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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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동안 나는 ‘더 위로 더 멀리’ 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나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열심히 일했다·······음, 왜냐하면 높은 곳이 낮은 곳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 그것은 틀렸다.(103-104쪽)


높은 곳”에 대한 경외가 소유로 전환된 일은 모름지기 관개농법·정복국가·거대종교의 발흥, 그러니까 돈·권력·시간 지배를 가치와 의미로 만들어간 역사와 맞물려 있다. 지성·자아·영성·윤리의 이름으로 세탁하더라도 무엇이든 높은 곳에 이르려면 땅, 그러니까 몸의 경계를 넘어가야만 한다. 경계를 넘을 때 경지니 초월이니 하며 미화하거니와 실은 허영이다. 나아가 조증躁症mania이다. 스티브 테일러 식으로 말하면 인류는 6천 년 동안 높은 곳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정신질환을 앓아온 셈이다. 내려진 처방이 무엇인가.


우울증은 안전하게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땅(한계와 가능성, 부채와 자산, 어둠과 빛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 존재의 땅)으로 나를 눌러주는 친구의 손길이었다.”(106쪽)


파커 J. 파머가 온몸으로 겪어낸 우울증이란 병이 실은 약이었다. 나는 내가 겪은 우울증이란 병, 그러니까 약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울증이 축복이자 희망이 되어가는 도정에서 우리가 아프게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성’입니다. 비현실이 현실을 비틀어버린 ‘비극’이 우울증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 본 그대로를 살 줄 아는 몸, 산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이런 도저한 현실성에 깃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울의 그림자와 아름답게 결별합니다.

  현실성의 요체는 생명의 한계성입니다. 완전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슬픕니다. 그 슬픔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우리를 간절하게, 사무치게 살도록 하는 힘입니다. 간절함을, 사무침을 각성하라고 간절하게, 사무치게 부르는 음성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불완전함을 보듬어 안고 죽음을 향해 가는, 그러나 꼭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아니 한 번이어서 지극히 아름다운 인생을 사랑한다면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벗이여, 지. 금. 여. 기. 가 비로소 참된 자기 인생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의 시공간입니다. 우울증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그대의 삶을 고요히 돌아보십시오.

  슬픔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얼마만큼 부풀려져 있을까, 억압된 욕망과 어떻게 만나 뒤섞였을까, 자기 모멸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얼마만큼 부풀려져 있을까, 불안과 어떻게 만나 뒤섞였을까, 죄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얼마만큼 부풀려져 있을까, 경멸감과 어떻게 만나 뒤섞였을까, 무기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얼마만큼 부풀려져 있을까, 분노와 어떻게 만나 뒤섞였을까.

  겨울은 지나갑니다. 봄을 맞으십시오. 반짝이는 연초록빛 새 잎으로 다시 태어나십시오. 아름다운 오월을 거쳐 뜨거운 여름을 불꽃처럼 사십시오. 풍요로운 결실을 한 아름 안고 늦가을 오솔길로 접어들면 아아, 끝이 보이겠지요. 그러나 ‘간절함’으로 살았으니 적적하더라도 허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흰 눈으로 천지를 뒤덮으며 다시 찾아온 겨울을 웃으며 맞을 수 있겠지요.”(『안녕, 우울증』299-301쪽)


이 부분을 영독靈讀(?)한 파커 J. 파머가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참, 잘했어요! ★★★★★


땅에 머물러라, 돌아보라, 질문하고 경청하라.(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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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하지 않으며
무릎 끌어안고 울어서
살아지는 삶이다
계절보다야 더디겠지만, 아픔도
그 잎을 떨군다

애써서 애쓰지 말거라
더 애쓰지 않음이, 극진히
애쓰는 거다

터지는 대로 목놓아 울고
퍼지는 대로 드러누워라, 혹

배고프면 벌떡 일어나 오달지게 먹고


먹을 게 없거든
시린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로
몸 씻고
금을 캐거라, 그 금 말이다

그 금이 네 영혼인 날
내게는 은으로 다오

올해 마지막 달, 그
마지막 달 첫 날에
경계의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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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 심오할수록, 그것을 성취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결과에 연연하는 한, 우리는 결과가 나오는 점점 더 작은 과업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101-102쪽)


어디서 읽었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날카로운 통찰이라 날카롭게 새겨두었던 말이 하나 떠오른다.


“자신이 넘고자 했던 산을 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혹시 그 산이 너무 낮지 않았는지 의심해봐라.”


내가 이 말을 새겨둔 것은 구원을 받았다, 참 나를 보았다, 도를 얻었다, 견성했다·······떠벌이는 양아치들에 유념했기 때문이다. 그 양아치들이 혹세무민하는 꼴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손에 쥔 “결과”는 “작은 과업”에 매달린 결과다. 그들의 결과에 세월호 아이들이 있는가. 그들의 결과가 예멘 난민 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의 결과는 고래 뱃속의 플라스틱을 어찌 할 수 있는가.


세월호 진실, 예멘 난민 과업, 고래 뱃속 플라스틱은 “심오”한 “비전”인가? 무엇이 심오한 비전인가? 신비를 말한다고 해서 파커 J. 파머가 신비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 심오함은 아마도 사회학적 상상력과 유관하지 싶다.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역량이 걸린 문제라면 심오하다 할 수 있지 않겠나.


부서진 세계를 부서진 존재로 살면서 부서진 문제를 붙들고 성공과 행복을 종알대게 만드는, 저 “작은 과업”detail에 깃든 악마를 간파해야 한다. 즉각 주어지는 보상에 찍힌 파멸의 바코드를 확인해야 한다. 감춰진 전체성을 통찰해야 한다. 보물찾기는 의외로 쉽다. 대박난 자들의 쓰레기통만 뒤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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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참전했다 당한 부상과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구십줄 어르신이 몇년째 침치료 받으러 오신다. 요즘따라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신다. 띄엄띄엄 하시는 말씀을 이어보면 대략 이렇다.


밤새 아내 소변-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수발드느라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다. 자식들은 도리가 아니라, 면서 요양병원에 모시는 걸 반대한다. 그렇다고 손수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도 아니다. 병든 아버지한테 떠넘기고 태평하니 너무 야속하고 힘들다.


한의원에 자주 오시는 까닭이 하나 더 는 셈이다. 나는 일부러 대화를 청하는 한편, 간호사에게 좀 더 쉬다 가시도록 유침, 온열치료, 저주파치료 시간을 늘이라 일렀다. 이 또한 하나의 치유가 아닐까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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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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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은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형제들이여, 이제부터 모두 스스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주된 사회(정치, 경제, 종교) 제도들이 심각한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역사적 시점에 내게 큰 울림을 주었던 그 연설에서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구조는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좋아질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라는 건 제거될 수도 있어요. 모든 것이 제거되었을 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98-99쪽)


사회구조가 모두 제거되는 상황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스스로 서라는 충고는 무의미하다. 충고하지 않아도 그리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 입을 대는 것은 췌사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면 머튼이 말한 것은 어떤 상황일까?


현실국가가 엄존하는 한, 구조의 전면 제거란 없다. 오히려 극소수 과두지배층의 금고지기 노릇으로 영락해갈수록 구조는 강고해진다. 그 강고한 구조가 수탈당하는 다수 처지에서 보면 제거된 ‘구조’다. ‘구조’는 본디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좋아질 수 있도록·······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


이 모순 속에서 “이제부터 모두 스스로 서야 합니다.”라고 한 충고는 무엇을 향하고 있나? 머튼이 고답적 각자도생을 설파했다고 의심하는 것은 모독일 터. 구조의 부질없음을 간파하고 있으므로 그는 정확히 중도의 칼날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름 아닌 “‘고독의 공동체’ ‘홀로 함께 있는’ 한 가지 방식”(98쪽)이다.


각자도생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다. 엄밀 공동체는 바로 이 경계에 서야 한다. 문제는 통속한 공동체 대부분이 구조(, 또는 그에 가깝다)라는 사실이다. 종교성을 띨 경우 더욱 위험하다. 그 종교성이 일극집중적일 경우 더더욱 위험하다. 이 위험한 사이비 공동체는 결국 지배구조에 부역하고 만다.


엄밀 공동체는 각자도생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고,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둘이 된다. 포개고 쪼개기를 찰나마다 가로지르며 평등과 자유, 그리고 평화의 파동波動장을 창조한다. 존엄한 개체 의식과 네트워킹을 통한 전체 지향에 동시성을 이루어야 가능한 일이다. 동시성이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꼭 만큼이 참 공동체다.


동시성을 동시에 일으켜야 할 때도 있다. 우리 공동체는 얼마 전 그 묵시록적 사건을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했다. 그 특별한 경험은 허다한 불길을 이루며 번지고 있다. 더디 날래게 묵시록적 과제를 골골이 공유해가고 있다. 극소수 과두지배층이 단말마의 광란으로 치닫는 동안 바리들은 고요히 공동체 무한 네트워킹에 배어든다. 세상을 바꾸는 분노는 고함치는 입이나 삿대질하는 손에 있지 않다. 변방으로 걸어가는 발에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


섣부른 낙관보다 더 나쁜 것이 가차 없는 비관이다. 그 가차 없음은 현실을 결결이 겹겹이 모르는 데서 온다. 현실을 결결이 겹겹이 모르면 적고 작은 존재들을 무시한다. 적고 작은 존재들의 공동체 운동이 신의 보행이다. 자작자작·······발맘발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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