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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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관한·······설명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울음에도 적용된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웃음과 울음이 언제나 쉽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찰스 다윈은 감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지적하기를, 기쁨은 슬픔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 있으며, 두 상태 모두 눈물바다를 수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22-23쪽)


테리 이글턴의 “주목”은 이 정도에서 끝난다. 웃음을 이야기하는 글이니까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이 문제는 구태여 입 댈 필요가 없다고 해야 더 매끄럽다. 기왕 주목할 바에야 웃음과 울음, 엄밀하게 말하면 우스개가 일으키는 웃음과 우르개가 일으키는 울음의 관계를 좀 더 실하게 살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논점 이탈digression이 아니다. 우스개의 성격과 위상을 구조적으로나 역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논점 포괄inclusion이다.


앞서 언급한 <울음과 웃음의 정치생태학비판>의 일부를 발췌해 음미해본다.


세계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운동이다. 쪼개진 둘의 영속화도 억압이고 포개진 하나의 영속화도 억압이다. 이 억압에 찰나적으로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릴 때 인간은 울음 또는 웃음으로 반응한다. 울음은 무엇이며 웃음은 무엇인가? 어떤 경우는 울음이며 어떤 경우는 웃음인가?·······


일상의 정서에서 울음은 어둠, 웃음은 밝음으로 느낀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 느낌은 뒤집힌다. 일상의 이성에서 울음은 눈물이란 물질로 나타나고, 웃음은 그런 물질로 나타나지 않는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 인식은 뒤집힌다. 고전물리학적 어법에서 울음은 입자고 웃음은 파동이다. 양자물리학적 어법에서 울음과 웃음은 상태함수 차이일 따름이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식으로 정리하면 울음과 웃음은 안팎으로 나뉘되 하나인 무엇이고, 하나이되 안팎으로 나뉘는 무엇이다. 안팎의 나뉨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은 물론이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해서 그때그때 식별 가능한 실재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울음은 울음인 만큼, 웃음은 웃음인 만큼 실재하는 사건이다. 그 실재가 출발점이다.


태초에 울음이 있었다. 본디 울음은 웃음과 혼융된 하나였다. 울음에서 웃음이 떨어져 나오는 찰나 울음의 소향실재와 웃음의 소향실재가 나뉘었다. 울음은 하나라고 믿었는데 둘로 쪼개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터져 나온다. 웃음은 둘이라고 믿었는데 하나로 포개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터져 나온다. 울음은 아프되 삽상하다. 웃음은 즐겁되 씁쓸하다.


양태는 다르지만 기존의 갇힌 세계에서 이탈하는 경험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울음과 웃음은 동일하다. 기존 세계에서 이탈하는 것은 다만 예외적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전체 진실을 향해 변화해가는 것이다. 울음과 웃음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방식으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세계 진실의 열린 네트워킹에 참여하는 근원행위다.


이 정도 논의만으로도 왜 “웃음에 관한·······설명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울음에도 적용”되는지, “웃음과 울음이 언제나 쉽게 구별되지는 않는”지, “기쁨은 슬픔으로 쉽게 오해받을 수 있으며, 두 상태 모두 눈물바다를 수반할 가능성이” 있는지 전향적 추적의 총론이 구성된다. 총론을 되작이면 우스개의 성격과 위상을 구조적으로나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각론의 상상이 시작된다.


상상의 첫 삽을 떠보자. 기쁨과 슬픔 모두 눈물바다를 수반할 수 있다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럼, 기쁨과 슬픔 모두 웃음바다를 수반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가? 대뜸 고개를 끄덕거릴 사람이 많지는 않으리라. 테리 이글턴은 이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다른 방식으로 답 아닌 답을 했다. 논리 전개가 느슨해진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느슨함이 테리 이글턴의 우스개라면 그는 절정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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