도 나고요. 막 다른 사람들의 나쁜 일에 잘 됐다 이런 생각 들 때도 있고 그럴 때면 벌받을까봐 걱정된 적이 많아요. 제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혹은 어떤 친구가 저를 원망하거나 복수하려고 할까봐 겁이 나고요. 항상 똑같은 고민 똑같은 생각을 하며 힘들게 지내고 있어요. 벌이란 것이 무섭고 생각하는 것이 무서워요. 아무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공부에만 전념하려고 하지만 그게 잘 안 돼요.


그냥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가끔씩 밀려들어오는 생각에 무표정으로 멍하게 있을 때도 있어요. 음, 다른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은 제가 이런 고민을 하는 줄 모르고요, 말하기도 싫어요. 저 어쩌면 좋을까요. 공부도 안 되고 지금 너무 힘듭니다. 꼭 답 글 써주세요.


[답변]


1. 한창 공부할 시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2. 기본적으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감에 상처를 입었군요.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가지는 감정 가운데 하나인 신뢰감에 문제가 생기면 우울과 불안이 나타납니다. 어떤 곡절이 있어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단 깊고 자상한 상담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더 지체하지 말고 부모님과 진지하게 의논하셔서 상담 받으세요.


3. 그리고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잊지 마셔야 해요. 지금 *** 님의 연령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고 능력이 급성장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무의미감, 공포감, 불안감 등이 수시로 출몰하지요. 하지만 그것들 영원하지 않아요. 다 지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너그럽게 생각하고 견디는 순간들도 필요합니다.


4. 하지만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꼭 받으셔야 해요. 힘!


물론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결합은 어른의 경우에서도 현저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서 훨씬 더 심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감정-뇌가 팽대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생애 초기에 겪은 다양한 공포들이 다시 점화되고 일반화되어 청소년기의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조여드는 성적(成績)에 대한 압박감, (이성) 친구 관계의 미묘함, 성적(性的)인 상상과 욕구에서 오는 폭발적 공격과 그에 따른 죄책감, 외모에 대한 날카롭고 중독적인 관심, 그리고 추상적 사유 능력이 가져다주는 죽음 등에 대한 서늘한 경도(傾倒) 등이 매우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그런 불안이, 초조가, 조급증이 언제나 30cm 안에 있습니다. 책을 열 때 손끝이 떨리는 그런, 밥 한 숟가락 밀어 넣을 때 속이 문득 굳어버리는 그런, 야자 끝나고 집으로 향할 때 홀연히 아득해지는 그런, 그런,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울울한 마음을 그 어디에도 풀어놓을 수 없을 때, 아이들은 속절없이 우울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엄마도, 아빠도, 분명히 그런 시절을 겪었을 텐데, 왜 기억하지 않는 걸까요? 누구든 다 그런다고요? 그래요? 그러면 누구든 다 죽을 텐데 뭣 하러 사나요? 헐~!  


세 번째로 크게 문제가 되는 짝꿍, 바로 불면증입니다. 2008년 여름에 나눈 대화입니다.


[질문]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고3학생입니다. 수험생은 아니고요.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아니고요.


근데 요즘 들어서 자꾸 밤이 되면 잠이 안와요. 불면증인 거 같은데....... 뜬눈으로 밤을 지내구요. 아침에 해 뜨는 거 봐도 잠이 안 들어요.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심하고요. 그래서 몇 시간 못 자고 또 일어나서 밤을 새곤 해요. 진짜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가만히 있다가 눈물이 막 나고요....... 누가 조금만 서러운 말을 하면 그냥 눈물이 줄줄 흘러요. 쓸 데 없는 잡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을 못 자는 거 같은데 아예 잠이 안와요. 잡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그리고 죽고 싶다는 충동도 많이 느끼고요. 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구요.


제가 어릴 때부터 병을 갖고 있어요. 임파선 혈관 기형이라는 병이에요. 얼굴에 부어오르고 보기 싫은 상처 때문에 옛날부터 마스크를 끼고 다녔었어요. 그래도 당당하게 잘 살고 있었거든요. 근데 요즘 들어서 제가 너무 한심해 보이고 1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데 걔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더 눈물 나고 섭섭하고 서운하고 그런 거 같아요.


그 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들어서 왜이런지 모르겠어요. 정말 힘들어요. 지금도 눈물이 막 나요. 너무 서럽고 우울하고 섭섭하고 뭔가 모르게 슬프고 밤에 잠도 못자고 왜 이런 거죠?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와요.......피곤한데 잠이 들지가않아요.......


[답변]


1. 아주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위로와 공감의 마음을 전합니다.


2. 전후 사정으로 보아 수면장애를 동반한 우울증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병명의 확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고요히 받아들이는 일이 치유의 지름길입니다.


수면장애도 우울증도 있을 만해서 있는 것입니다. 즉 곡절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살피지 않고 병이니까 무조건 빨리 떼어내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모든 질병은 내면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으므로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잠이 안 올 때 '잠이 안 온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깨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깨어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하게 되지요. 눈물이 흐를 때 우울하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눈물은 슬픔을 씻어내는 약이기도 하거든요. 이렇듯 진실은 모순된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온 영혼이 눈뜨기 위해 지금 많이 아픈 겁니다. 마치 해 뜨기 전 어둠이 더욱 짙은 것처럼.......


3.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지녀 온 병과 그 치료적 외상에 결부되어 자긍심이 입은 상처가 핵심 아닐까 싶군요. 이 문제는 자상하고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4. 하지만 고통은 고통입니다. 단순히 정신력으로 승부할 게임이 아닙니다. 수면중추를 포함한 신경, 내분비, 면역계의 이상 상태를 분명히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심층 상담은 물론 약물(수면제가 아닌)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울증에 내면의 소리가 깃들어 있다고 해서 고행주의를 자처할 이유는 없지요. 더 미루지 말고 부모님과 상의하여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셔야 하겠어요. 힘!


물론 기면증도 있어요, 한사코 자려 하는 병 말입니다. 사실은 똑같은 겁니다. 대략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수면주기가 전면적으로 재조정된다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감정-뇌의 팽대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이때는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잠이 요동을 칩니다. 완전 말똥말똥하거나, 완전 ‘시체’거나....... 이걸 보고 어른들은 또 욕합니다. 예민하기 짝이 없다, 신경 줄이 너무 가늘다, 정신이 썩었다, 결기가 부족하다.......마치 아이들이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투로. 정작 윤리적 감수성이 필요할 땐, 세상이 다 그런 거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고, 생명의 이치가 작동할 땐 막무가내로 윤리를 들이밉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짝꿍. 맨 끝에 놓아서 섭섭하겠어요, 바로 중독이죠. 우선 퍼뜩 떠오르는 것은 게임중독입니다. 2011년 초 봄에 어느 엄마와 나눈 이야기입니다.


[질문]

초등학교 3학년 된 아이를 둔 40대 초반 엄마입니다. 요즘 아이가 온라인 게임에 너무 빠져 있어 걱정입니다. 집에서 못 하게 하니까 주변 PC방을 다니더군요. 학교 근처 문방구 앞에도 작은 게임기가 있어서 몇 시간 동안 하고 돌아오는 눈치고요. 집에서도 게임을 하게 해 달라며 하루 종일 저를 따라다닙니다. 제가 잔소리도 심하게 해보고, 달래보기도 하고 아이 아빠도 야단쳐 보지만 소용이 없네요. 제가 보기엔 아이의 머릿속에 게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아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이런 문제를 대할 때 흔히 우리 어른들이 취하는 극단적인 태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게임중독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그 치료 방법을 찾아나서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먼저 부모가 아이를 야단치고, 도덕적으로 훈계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지요. 어떤 부모는 미끼를 던져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 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약’을 맺기도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상담이나 약물치료를 위해 심리상담소나 신경정신과 병의원을 찾습니다.


다른 하나는 방치하는 것이지요. 먹고살기 바쁜 부모의 경우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일 테지만, 편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극단이지만 두 태도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정서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아이들이 어떤 감정적 경로를 거쳐 게임에 빠져드는지, 그리하면 아이들이 어떤 정서 속에서 살게 되는지,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결과만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극단적 규제로, 다른 하나는 극단적 방임으로 고착되는 것이지요. 둘 다 나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이가 지금 중독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정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물론 재미 수준을 넘어섰을 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아이의 정서, 특히 감정적 결핍이나 상처입니다. 결핍이나 상처 때문에 격화된 감정이 아이를 그런 곳으로 몰아가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학교생활에 대한 불안이 격화되면 게임에 몰두함으로써 그 불안을 피해 가려 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감정 형성 과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게임을 금지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게임에 빠져 있다는 현실 이전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현실을 알아차려서 맞장구 쳐주고 다독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감정은 나 몰라라 하고 행동만 금지하는데 아이가 어찌 그 금지를 진심으로 수용하겠습니까.


이맘 때 아이들의 경우 이성·의지 에너지가 감정 에너지를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감정적으로 마음 문을 닫은 아이는 더 이상 어른의 이성·의지적 말을 듣지 않는 게 아니라 듣지 못 합니다. 여기부터 해결하세요. 그게 바른 순서입니다.


중독은 게임 말고도 많죠.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폭력, 전쟁, 정복 등에 관한 환상적인 생각이나 만화, 판타지 소설. 실제적 폭력, 절도, 폭주, 음주, 흡연, 본드 흡입, 섹스. 또, 아, 자살 시도. 이 모든 것들이 실제 일어나는 몸 감각, 삶의 열정을 제압하기 위한 도피이자 슬픈 실천인 것입니다. 어른들은 물론 이 또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어 심판합니다. 중독을 몰고 온 고통은 모르쇠. 고통을 낳은 우울은 개 무시. 아, 우리 짝꿍이 물어요, 어른들은, 우울증이 몸 감각을 죽일 때, 어떻게 당당히, 그리고 관능적으로 대처하느냐고요. 흠, 알죠, 어른들한테 할 말이 없다는 걸.


편리한 대로, 어쩔 땐, 덩치 작은 어른으로, 어쩔 땐, 반 토막 인간으로 아이들을 가지고 노는, 사물화 하는 일일랑 이제 그만두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그 자체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 자체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 자체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자체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른과 다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에 주의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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