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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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대면하여 웃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유한성을 가벼이 여김으로써 얻게 되는 모종의 즐거움이 있다. 죽음을 가지고 농담하면서 죽음의 콧대를 꺾어놓고, 우리를 지배하는 죽음의 무시무시한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환자: 제가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의사: 10입니다.

환자: 10이라 하시면? 10년? 10개월? 10주?

의사: 아뇨. 10, 9, 8, 7·······(27쪽)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타나토스Thanatos’, 즉 ‘죽음 충동’이라고 부른 것도 의미와 가치를 분쇄하기에, 우리가 유머로 알고 있는 순간적인 감각 교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머와 마찬가지로, 이런 디오니소스적인 힘은 즐거이 감각을 왜곡하고, 위계를 뒤흔들고, 정체성을 병합하고, 차이를 뒤섞으며, 의미를 붕괴시킨다. 이 모든 것을 이뤄내는 카니발이 묘지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차별의 허를 찔러 그것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카니발은 세상 만물의 절대적 평등을 긍정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배설물이 난무하는 광경으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나아간다. 모든 것을 똥과 다름없는 것으로 축소한다.·······‘죽음의 수평화Dead levelling’라고 할 만하다.(28-29쪽)


죽음(의 공포)는 절대거대의 권력이다. 우스개는 그것을 “똥과 다름없는 것으로 축소한다.” 우스개 앞에서 그것은 작다랗다. 죽음(의 공포)는 절대지고의 권력이다. 우스개는 그것을 “수평화”한다. 우스개 앞에서 그것은 납작하다. 죽음(의 공포)를 작고 납작하게 만드는 우스개가, 그러니까 카니발이 죽음 충동을 언어와 행위 세계로 펼쳐내는 유희요 기획인 것은 자연스럽다.


죽음 충동은 자기를 해체하려는 충동이다. 자기를 해체하려는 충동은 타자와 일치 또는 합일하려는 충동이다. 타자와 일치 또는 합일하려는 충동은 자기를 작고 납작하게 만들어 겸손하고 평등한 네트워킹을 이루려는 충동이다.


거대·지고한 죽음(의 공포)를 만들어낸 거대·지고한 자아 세계의 “감각을 왜곡하고, 위계를 뒤흔들고, 정체성을 병합하고, 차이를 뒤섞으며, 의미를 붕괴”시키는 일은 사실에서 허구로, 거대·지고한 권력에서 사소한 “”으로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차를 만들어낸다. 그 낙차가 폭발적 감흥을 일으킨다. 감흥은 웃음이라는 몸 반응으로 나타난다. 웃으면 감흥은 더 낭창낭창해진다.


우스개는 일상에서 죽임과 죽음을 맛보게 하는 카니발이다. 카니발에서 벌이는 모든 일이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다. 그 죽임과 죽음은 가장자리에서 살림과 삶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진다. 우스개는 다만 도구적 기술이 아니라 우아한 존재론적 행위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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