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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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진지함·······점잖은 허구·······가면을 벗고 약점의 희극적 연대가 시작되면 유쾌하다.(36쪽)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성베드로성당 특별 제단에서 신도 없이 홀로 미사를 집전했다. 텅 빈 어두운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교황의 뒷모습이 내게는 신성하고 엄숙하게 보이지 않았다. 바이러스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약함을 끌어안고 나지막이 연대하는 구부숭한 노인의 허허롭고 푼푼한 발걸음이 보였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붉은 눈시울일 그 풍경이 내게는 깊은 미소로 다가왔다. 그것은 예수가 보여준 장엄한 유머의 재현이었다. 실로 무인지경의 유쾌였다.



약점의 희극적 연대가 시작되면 유쾌하다.


이 문장은 아연 단단하다. 약점과 희극과 연대와 유쾌, 이 넷은 여기서 어느 하나라도 누락시키고는 존립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설명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프란치스코, 그러니까 아시시Assisi 성자 이야기로 갈음한다.


아시시 프란치스코가 예수를 본받아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간다. 얼마쯤 지났을까, 제자 중 하나가 허기를 견디다 못해 몰래 밥을 먹는다. 스승에게 그 광경을 들킨다. 당사자 포함, 모든 제자들이 숨죽이며 처분을 기다린다. 스승은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리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가면을 벗고 약점의 희극적 연대가 시작되면 유쾌하다.


가면을 벗으면 된다. 저 프란치스코와 이 프란치스코는 예수를 본받아 가면을 벗었다. 예수는 신의 가면을 벗고 인간이 되었다. 죄 없는 인간의 가면을 벗고 사형수로 죽었다. 죽음의 가면을 벗고 무덤을 비웠다. 부활의 가면을 벗고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거점마저 지웠다. “나를 만지지 마라!” 우주 최강의 유쾌한 우스개다.



이리도 유쾌한 우스개가 바로 예수의 구원이다. 예수 장사꾼 집단인 기독교는 예수의 우스개를 따라 유쾌하게 웃지 않는다. 너무도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진지함·······점잖은 허구·······가면”에 집착한다. 이 집착을 벗겨낸다면 코로나19야말로 전지전능한 하느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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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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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의·······웃음은 억압의 실패다. 그래도 우리는 즐겁다. 다름 아닌 억압을 위반하는 바로 그런 행위를 통해서 억압의 힘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완전히 고결한 인간은 완전히 악랄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웃지 않을 것이다. 전자는 애초에 불경한 감정을 품지 않을 것이고, 후자는 금지의 힘을 인식하지 못할 터이므로 그것을 위반해 넘는 데서 오는 특별한 전율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농담은 억압행위와 억압당하는 본능을 모두 아우르는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s’이다.(33-34쪽)


이 문단을 읽을 때, 그냥 쓰윽 넘어갈 수 없는 두 단어가 있다. 첫 문장 바로 뒤에 오는 “그래도”와 마지막 문장 끄트머리의 “타협”이다.


그래도”는 본디 억압의 실패가 즐겁지 않다는 논지를 따라 쓰는 역접 또는 양보 의미의 접속사다. 억압의 실패가 즐거우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억압을 위반해야 한다. 다음, 위반함으로써 그 억압의 힘이 인식되어야 한다. 위반과 억압 사이에는 팽팽한 비대칭의 대칭 구도가 사건적으로 엄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위반이 억압을 찰나적인 해체로 몰고 가지만 “결코 그것에 의존하기를 멈추는 법이 없다.”(20쪽)는 테리 이글턴의 통찰은 바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위반과 인식, 해체와 의존은 상호경계사건으로 무한히 만나고 헤어진다. 이것이 바로 원효의 화쟁에서 나타나는 입쟁-파쟁의 나선순환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협”은 함량 미달의 언어다. 모순을 아우르는 것은 타협이 아니다. 모든 실재는 공변양자장 안에 있다. 100% 고결한 인간이나 100% 악랄한 인간은 실재가 아니다. 역설 속에서 공존하는 것은 존재론적·물리학적 진리사건이다. 공시적 경계와 통시적 맥락이 형성되는 각각의 특이점에서 각각의 상태함수에 의거 각각의 우스개가 된다.


재미 짓는 우스개의 특이점과 의미 짓는 우르개의 특이점이 별개의 것이 아닐 수도 있음 또한 우연적 필연이다. 웃음이 그대로 울음의 한 방식이고 울음이 그대로 웃음의 한 방식일 때, 우스개와 우르개는 서로의 목숨을 거두어 서로의 결실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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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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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대면하여 웃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유한성을 가벼이 여김으로써 얻게 되는 모종의 즐거움이 있다. 죽음을 가지고 농담하면서 죽음의 콧대를 꺾어놓고, 우리를 지배하는 죽음의 무시무시한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환자: 제가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의사: 10입니다.

환자: 10이라 하시면? 10년? 10개월? 10주?

의사: 아뇨. 10, 9, 8, 7·······(27쪽)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타나토스Thanatos’, 즉 ‘죽음 충동’이라고 부른 것도 의미와 가치를 분쇄하기에, 우리가 유머로 알고 있는 순간적인 감각 교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머와 마찬가지로, 이런 디오니소스적인 힘은 즐거이 감각을 왜곡하고, 위계를 뒤흔들고, 정체성을 병합하고, 차이를 뒤섞으며, 의미를 붕괴시킨다. 이 모든 것을 이뤄내는 카니발이 묘지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차별의 허를 찔러 그것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카니발은 세상 만물의 절대적 평등을 긍정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배설물이 난무하는 광경으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나아간다. 모든 것을 똥과 다름없는 것으로 축소한다.·······‘죽음의 수평화Dead levelling’라고 할 만하다.(28-29쪽)


죽음(의 공포)는 절대거대의 권력이다. 우스개는 그것을 “똥과 다름없는 것으로 축소한다.” 우스개 앞에서 그것은 작다랗다. 죽음(의 공포)는 절대지고의 권력이다. 우스개는 그것을 “수평화”한다. 우스개 앞에서 그것은 납작하다. 죽음(의 공포)를 작고 납작하게 만드는 우스개가, 그러니까 카니발이 죽음 충동을 언어와 행위 세계로 펼쳐내는 유희요 기획인 것은 자연스럽다.


죽음 충동은 자기를 해체하려는 충동이다. 자기를 해체하려는 충동은 타자와 일치 또는 합일하려는 충동이다. 타자와 일치 또는 합일하려는 충동은 자기를 작고 납작하게 만들어 겸손하고 평등한 네트워킹을 이루려는 충동이다.


거대·지고한 죽음(의 공포)를 만들어낸 거대·지고한 자아 세계의 “감각을 왜곡하고, 위계를 뒤흔들고, 정체성을 병합하고, 차이를 뒤섞으며, 의미를 붕괴”시키는 일은 사실에서 허구로, 거대·지고한 권력에서 사소한 “”으로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차를 만들어낸다. 그 낙차가 폭발적 감흥을 일으킨다. 감흥은 웃음이라는 몸 반응으로 나타난다. 웃으면 감흥은 더 낭창낭창해진다.


우스개는 일상에서 죽임과 죽음을 맛보게 하는 카니발이다. 카니발에서 벌이는 모든 일이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다. 그 죽임과 죽음은 가장자리에서 살림과 삶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진다. 우스개는 다만 도구적 기술이 아니라 우아한 존재론적 행위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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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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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관한·······설명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울음에도 적용된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웃음과 울음이 언제나 쉽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찰스 다윈은 감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지적하기를, 기쁨은 슬픔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 있으며, 두 상태 모두 눈물바다를 수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22-23쪽)


테리 이글턴의 “주목”은 이 정도에서 끝난다. 웃음을 이야기하는 글이니까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이 문제는 구태여 입 댈 필요가 없다고 해야 더 매끄럽다. 기왕 주목할 바에야 웃음과 울음, 엄밀하게 말하면 우스개가 일으키는 웃음과 우르개가 일으키는 울음의 관계를 좀 더 실하게 살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논점 이탈digression이 아니다. 우스개의 성격과 위상을 구조적으로나 역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논점 포괄inclusion이다.


앞서 언급한 <울음과 웃음의 정치생태학비판>의 일부를 발췌해 음미해본다.


세계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운동이다. 쪼개진 둘의 영속화도 억압이고 포개진 하나의 영속화도 억압이다. 이 억압에 찰나적으로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릴 때 인간은 울음 또는 웃음으로 반응한다. 울음은 무엇이며 웃음은 무엇인가? 어떤 경우는 울음이며 어떤 경우는 웃음인가?·······


일상의 정서에서 울음은 어둠, 웃음은 밝음으로 느낀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 느낌은 뒤집힌다. 일상의 이성에서 울음은 눈물이란 물질로 나타나고, 웃음은 그런 물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 인식은 뒤집힌다. 고전물리학적 어법에서 울음은 입자고 웃음은 파동이다. 양자물리학적 어법에서 울음과 웃음은 상태함수 차이일 따름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식으로 정리하면 울음과 웃음은 안팎으로 나뉘되 하나인 무엇이고, 하나이되 안팎으로 나뉘는 무엇이다. 안팎의 나뉨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은 물론이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그때그때 식별 가능한 실재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울음은 울음인 만큼, 웃음은 웃음인 만큼 실재하는 사건이다. 그 실재가 출발점이다.


태초에 울음이 있었다. 본디 울음은 웃음과 혼융된 하나였다. 울음에서 웃음이 떨어져 나오는 찰나 울음의 소향실재와 웃음의 소향실재가 나뉘었다. 울음은 하나라고 믿었는데 둘로 쪼개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터져 나온다. 웃음은 둘이라고 믿었는데 하나로 포개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터져 나온다. 울음은 아프되 삽상하다. 웃음은 즐겁되 씁쓸하다.


양태는 다르지만 기존의 갇힌 세계에서 이탈하는 경험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울음과 웃음은 동일하다. 기존 세계에서 이탈하는 것은 다만 예외적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전체 진실을 향해 변화해가는 것이다. 울음과 웃음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방식으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세계 진실의 열린 네트워킹에 참여하는 근원행위다.


이 정도 논의만으로도 왜 “웃음에 관한·······설명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울음에도 적용”되는지, “웃음과 울음이 언제나 쉽게 구별되지는 않는”지, “기쁨은 슬픔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 있으며, 두 상태 모두 눈물바다를 수반할 가능성이” 있는지 전향적 추적의 총론이 구성된다. 총론을 되작이면 우스개의 성격과 위상을 구조적으로나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각론의 상상이 시작된다.


상상의 첫 삽을 떠보자. 기쁨과 슬픔 모두 눈물바다를 수반할 수 있다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럼, 기쁨과 슬픔 모두 웃음바다를 수반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가? 대뜸 고개를 끄덕거릴 사람이 많지는 않으리라. 테리 이글턴은 이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다른 방식으로 답 아닌 답을 했다. 논리 전개가 느슨해진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느슨함이 테리 이글턴의 우스개라면 그는 절정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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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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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대다수는 유머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무엇보다 희열을 느끼는 경우 상황이 웃기다고 여길 가능성이 좀 더 높기는 하지만, 웃음은 재미보다는 오히려 고양된 기분을 나타내는 징표일 수 있다.(17쪽)


테리 이글턴은 외양으로 20개, 내용으로 23개의 다른 웃음을 예시한다. 톺아보면 더 많은 수가 나올 테지만, 그 이상은 무의미하다 할 만큼 그의 추적은 세밀하다. 얼마나 다양한 웃음이 존재하든 문제는 그 대다수가 “유머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관심사는 웃음 자체가 아니라 유머다. 유머는 “고양된 기분을 나타내는 징표”인 웃음의 제조 기술이 아니다. 유머는 “재미”의 세계를 열어가는 파동의 진원이다. 재미는 의미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한 축이다.


의미에 대한 맹목적인 물질성의 과잉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유머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음미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더불어 우리가 이런 식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독려하기도 한다.(18쪽)


의미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달시킨 상상력의 소산으로서 열역학제이법칙이나 유한성에 저항하는 일종의 적응양식이다. 의미는 “논리정연하고 일관성 있는”(20쪽) 형식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과잉 물질성으로 나아가는 맹목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강고한 물질 의미를 “해체”(20쪽) 또는 “붕괴”(20쪽) 또는 “분열”(20쪽)시킴으로써 엄숙한 맹목세계를 “음미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해주고 “이런 식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독려”하는 것이 바로 재미가 의미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리다.


의미는 본디 물질의 상태함수로 표현될 것이 아니다. 정신을 전유한 자아가 스스로 권력화하면서 의미에 물질성을 입혔을 뿐이다. 물질 의미의 수직적 특별함을 단박에 깨뜨려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유머, 그 유머가 일으키는 수평적 일치의 재미, 그 재미의 몸 발현인 웃음, 그 웃음으로 번져가는 허허로운 연대, 이런 사건의 겹을 통과하면서 진리는 그 한쪽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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