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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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는 상당 부분 위반 내지 이탈의 문제다. 서로 다른 현상을 나누는 경계가 흐릿해지면 엄격히 구분하려는 충동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이때 남아도는 에너지가 웃음으로 방출되는 것이다.(141쪽)


<시사인>이 415총선을 두 차례에 걸쳐 분석했다. 한 번 더 남아 있는데, 기왕의 분석을 간단히 요약한다. “415총선에서 정당과 지지층 사이의 강고한 ‘정렬’에 균열이 일어난 증거가 포착되었다. 대규모 ‘이탈’을 거쳐 ‘전향’이 일어난 것이다. ‘동원’ 여하에 따라 확고한 ‘재정렬’ 여부가 결정되겠지만, 유의미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변화는 2016년 총선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기나긴 보수 다수파 구조를 종식시킨 이 변화의 선두에 30-40대 수도권 여성이 있다.”


왜 2016년 총선이며, 왜 30-40대 수도권 여성인지, 분석 결과가 아직은 없다. 남은 차례에 나오리라 기대하지만, 일단 내 생각은 416이지 싶다. 태생적인 보수 성향과 사회 문제에 별 관심 없는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침륜되어 있던 젊은 여성들에게 416, 그 무엇보다 2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죽음은 통렬한 각성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416 자체도 그렇거니와 416을 대하는 보수, 정확히는 수구 세력의 폭력·협잡을 겪으면서 이탈이 일어나고, 이탈은 전향으로 이어졌으리라.


이탈과 전향은 쉽지 않다. 20세기 초반까지 우리사회는 장구한 왕정 아래 있었다. 지배집단의 말을 법이며 진실로 받아들이는 왕정시대 집단의식은 식민지·이승만·박정희와 그 패거리 시대를 거치면서 본질이 유지되었다. 아니, 다른 모습으로 강화되었다고 하는 게 타당할지 모른다. 진보는 공산주의고, 반공이 애국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소시민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탈과 전향이 가능하려면 “서로 다른 현상을 나누는 경계가 흐릿해”져야 한다. 공산주의자만 인간 아닌 줄 알았는데 그에 못지않은, 또는 그보다 더한 괴물이 반공주의자인 것을 알아버린 뒤 경계는 아연 흐릿해졌다. 민주당이 좋아서라기보다 미통당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이탈하고 전향했다는 분석은 평범한 소시민의 심리 상태를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다. 동원이 일어나 재정렬로 귀결될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미통당·조중동·검찰 수구카르텔의 주류적 경계가 “엄격히 구분”되는 시대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찰나마다 일어서는 불멸, 저 415우스개를 잊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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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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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 예술은 유한성이 아니라 특이한 종류의 불멸성, 즉 가장 파괴적인 재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만화 같은 능력을 내포한다.·······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면 그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죽음을 측면 돌파할 수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눈에 잘 띠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다. 반면, 높은 자리의 힘 있는 자는 무모하고 위험한 짓을 벌인다. 이런 오만을 그리는 장르가 바로 비극이다. 무한정 살아남는 것은 무조건 무의미하다.(101-102쪽)


비극 속 영웅은 자신의 죽음과 패배를 자유자재로 활용함으로써 본인의 유한한 지위를 초월하고, 너덜너덜해진 시간으로 뭔가 영원하고 귀한 것을 직조해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희극의 등장인물은 무한한 생존이라는 의미에서 영원성이 아니라, 불멸성을 달성한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103쪽)


영원과 불멸은 영원불멸로 붙여 써서 동일한 의미를 강화하는 어휘처럼 인식하는 것이 상식이다. 테리 이글턴은 양자를 구별한다. 영원은 “무한한 생존”이라는 정의에 준한 언급이 있어서 추상적이나마 포착하기 쉬운 개념이다. 불멸은 그렇지 않다. “특이한 종류의 불멸성, 즉 가장 파괴적인 재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만화 같은 능력”이란 말은 그야말로 만화 같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라는 말은 더욱 알쏭달쏭하다. 다른 근거가 없으니 이 두 문구를 가지고 행간을 상상해본다.


재앙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멸이란 말을 사건적으로, 카이로스적으로 쓰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눈으로 ‘그저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오직 찰나마다 일어설 뿐’이라는 뜻이 살그머니 드러난다. 비로소 영원의 크로노스적 시간 지배와는 전혀 다른 불멸의 진면목이 다가온다.


영원은 “높은 자리의 힘 있는 자”가 관념으로 “직조”한 허구다. 권력 이데올로기다. 불멸은 “눈에 잘 띠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 몸으로 일군 “돌파”다. 몸의 돌파는 시간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찰나마다 시간과 조우한다. 그 조우가 “무한정 살아남는 것은 무조건 무의미하다.”는 진리를 증명한다. 무한정 살아남는 것은 무의미 이전에 무‘실재’다. 무실재의 영원은 오직 탐욕의 실재를 증명한다. 불멸은 찰나실재다. 찰나실재인 불멸이 탐욕을 무실재로 만든다. 탐욕의 무실재화, 이거 우스개의 로망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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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는 타인의 모욕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스스로 보란 듯이 내보이면 그를 무장 해제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기 비하 유머는 어쩌면 굴욕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그 굴욕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고가 있는 힘껏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낮추면, 인정사정없는 잔혹한 초자아의 질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모순에 이르는 수준의 통찰력과 투지를 발휘한다. 한 인간의 범속함을 초월하게 하는 힘은 그러한 범속함을 고백할 수 있는 솔직함에서 나온다.(101쪽)


더 아래로 떨어질 데가 없는 사람은 기이한 무적無敵성을 만끽한다.(102쪽)


여기 “자기비하 유머”라는 말은 대단히 우아한 형용모순이다. 자기비하는 질병이다. 유머는 치유다. 자기비하, 좀 더 단도직입으로 말해 자기부정이 증후군을 형성한 질병을 흔히 우울증이라 부른다. 우울증은 자신이 자기부정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것이 병이다. 자기 부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서 마침내 구사하면, 그러니까 우스개 삼으면 치유는 반환점에 도달한다.


반환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스개로 말미암아 우울증 앓는 사람은 스스로 무無성으로 들어가 “기이한 무적無敵성을 만끽한다.” 기이한 무적성을 만끽할 때 그는 웃음의 형식으로 통곡을 택한다. 통곡은 극단적 자기부정 상태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서 흔쾌히 구사하는 자기축제의 팡파르이자 극단적 자기부정에 빠졌던 상태와 이별하는 자아장례의 레퀴엠이다. 그 통곡이 끝나면 이제 돌아가야 한다. 어디로 돌아가는가?


굴욕을 극복”하고 “범속함을 초월”하는 것은 영광과 성결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다. 극단 자기부정과 극단 자기긍정을 떠나 무애無㝵 꽃을 피우기 위해서다. 무애 꽃은 불순물끼리 화학작용을 일으켜 빚는 융화다. 상호작용하는 불순물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경계시공이다. 경계시공에서 그는 부정·긍정 너머 자기인정의 삶을 새로이 시작한다. 자기인정은 눈물겨운 여정이다. 눈물겨운 여정에서 우스개가 어찌 에너지로 작동하겠나. 에너지는 우르개에서 나온다. 우르개가 부르는 울음의 형식은 빈소嚬笑다. 빈소는 곱절로 “기이한 무적無敵성”을 부르는 영검 무쌍 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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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연극에서는 감동 금지 덕분에 그 어떤 특별한 관점이라도 상대화할 수 있고, 전체 사건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갈등과 모순을 놓치지 않은 상태에서 거리를 두고 내린 판단이나 평가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장의 적이 된다.·······하나의 관점은 상반되는 또 하나의 관점과 경합하게 되고, 모순이 탄로 나며, 실제와 불화하는 다양한 범주의 가능성이 넌지시 드러난다.·······이 같은 종류의 장치에는 변증법적 특징이 있다. 실제로 브레히트는 변증법적 사고를 이해하는 사람치고 유머 감각 없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브레히트에게·······역사란 변화무쌍하며 정해진 답이 없다는 주장은 본질상 희극적 뭔가를 품은 것이다. 희극적 전복의 궁극 기능은 정치혁명이다. 어제 페인트 공이었던 히틀러가 오늘 수상이 되지만, 내일은 벙커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일련의 과정을 암시한다. 희극의 반대말은 운명이다.(90-91쪽)


희극과 운명론은 서로 통한다.” 불과 다섯 쪽 앞에서 테리 이글턴이 한 말이다. 물론 “희극의 반대말은 운명이다.”란 말을 브레히트의 것으로 보면 두 사람의 견해가 다르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럴까?


테리 이글턴이 말한 운명론의 범주는 세계 또는 우주다. 브레히트가 말한 반-운명(론)의 범주는 역사다. 익명의 소시민에게 두 범주는 별반 차이가 없다. 이 경우, 이글턴과 브레히트는 양립 불가다. “정치혁명”을 논할 정도의 인물에게 두 범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 경우, 이글턴과 브레히트 간 상충은 없다. 


하나의 관점은 상반되는 또 하나의 관점과 경합하게 되고, 모순이 탄로 나며, 실제와 불화하는 다양한 범주의 가능성이 넌지시 드러난다.” 이 “변증법적 특징”을 품은 희극은 “정치혁명”을 지향한다. 이 지향은 운명을 거스른다. 운명을 거슬러 정치혁명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장”으로 똬리를 틀면 어떤가. 변증법이 아니다. 진정한 변증법에 절대적이고 완벽한 주장 따윈 없다. 나든 남이든 언제든 어디서든 그 주장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변증법이다. 이때 변증법은 우스개의 다른 이름이다. 우스개는 세계 또는 우주 사건의 한 파동으로 일어났다 스러진다. 이때 우스개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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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세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널리 공유되기 원하는 가치의 붕괴를 결과하기 십상이다. 사실성의 무시는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다.·······역사가 상황을 오판하고 일을 그르친 예가 허다하기에 이런 역사의 결함을 바로잡으려면 희극이 필요하다.(90쪽)


사악한 세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는 사악한 세상을 바꾸려는 의로운 뜻에서 만든 객관적·비판적 표현이 분명하다. “널리 공유되기 원하는 가치”가 달리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어째서 그 사실적 묘사는 도리어 당위로 삼은 “가치의 붕괴를 결과하기 십상”인가?


여기 사실적이란 말은 실은 사실‘주의’적이란 말이다. 사실주의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지만 엄밀하게 보면 그 현실은 근본주의로 걸러낸 ‘순수’ 현실이다. 사악한 세상에 대해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세상의 사악을 절대사악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실재는 그렇지 않다. 100% 사악한 세상은 없다. 사실적 묘사가 비현실적 묘사라는 전복은 이래서 일어난다.


비현실적 사실주의는 현실에서 물질적 전선을 형성하지 못한다. 현실의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 현실의 사람 밖에서 저들은 알량한 게토를 만들어 아라한의 삶을 즐긴다. 아라한은 입으로만 공동체를 사랑한다. 입공동체는 점점 더 현실의 사람에서 멀어져간다.


현실의 사람은 근본주의·순혈주의의 사실적 묘사, 그 가차 없는 비판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진리를 안다. “상황을 오판하고 일을 그르친” 저 똑똑한 사실주의의 “결함을 바로잡으려면 희극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스스로 실천한다. 사실적 묘사를 버리고 예술적 묘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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